< 29. 악마의 긴 밤(1) >
타칸이 검을 한차례 털어냈다.
인간들의 사냥은 끝났다. 자신의 실력을 점검해볼 좋은 기회였다.
포식자의 이름에 걸맞게 모든 걸 먹어치운 결과였다.
만약 멈춰있었다면 이렇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우히가 보기엔요. 100점 만점에 30점이요.”
“뭐라?”
타칸의 해골이 한차례 흔들렸다.
어느 사이엔가 구경을 온 우히가 타칸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종합적으로 점수를 매기고 평가를 시작한 것이다.
한 마디 부탁을 안 했음에도 말이다.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요정이구나, 라고 생각은 했지만 엄청나게 짠 점수에 절로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우히가 하늘을 뱅뱅 돌며 말했다.
“치열함이 없어. 보는 맛이 없어! 재미가 없어. 너무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거 아니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죽고 싶은 게냐?”
“서방님을 반이라도 닮아보렴. 그 박진감! 그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초탈함! 무엇보다 멋있잖아. 여러모로 대비된다, 얘. 우히히.”
타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선 단칼에 저 요망한 요정을 반으로 갈라버리고 싶지만 쉽지 않다.
무영을 따르는 요정이라서?
그것도 없진 않겠으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왜 저런 요정한테 요정왕과 마신의 가호가 걸려있는지 모르겠군.’
다른 이는 속여도 자신의 눈까진 속일 수 없다.
악령. 즉, 수많은 혼을 다루는 타칸에게만 보이는 게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선 무영도 깨닫지 못했을 테지.
우히에게 걸려있는 수많은 가호들은 다른 요정과도 분명히 대비되는 점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든 가호가 작은 기적에 맞먹는다.
저 많은 가호들이 발동하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게 마신의 가호였다.
‘요정들은 솔로몬을 돕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한 계약이 있다는 것만 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따져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72마신이 아니군. 요정계에 그와 비슷한 존재가 있는 것일지도.’
더 자세히 살핀 결과 72마신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느껴졌다.
하기야 그자들은 가호 따위를 내리지 못하는 진정한 악.
악에서 태어나 악만을 먹고 자란 게 72마신이다.
우히에게 가호를 내린 건 아마도 요정계에 있는 또 다른 존재일 터였다.
요정은 본래 ‘악’과 그다지 궁합이 맞지 않는데, 우히가 엄연히 악성향에 가까운 무영을 저리 따르는 것도 그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요정이었다면 무영에게 공포감을 느꼈을 터다.
“우히히히히. 서방님, 거기는 안 되어요.”
입가를 스윽 닦으며 우히가 침을 흘렸다.
무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다시금 펼친 모양이다.
저런 바보 같은 거에 저만한 가호라니······ 돼지 목에 진주가 이럴 때 쓰는 말이련가.
타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타칸.”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무영이 다가왔다.
무영과 또 다른 한 명.
‘아크리치.’
타칸은 본능적으로 검을 쥐었다.
단순히 아크리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강하다.
또한 저 리치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빛의 기운이 타칸의 공격성을 일깨웠다.
“이 리치는 적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저게 뒤섞인 공포에 섞여있던 놈인가?”
“이름은 배승민이라 하지.”
“무영. 한 가지 충고를 해주마. 리치는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리고 저 리치에게서 묘한 이종의 향이 난다.”
무영이 피식 웃었다.
타칸의 충고가 의외이긴 했지만 그만큼 배승민의 기운이 타칸을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철판을 까는 녀석이 보는 것만으로도 이만한 경각심을 가졌으니 실로 좋
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걱정마라. 리치의 혼은 내 관할 하에 있다.”
“네가 만든 거냐? ······ 흐음. 빛의 기운을 강하게 띄는 리치는 나도 처음 보는군. 조금만 더 빛의 영향이 컸다면 리치가 아닌 다른 게 탄생했을 수도 있겠어. 조금 더 초월적인
무언가 말이야.”
다른 게 탄생했을 수도 있다?
타칸의 말은 제법 의미심장했다.
배승민이 빛의 기운을 띄는 건 어디까지나 ‘빛의 계보’와 목걸이에 박힌 ‘탈리스만’ 때문이다.
만약 빛의 계보의 적통인 배수지가 이 일에 연루되었다면 어떠한 형태로 거듭났을까?
“하여간 한 번 싸워보면 안 되겠나?”
타칸이 검을 내뻗으며 말했다.
의심은 둘 째 치고 호승심이 큰 모양이었다.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야 한다. 보아하니 정리는 끝난 것 같군.”
“이런 반푼이들 따윈 내 상대가 안 된다.”
타칸이 아쉬워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때 귀청을 강하게 때리는 소음이 생겼다.
“서, 서서, 서방님!”
얼음처럼 굳어 있던 우히가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리곤 무영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오열을 했다.
“이건, 이건, 바람인가요? 이 요망할 년은 뭔가요? 거긴 우히 자린데!”
아름과 요람의 정령은 아직 형태가 없다.
그저 빛이 뭉친 모습으로 무영의 머리 위에 있을 따름이었다.
그걸 보고 우히가 잔뜩 흥분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과 요람의 정령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다. 아름과 요람의 정령은, 무영이 느끼기에 아기와 다르지 않았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탓에 감정의 표현에도 서투른 편이었다.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우히가 무력행사를 시작했다.
우히는 아름과 요람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럴수록 아름과 요람은 속절없이 흔들려댔다. ‘구박받는 시누이’를 직접 본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비켜. 안 비켜? 우히한테 쓴맛을 봐야 비킬 테야?”
“그만.”
하는 수 없이 무영이 나섰다.
우히가 날개를 축 늘어트렸다.
“히잉. 서방님, 그래도요······.”
무영은 입을 닫고 몸을 돌렸다.
명백한 무시의 처사다.
그것을 깨닫고 우히가 아름과 요람의 정령을 바라보며 외쳤다.
“씨이. 그래도 우히가 본처야. 너는 첩이라구!”
*
무율, 군림, 그리고 야수세가에 비상이 걸렸다.
탈리스만을 찾아 떠난 정예들에게서 연락이 끊긴 탓이다.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전혀 예상에 두지 않았던 시나리오였다.
수뇌부는 당황했다. 대관절 누가?
즉시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남은 건 시체뿐이었다.
썩어가는 시체와 부서진 언데드.
그리고 뒤섞인 공포였던 것으로 보이는 허물과, 썩은내를 풀풀 풍기는 종양들뿐이었다.
“누구냐?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무율세가의 가주 무율진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조사 도중 군림세가와 야수세가의 휘장을 확인했다.
그들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탈리스만이 강탈당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군림세가와 야수세가뿐. 그 능구렁이 같은 것들이 쇼를 펼쳤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빠드득!
이빨만이 아니라 강하게 쥔 주먹에선 피가 흘렀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나마 이상한 점 하나가 있다면 어스름의 마을을 조사하면서 나온 외부인 한 명이었다.
‘외부인. 무영이라 하였던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역시나 회의적이다.
이런 일을 벌이려면 인류 10강이나 그에 준하는 강자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강자들의 이름이나 인상착의, 움직임 등을 거대집단들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에 무영이란 이름은 없다.
어쩌면 그 무영이란 자 조차 혼란을 위해 다른 세가에서 심어넣은 세작일 가능성이 높았다.
“야수······ 군림······.”
무율진의 입에서 두 세가의 이름이 처절하게 흘러나왔다.
탈리스만이 어떤 물건인가.
성신기조차 만들어낼 수 있는 신성한 힘이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성을 몇 개나 살 수도 있을 터였다.
만약 두 집단 중에 범인이 있다면 이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두 세가에 잠입해있는 세작들에게 연락을 해라. 그들의 움직임을 더욱 철저히 살피라고! 하나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즉시 보고해야할 것이다.”
방법이 없지도 않았다.
무율진은 오래전부터 모든 세가와 길드에 세작을 심어두었다.
말하자면 스파이다.
다른 길드나 집단 또한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일처리에 있어서 자신을 따라올 자는 없었다.
“예.”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즉시 무율진의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무율진은 작게 입을 열었다.
“아타락시아. 네가 해줘야할 일이 있다.”
스스슥.
방 전체에서 수백 마리의 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허나 무율진은 익숙한 듯 무감정하게 뱀들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중 가장 큰 뱀이 꼬리를 보이자, 무율진이 말했다.
“‘무영’이라는 자에 대해 조사해라. 산채로 생포해올 수 있다면 그리 하도록. 아,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문 무율진이 이어서 말했다.
“권왕에 대한 것도 일임하마. 놈이 최근 한 여자아이를 대동하고 있다지? 제자로 키울 셈인지 꽤 애지중지하는 듯싶은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권왕을 우리 쪽으로 영입
해야 할 것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우린 같은 계파가 아닌가?”
샤아아!
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자취를 감췄다.
‘모두 밝혀낼 것이다. 관련된 자라면 모두 제거하고 되찾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게 무율진으로선 익숙하지 않았다.
무율진은 당하기보단 당하게 하는 쪽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있는 그자.
무영이라는 자를 잡아와 대질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질 터였다.
아타락시아는 특급 추적자.
그들이 아무리 꽁꽁 숨겨도 실패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스름의 마을과 산맥을 벗어난 지 아흐레.
타칸이 참지 못하고 무영에게 물었다.
“따라붙은 꼬리는 언제 잘라낼 셈이냐?”
지이익. 지이익.
무영은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고자 사냥을 한 탓에 비탄이 더러워져 있었다.
때를 벗겨내고 피를 씻겼다.
이 부분에 있어선 타칸도 어이가 없었다.
비탄 정도의 무기를 멧돼지 잡는데 이용하다니. 검에 대한 애정이 없는 놈인가 싶었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네가 나서지 않겠다면 내가 나서마. 은근히 신경이 거슬리는군.”
“아직 신경이 남아있었나?”
무영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타칸이 혀를 찼다.
뼈밖에 안 남았으니 신경이 남았을 리도 없지만 그것을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지 않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살려서 데려와라.”
무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타칸이 즉시 움직였다.
곧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타칸이 사람 한 명을 어깨에 이고 돌아왔다.
무영도 익히 아는 여자였다.
양메이.
뒤섞인 공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 여인이었다.
“왜 쫓아왔지?”
“저, 저도 함께 데려가주세요.”
양메이는 꽤 절박해보였다.
하지만 무영은 이맛살만 구길 따름이었다.
“이유를 모르겠군.”
“당신은 ‘별을 먹는 별’이 아니십니까?”
“별을 먹는 별?”
툭!
타칸이 양메이를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양메이가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활약상을 보았습니다. 뒤섞인 공포를······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그 끝에 저는 보았습니다. 붉은 별. 별을 먹는 별을요!”
절대자의 별을 말하는 듯싶었다.
뒤섞인 공포를 제거할 때 마지막에 별이 발돋움을 하기는 했다.
그것을 보고 양메이가 확신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무영은 별빛으로 말미암아 다른 별을 강탈할 수 있었다.
양메이가 눈을 감고 시를 낭송하듯이 말했다.
“‘별을 먹는 별’이 나타나면 모든 별이 끌리고 싸운다. 그리하여 혼돈 끝에 태초의 별이 태어날지니. 다시금 세상의 이치가 창조되노라.”
“시인가?”
“저희 부족에게 내려오는 전승입니다. 저는 수많은 별지기 중에 하나······ 부디 저를 데려가주세요. 다른 별을 찾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양메이가 옷자락을 걷혔다.
그러자 어깨에 수많은 별의 문신이 나타났다.
“별지기의 증표입니다. 저희 부족의 사명은 별을 인도하여 태초의 별을 만드는 것! 설마 모든 일의 시작인 별을 먹는 별을 제가 맞이할 줄은 몰랐지만 이것 역시 운명이겠지요.”
무영은 양메이의 어깨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뜬금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어깨 위에 새겨진 작은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
천사와 악마의 날개를 지닌 여자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누구지?”
손으로 가리키자, 양메이가 작게 웃었다.
“저의 은인입니다. 눈과 같이 차가우셨으나 바람과 같이 흔적 없는 분이시라, 계속해서 되새기고자 문신으로 새겨 넣었지요. 별지기의 역할을 위해 어스름의 마을에 있도록 지
시한 것도 은인께서 말하신 일입니다.”
“스노우······.”
아무리 봐도 스노우였다.
특징만 새겨져있고 얼굴은 알 수 없었지만 그 특징만으로도 충분했다.
‘너는 대체 누구지?’
무영의 표정이 굳었다.
별을 따라가다보면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스노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29. 악마의 긴 밤(1) > 끝
ⓒ
< 29. 악마의 긴 밤(2) >
세 자루 곡괭이 연맹은 대대적인 개편을 맞이하고 있었다.
용이 죽고 그 기운이 깃든 장소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하고, 부서진 건물을 수복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실제로 암흑룡 바르사가 죽은 뒤 용들의 기척이 수그러들었다. 더 이상 당하고 착취당하는 노예가 아님을 드워프들 스스로가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그들의 로드, 바타스는 불현 듯 찾아온 손님들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네. 뿔이······? 도깨비는 뿔을 탈착할 수 있는 건가?”
당연히 도깨비일 것이라고 믿었던 무영의 머리에 뿔이 사라져 있었다. 바타스의 입장에선 눈을 휘둥그렇게 뜰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영을 못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으나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귀찮게 됐군.’
무영은 내심 혀를 찼다.
바타스가 이럴 정도면 영지에 들어가서의 반응은 뻔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은 무영이 잠시간 결을 보았다.
4배속으로 느려진 세상 속.
안면근육의 움직임마저 관찰되는 시점에서 무영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시간의 감속엔 순수능력치가 중요하다.’
2차 각성으로 인해 더욱 느려진 세상 속에 있을 수 있으리라고 약간 기대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듯 기본조건이 달려있었다.
바로 순수능력치.
어느 것도 덧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무영의 힘이 기준이었다.
아무래도 ‘결’이란 것 자체가 본질, 순수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보니 생기는 일인 듯했다.
그러나 2차 각성으로 인해 최소 200이상까지 순수능력치의 성장이 쉬워질 것이었다. 어차피 시간문제라는 말.
두 개의 뿔이 돋아나자 바타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허, 뿔이 두 개라니. 역시 ‘움’이로군. 도깨비들의 주인다워.”
스으윽.
하지만 지속시간이 짧다.
대략 10여초 가량을 보이고 무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요한 건 바타스가 알아봤다는 점이다.
무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약속을 지켜라.”
본인인증이 끝났다.
남은 건 바타스가 약속을 지키는 것뿐.
무영은 암흑룡 바르사의 손길에서 드워프들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우호적인 관계 내에서 최소 ‘악마의 긴 밤’을 버틸 힘만이라도 비축할 셈이었다.
다행히 바타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라면 지켜야지. 우리 드워프들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네. 700의 드워프를 3년간 빌려주지. 그들도 바라마지않는 일이야.”
3년!
파격적인 조건에 무영도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1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이 드워프들의 작은 왕국이라 하더라도 700명이면 막심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당장 암흑룡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더욱 그렇다.
이곳을 수복하고 강화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상황이건만 시원하게 700명이란 인원을 배정해버린 것이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건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곧이어 익숙한 얼굴의 드워프가 무리를 이끌고 찾아왔다.
“다시 만나게 되어 더없이 반갑습니다, 주인님.”
칼무흐.
지하투기장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아들의 복수를 대신해주자 그 뒤 무영의 충실한 노예가 된 드워프였다.
나이가 많지만 그만큼 연륜이 있었다.
배승민의 일을 처리할 때까지 이곳에서 실력을 키우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무영이 돌아오자 재차 합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칼무흐가 무릎을 꿇었다.
“크흠!”
바타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로드인 자신의 앞에서 무영에게 복종하는 모습이 솔직히 좋게 보일 순 없었다.
버릇없고 예의 없는 짓이지만 그렇다고 나무랄 수조차 없다.
무영은 그들의 영웅이며 은인!
반면 바타스는 연이어 실수를 거듭해온 왕이다.
도망가려고 하였고, 대부분의 드워프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때는 괜찮았다. 바타스는 유일무이한 왕이었으므로.
하지만 암흑룡과의 전쟁을 치른 후 드워프들도 자율적인 의지를 갖게 되었다. 영웅을 건드리면 바타스의 입지가 위험해지는 실정.
칼무흐가 뒤를 돌아 자신이 끌고 온 드워프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젊고 실력 있는 친구들입니다. 그간 눈여겨본 아이들도 있습니다.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무흐가 이곳에서 놀고 있던 게 아니다.
명목상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인재물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700의 유망한 드워프라!
영지자체를 아예 새로이 개편해버릴 수준이었다.
‘3년이면 충분해.’
말이 3년이지 3년이 지난 다음은 아무도 모른다.
700의 드워프 중 몇이나 다시 돌아올지.
바타스는 ‘빌려준다’고 말했으니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얻은 걸 쉬이 돌려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양메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하지만 별지기는 인도하는 자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세 자루 곡괭이 연맹은 극비사항으로 다뤄지던 드워프들의 연맹이다. 별을 먹는 별께선 그들의 은인이란 말인가?’
그래도 속마음마저 죽일 순 없었다.
양메이는 나름 정보를 다루는 여자다.
세 자루 곡괭이 연맹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에 휩싸인 곳이었다.
다만 드워프들의 연합이란 것만은 확실했는데 그 실체를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발자취를 더듬는 정도?
헌데 그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게다가 무영은 그들의 은인이고 영웅인 듯했다.
어째서 마신의 영역으로 발을 옮기는지가 의아했으나 그에 대한 의구심이 풀렸다.
무영을 바라보는 드워프들의 눈엔 신뢰가 가득하였다.
‘그런데 움이 뭐지?’
드워프들의 로드, 바타스의 말은 모든 게 놀라웠지만 무영을 지칭하는 칭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깨비의 지배자라니.
사실상 양메이가 무영에 대해서 아는 건 ‘별을 먹는 별’이라는 것 외엔 전무했다.
하지만 ‘움’이란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광활한 땅.
마신의 영역에 존재하는 거대한 영토!
그곳에 모인 일만이 훌쩍 넘는 도깨비들을 보고 양메이는 전율을 느꼈다.
도깨비와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였고 심지어 불타르마저 있었다.
자잘한 이종족까지 합치면 끝이 없었다.
여기에 드워프들이 합류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게 별을 먹는 별께서 가진 힘. 잠재력.’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괴물들이 사람을 따르는 경우야 여러 변수가 있긴 하지만, 그 단위가 만을 넘어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게 시작이고 더욱 광활하게 아우를 수 있다면 그 저력은 어느 집단에 못지않으리라.
꿀꺽!
양메이가 이마를 훔쳤다.
땀이 비가 오듯 흘렀다.
별을 먹는 별. 실체를 알수록 그 전승이 더욱 진실하게 와 닿고 있었다.
모든 별을 먹어치우고 태초의 별이 탄생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법칙 속에서 세상이 개편될 것이다.
어쩌면 전설이 될 태동기를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움을 뵙습니다!”
발탄과 서한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못 알아보는 사태에 관해 걱정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발탄은 언데드이고 서한은 움을 본능처럼 알아봤다.
또한 발탄은 영토수호자로서, 서한은 도깨비를 총괄하는 자로서 각기 역할이 다르다.
하지만 전과 비교하면 둘의 기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
몸의 자세나 느껴지는 마력 따위가 훨씬 날카로워졌다.
서로가 싸우는 날을 고대하며 실력을 가다듬은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골만 깊어질 게 뻔한 상황.
“축제를 열어라. 약속대로 서열정리를 시작할 것이다.”
무영도 수수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긴 밤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골을 없앤다.
서로가 하나 되어 대비하지 않으면 내부에서 무너지는 법이었다.
단순히 버틸 생각만은 아니었다.
악마의 사냥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악마의 부름의 봉인을 풀려면 고위악마가 필요하다.’
지하투기장의 마지막 보상.
다른 악마가 몇 번이나 도전해서 얻으려한 물건이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고위 악마를 잡아서 봉인을 풀어내면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무영의 발언을 듣고 발탄이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서한은 씽긋 웃으며 예를 다했다.
<드워프 702명이 합류했습니다.>
<영토의 잠재력이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영주점수 500점이 추가됩니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
서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신다.
축제라고 해봐야 별 다를 건 없었다.
무영은 그들이 만들어둔 왕좌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드워프들의 힘을 빌려 급조한 대전장소. 그저 울타리를 치고 대리석을 깔아둔 정도가 전부지만 형식은 크게 상관없었다.
하루는 심기일전의 의미로 모두가 즐겼다.
드워프들도 다행히 녹아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째.
“서로가 기량을 내뿜으며 최강자를 가리는 자리다. 싸우고, 이겨라. 그에 걸맞은 자리와 보상을 약속할 것이다.”
영지는 커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무영 혼자 다스릴 수는 없었다.
걸맞은 자리를 주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종족은 약자를 배제한다. 단순 능력의 비교가 무력이 전부라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게 마계의 현실이기도 했다.
무영의 짧은 선언이 있고나서 모든 이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순위결정전이라 이름붙인 이 싸움에 참가신청을 한 이들은 모두 이천여명.
이종족과 도깨비, 인간들이 고루고루 섞여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칼날 위에 선 자세로 임했다.
어제의 여흥과 웃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전쟁이라도 치룰 분위기다.
“무영. 저들은 네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생존이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시간이었지.”
그리고 참관인으로 오가르가 참가했다.
그도 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무영의 옆에 서서 잡다한 말을 건넸다.
“그런가?”
무영이 흘리듯 답하자 오가르가 혀를 찼다.
“저들에게 너는 왕이다. 단순한 영주가 아니야. 이 차이를 모르겠느냐?”
오가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거인과 같은 크기를 가진 불타르의 소족장.
그는 정말 이상한 불타르였지만, 무영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자 중에 한 명이었다.
적어도 허언을 할 자는 아니다.
진정으로 무영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영주와 왕의 차이라.’
땅을 다스리는 것 자체는 같다.
왕은 여러 영주를 거느리며 더욱 넓은 땅을 경작한다.
숫자가 다르고, 위치가 다르다.
규칙을 만들거나 대국적인 일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또한 영주의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 외에 무슨 차이가 있는 지는 무영도 잘 몰랐다.
애당초 무영은 누군가를 이끌어본 경험 자체가 적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웡 청린이라면 모를까, 무영은 언제나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왔다. 누군가를 이끌고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무영에겐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그저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걸 기준으로 행할뿐.
“지켜봐라. 저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울 것이다. 발탄과 서한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재가 등장하겠지. 집단은 그런 식으로 유지 되는 것이다.”
오가르가 턱을 쓸었다.
재밌는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무영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며 대전을 바라봤다.
그저 분위기 환기와 똘똘 뭉치게 하려는 속셈이 전부였건만.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게 있단 말인가?
< 29. 악마의 긴 밤(2) > 끝
ⓒ
< 29. 악마의 긴 밤(3) >
새로운 인재의 등장이라.
‘과연·····.’
사실 무영은 큰 기대가 없다.
자신이 만든 언데드 외에, 영지에 있는 이들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단 생각이 강했다.
그들의 성장속도는 무영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렸고 이대로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영주의 스킬랭크를 올리고 조금 더 편하게 다스리기 위한 일환으로써 많은 이들을 유입했을 따름이다.
‘비탄의 그레모리, 27군단의 마왕.’
그 두 가지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선 그럴 필요가 있었다.
무영 자신이 마왕의 길로 오르는 길!
강력한 ‘가시’가 되기 위해 영지를 넓혀야 했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무영이 그들에게 바라는 건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아랑드라고 합니다. 영주님! 저의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가르웬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주시여. 깜짝 놀라게 해드리지요.”
모든 이들이 싸우기 전 무영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들의 눈엔 생기가 충만했다.
도깨비 500과 인간 20, 그 외에 투기장에서 노예로서 생활하던 300명이 지원했다. 모두 800명가량이 전의에 넘쳤다.
저들이 싸우기를 좋아했던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도깨비는 몰라도 노예들은 대부분 힘이 없었다. 의욕은 개나 주었다. 그 모습이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
투기가 눈에 비쳤다.
그들은 그저 무영이 봐주기를 바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보상과 지위를 원하는가?’
당연히 그들도 싸움으로 얻을 게 있었다.
무영이 약속하기도 했으니 좋은 성적을 내면 그만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넓어진 영토. 많아진 영주민. 그들을 효율적으로 다루려거든 위에 선 자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건 아닌 듯싶었다.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
오가르의 말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더 지켜보고자 하였다.
똑똑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영주인 무영이 단순히 그들을 모아놓은 게 아니라는 걸.
그는 결코 좋은 이가 아니었고, 상냥하거나 보살펴주는 성격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두에게 각인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움직이는 족족 모든 걸 휩쓸었다.
마치 태풍과 같았다.
또한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영은 그저 움직일 따름이었으나 모두가 절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왜인가?
‘그가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위대한 지도자는 다스리는 힘을 타고났다.
그리고 이 시작이, 단순한 영지에서 끝날 게 아님을 알았다. 그가 바라지 않더라도 그는 머지않아 왕으로서 추대될 것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다른 종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려하지 않았고, 해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종족의 생활양식과 행동거지 따위가 모두 같을 순 없었으니.
하지만 무영은 해냈다.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만약 그가 정말 왕으로 추대된다면······ 그들은 여태껏 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가슴이 뛰었다.
도깨비들은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고, 투기장의 이천 노예들도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인간들도 이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워서 증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치열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려거든 투쟁밖에 답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 검은 오로지 왕을 위하여.’
물론 이미 영토수호자 발탄에게 있어서 무영은 왕이었다.
그리고 왕의 기사로 자격을 확인받기 위해선 이 대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하하!
서한은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빙도깨비이자 도깨비의 진화형태인 두억시니.
현재는 거의 이만에 달하는 도깨비를 총괄하고 있는 자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대전에 나섰다.
발탄과의 매듭을 지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즐겁구나. 진정으로 즐거워!’
입이 근질거렸다. 마음 같아선 한바탕 크게 폭소라도 내뱉고 싶었다.
무영. 우리의 움께선 잠시 밖을 다녀오시더니 훨씬 강해졌다. 두억시니인 서한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 따윈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어디까지 강해지실지 알 수가 없구나.’
그 가파른 성장속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움’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을 이루고 보여주며 도깨비들을 이끌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움이고, 우리의 주인이었다.
하물며 드워프들은 어떠한가?
드워프는 고집있기로 유명한 종족.
드워프는 어지간해선 남을 따르지 않는다. 쉽게 믿지 않고 정을 주지 않는다.
헌데 그들을 수백이나 끌고 왔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움의 모습은 감히 영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상하고, 자연스럽게 따르게 하는, 그야말로 움의 풍모다.
‘움이시여. 왕이 되려 하십니까? 제 목숨을 바쳐 도와드리지요.’
움이 왕이 된다면, 이 영지는 왕국으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움께선 욕심이 많아 모든 종족을 아우르려 하신다.
항상 최전선에서 움을 도우려면 흩어진 도깨비들을 모으고 힘을 증명해야 함이었다.
“움께선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셨다. 이젠 우리 차례다!”
서한이 외쳤다.
“아움! 아훔! 아움! 아훔!”
“아움! 아훔! 아움! 아훔!”
대전에 참가한 오백의 도깨비들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들도 서한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서한이 보고 느낀 걸 깨달은 것이다.
져선 안 된다는 걸.
이번 대전. 목숨을 걸고 임해야겠다.
치열했다.
아니,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일생의 적을 만난 느낌.
그리고 그 싸움의 모양새는, 어쩐지 무영을 닮았다.
“재밌지 않느냐? 오랜 시간조차 아닐진대 저들은 벌써 너를 따른다.”
무영은 침묵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저들이 닮고자 하는 게 무영 자신이라니.
그간 보여준 모습은 정말 별 게 없었다. 오히러 자리에 없을 때가 더욱 많았건만.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고 전부가 아니다. 저들에게 필요한 건 그저 작은 희망이었을 뿐이야.”
“내가 희망을 주었다는 말인가?”
“이곳은 외곽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마신들이 다스리는 곳이지. 도깨비를 비롯한 이종족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타르도인가?”
불타르는 상위의 포식자다.
그들도 마신과 악마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오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악마의 긴 밤’이 찾아온다. 그 시기엔 우리 불타르들조차 행동을 조심하지. 우리가 그럴진대 다른 약한 것들은 어떻겠느냐?”
“그래서 내가 희망이라고?”
“그렇다. 너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네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위안을 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군.”
자신이 강해지는데 그것을 보고 남들이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한 마디로 대리만족이다.
그야 무영은 누구도 믿지 못할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과거를 떠올려도 자신처럼 성장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 희망을 갖는다? 자신의 강함을 키워 원하는 걸 얻는 게 더욱 큰 기쁨이 아닌가?
무영은 저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만들어지고 웡 청린의 명령에만 따랐던 무영은, 누군가를 보고 만족하는 일이 없었다.
막 회귀했을 때에도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였지 다른 이를 떠올리지도 않았다.
반면 저들은 무영을 거울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영주인, 그들의 주인인 무영이 빠르게 강해진다면, 자신들도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
아주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선 그 불씨조차 찾기가 어렵다.
무영은 단지 존재만으로도 불을 지핀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무영은 모르고 있었다. 하여 오가르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는 나도 상대가 어렵겠어.’
단순히 느껴지는 기도자체가 달라졌다.
백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미지는 공포지만, 때로는 미지가 의욕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그동안 수련을 소홀히 했지. 나도 움직여야겠다.’
오가르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은 다했다.
새로운 인재.
말 그대로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 나타났다.
무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재야에 묻혀있던 자들.
그들이 이번 기회를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를 널리 떨쳤다.
아랑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젊은 다크엘프. 투기장에서 패배하여 노예가 된 수컷이었다.
족히 5년을 투기장에 갇혀 살아왔다.
당연히 의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고, 진득한 패배주의에 절어서 아예 스스로가 노예임을 자처했다.
이곳에서의 서열은 들어올 때부터 정해져 있다며.
실제로 모든 이들이 도전을 두려워했다. 자신이 머무는 장소에 만족해했고 앞의 층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우리 속의 돼지와 다를 게 뭐인가.
‘나는 돼지조차 못 된 쓰레기다.’
그때 한 도깨비가 나타났다.
처음엔 아무도 도깨비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싸우는 모습은 항상 치열했고, 그럼에도 한 번을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랑드는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하게 눈길을 잡아끄는 도깨비의 행동은 아랑드를 매료시켰다.
도깨비는 나아갔다. 거침없이, 도전을 하는데 걱정 따위가 없었다.
그냥 당연히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5층, 4층, 3층, 나아갈 수록 도깨비의 이름값은 높아졌다.
처음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자 도깨비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어졌다.
무영! 무영! 무영!
모두가 외쳤다. 도깨비가 싸우는 모습에 열광했다.
그야말로 유명인이 된 것이다.
싸울 때마다 강해지며 승리했다. 모든 걸 거머쥐었다.
아랑드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이런 돼지우리에 어울리지 않는 고고한 전사였다.
아랑드는 환호했다. 그날, 5년 만에 처음으로 환성을 내질렀다.
눈물도 흘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도깨비의 승리가 아랑드를 움직였다.
아아! 그렇다. 도깨비는 아랑드에게 있어서 우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우상이, 눈앞에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장소에 말이다.
“이, 이럴 수가······.”
“서한님이?”
“말도 안 돼!”
도깨비들이 경악했다.
서한. 2만 도깨비를 총괄하는 그가 쓰러졌다.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한 대전사가 볼품없이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어서 아랑드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단검 두 자루를 회수하였다.
아랑드는 단 하나의 상처도 허락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서한을 제압한 것이다.
투기장의 노예로 있을 땐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꽃이 개화하듯 투기장을 나서며 아랑드는 변했다. 강해졌다.
그리고 무영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영주님! 제가 승리하게 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랑드는 더 이상 우리 속의 돼지가 아니었다.
쓰레기가 아니었다.
“무엇이지?”
무영이 물었다.
그러자 아랑드가 답했다.
“부디 저와 싸워주십시오.”
이제 아랑드는 전사였다.
피가 들끓는 전사!
동시에 무영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제야, 오가르가 한 말의 뜻을 알겠다.
< 29. 악마의 긴 밤(3) > 끝
ⓒ
< 29. 악마의 긴 밤(4) >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악마의 긴 밤을 대비하고자 드워프들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전이, 싸움이 진행될수록 무영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그저 영지를 늘리고 마왕이 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들은 씨앗이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씨앗!
무영은 그 씨앗을 뿌렸고, 경작하며 거두는 일을 해야만 했다.
‘재미있군.’
농부 된 자의 기분이 이러할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나는 대충 싸우는 법을 모른다.”
“감히 청하옵건대, 한 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저와 검을 부딪혀주십시오.”
아랑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크엘프 특유의 날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저 속에 숨겨진 비수. 예사롭지 않다.
일개 노예가 뿜어낼 수 있는 기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 인식은 잘못되어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생명체는 언제든 가능성을 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들은 무영을 보며 자란 씨앗이다. 인형이 될 순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오가르가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말했다.
‘축제를 즐기라’고.
“허락한다.”
무영이 승낙했다.
스릉!
동시에 비탄을 뽑았다.
이만의 관중이, 무영을 바라봤다.
“나와 검을 맞대려거든 승리하라. 승리한 자만을 나는 ‘인정’할 것이다.”
무영은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
아무 도전이나 받아선 격이 떨어진다.
모든 싸움을 이겨낸 자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투쟁하는 자를 좋아한다.’
과거의 영웅들이 그랬다.
그들은 온갖 악조건을 뚫어내어 영웅이라 불리었다.
무영은 그런 영웅들을 아주 깊은 곳에서 동경했다.
영웅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증명을 보고 싶었다.
그동안 무영은 그들에게 제대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혼자 움직이고, 홀로 모든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들 역시 무영 본인의 힘이라면?
힘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지금 확인해볼 요량이다.
아랑드가 되든 누가 되든 상관치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서있는 자를 무영은 인정할 것이었다.
자신의 힘이 될 재목임을!
언데드만이 아닌, 생자의 주민으로 맞이할 것이었다.
그리하면 죽은 자와 산 자. 무영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설 수 있을 터였다.
“그 말. 잊지 마십시오.”
아랑드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랑드는 격동하고 있었다.
무영은 그의 우상이자 목표였다.
우리 안의 돼지, 쓰레기로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있을 때, 그곳에서 무영만이 유일하게 빛났다.
무영이 투기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나도 저자와 같은 곳에서 싸우고 싶다고!
“결코······ 잊지 마십시오.”
인정이란다.
단지 그게 전부란다.
웃기는 일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히려 그거면 족했다.
아랑드가 몸을 돌렸다.
주변엔 적막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단순한 대전의 성격이 바뀌었다. 변질됐다.
이곳은 전장이었다.
뼈를 자르고 살을 씹는 장소!
신성한 대전? 규칙을 준수하여 영광을 낳는 싸움?
그런 건 없다.
이기면 그만이다. 무영은 그 외의 조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승리하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나는 더 이상 우리 속의 노예가 아니오.’
아랑드는 이 날을 위해 살았다.
패배가 아닌 승리를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털썩!
무영은 자리에 앉았다.
“계속 진행하라.”
그들의 주인이 말했다.
영토수호자 발탄.
본래는 그와 서한의 싸움이었으나 구도가 바뀌었다.
아랑드가 새로운 호적수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는 본래 이 땅의 주민이 아닙니다.”
늙은 인간이 입을 열었다.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패배했다.
이제 단 한 명, 발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마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요.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노인은 근육질의 전사였으나 그 모습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패배의 영향은 아니었다.
그는 마신의 영역을 떠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이데거에 의해 우리는 납치당했습니다. 영문 모를 땅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지금의 영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하이데거의 폭정을 끝낸 게 무영이다.
그는 그들을 영주민으로 받아줬다. 전과 같은 폭거도 없어졌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강해졌고, 마음만 먹으면 마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마신의 영역을 벗어난다.
다시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사람이, 인간이 무섭습니다.”
노인의 말에 깊은 회한이 담겨있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노인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본래가 약자였다.
하이데거에 의해 납치당해도 뒤탈이 없고, 누구도 구할 사람이 없는 이들.
철저하게 현 사회에 외면 받은 이들이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무영은 모르겠지만, 생각조차 안했겠지만······ 약자의 설움은 상상이상이다.
하이데거의 폭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이유가 뭐겠는가!
애당초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있을 때에도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만을 골라 지능적으로 납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서로 도우며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마계로 오면서 기존의 지식은 쓸모가 없어졌다.
강자존.
강자만이 모든 걸 먹어치우는 구조.
약자는, 바닥을 길 따름이다. 강자의 폭거는 하이데거의 폭정에 못지않았다.
하루하루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했다. 낮은 보폭으로 더욱 좁은 길을 뚫어야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강해지면 되지 않느냐고?
‘우리에겐 강해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십 년 간 쌓아올린 기득권들.
그들은 정해진 자원을 자신들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간혹 될 성 싶은 떡잎만을 골라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나머지는 버림받았다. 작은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약자들은 바늘구멍보다 좁은 곳을 뚫고자 서로 경쟁했다.
강자들이 흘리는 콩고물 하나를 얻고자 지옥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적어도 무영이 통치하는 이곳엔 기회가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던전이다.
던전은 꿀이 흐르는 장소다. 보다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길이었다.
무영은 그곳을 들어가는데 아무런 제약도 두지 않았다.
서로 힘을 합쳐 던전을 깨고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힘을 합쳐야 산다는 걸, 이곳에 와서 오랜만에 깨닫게 되었다.
서로 살을 깎아먹고 피터지게 물어뜯는 게 아니라.
나만의 땅, 집을 만들 수 있다.
대도시에선 그조차 허가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안전하진 않지만 여기엔 수많은 군집이 있다.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노인은 말했다.
이 기회를 버리고 다시 돌아가겠느냐?
“저는 싫습니다.”
노인은 혼자 답하였다.
돌아가느니 죽는 게 낫다.
다시 그 구정물을 기어야할 바엔 이곳에서 투쟁하다가 죽겠다.
“나도 싫소. 더 이상은 지긋지긋해.”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우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곳에 우리가 안착할 수 있을까요?”
모두 회의적이었다.
수많은 도깨비와 이종족들.
인간은 고작해야 수십이었다.
숫자에서부터 밀렸다. 무영이 비록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언제 마음을 돌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이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이겨야 합니다. 발탄. 그대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대가 이긴다면 우린 더 많은 약자들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약자들도 작은 희망만 있다면 무한히 강해진다는 걸 알릴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무영의 의도가 정말로 모두를 아우르는 것에 있다면.
노인은 먼 미래의 꿈을 꿨다.
자신과 같이 핍박받던 약자들이 한데 모여서 힘을 기르는 꿈.
인생을 건 마지막 도박과도 같았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발탄에게 모였다.
영토수호자 발탄!
사람들은 그가 평소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강해지고 수호자로서 발돋움한 건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일하게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게 발탄이었다.
발탄이 무영의 거래를 받아들이고 언데드가 된 이유자체가 아이린과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
노인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스릉!
발탄이 검을 꺼냈다.
흰색의 갑주가 유독 빛났다.
뚜벅!
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야흐로 결승. 마지막 적인 아랑드를 이겨야 한다.
“부탁합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인정을!”
“······ 희망을.”
모두가 작은 소원을 입에 담았다.
전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발탄의 뒷모습은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신흥 강자 아랑드.
영토수호자 발탄.
둘의 결승은 모두의 이목을 강하게 집중시켰다.
무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지. 그리고 너는 이만개의 목적과 생각을 다스리는 자다.”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그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라.
오가르는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영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은연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 무게는 무영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가르가 볼을 긁적였다.
“나는 저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모습을 말이다. 허나 솔직히 모르겠다.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급변하게 만들었는지.”
하지만 오가르도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그는 현자도 아니었고 단지 특이한 불타르일 뿐이었으므로.
이 부분만큼은 무영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가장 밑바닥의 감정이다.”
“밑바닥의 감정?”
“욕망.”
목적하는 것과 욕망은 미묘하게 다르다.
하물며 가둬진 욕망이 분출된 것임에야.
무영도 그러했다.
무려 40년간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며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오가르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욕망. 욕망이라. 너는 저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겠느냐?”
“욕망은 제어하는 게 아니다.”
“그럼?”
“분출하고, 부딪히고, 넘실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제어하기 귀찮아서 풀어두겠다는 소리로군.”
크하하!
오가르가 크게 웃었다.
한 대 크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무영은 지금 자신만의 원리원칙을 세웠다.
저들이 틀을 벗어나 마구잡이로 날뛴다면, 그대로 두겠다고.
자신의 욕망과 그들의 욕망 중 어느 게 더 클지 재어보겠다고.
이 또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싸움이었다.
‘보여 봐라. 너희들의 욕망을.’
분출하며 넘실대는 힘은 결국 강한 힘을 낳는 법이었다.
적어도 마왕의 자리를 노린다면 이쯤은 웃으며 감내해야하지 않겠는가.
마왕 역시 왕이다.
경험이 없다고, 뒤로 미룰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무영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도 비좁았음을 인정했다.
군집의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인류의 힘을 그저 비하만 했다.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었던 것을.
그 간단한 이치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꽝!
때마침 영토수호자 발탄과 신흥강자 아랑드의 욕망을 건 싸움이 시작됐다.
짙은 모래바람이, 떨어지는 별빛처럼 비산했다.
< 29. 악마의 긴 밤(4) > 끝
ⓒ
< 29. 악마의 긴 밤(完) >
발탄과 아랑드의 싸움은 좀처럼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둘 다 무영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상적인 성장을 보였으며 지금 그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대단하군.’
발탄은 언데드, 아랑드는 다크엘프다.
둘 다 인간과는 거리가 먼 생물일진대 성장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솔로몬에 의해, 인간만이 무한한 가능성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종족 또한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원동력을 갖고 있었다.
채에에엥!
아랑드의 공격은 날렵하고 매서웠다.
발탄은 묵직함을 무기로 갖고 있었다.
당장의 우위는 발탄에게 있는 것 같았다. 가벼움으론 무거움을 이기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다시 한 번 엎어졌다.
휘리리릭!
대검이 공중에 높이 떠올랐다.
이내 봉인된 검 마냥 바닥에 박혔다.
“이겼군.”
아랑드가 미소 지었다.
비록 온몸이 상처투성이이긴 했으나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발탄은 비어버린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 없는 전사는 더 이상 아랑드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
아랑드의 승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관중들은 침묵했다.
도깨비도 인간도 아닌 다크엘프라.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결과였지만 아랑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척!
어서 약속을 지켜달라는 듯 아랑드가 무영의 앞에서 각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발탄이 우세했다. 아랑드의 빈틈을 보는 능력이 상상이상이었을 뿐.’
서한보다 약했던 발탄이, 어느덧 서한을 뛰어넘어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한명 더 출현했다.
영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나쁠 게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오히려 발탄이 이기는 것보다 아랑드가 승리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랑드는 투기장 노예들의 대표였고, 그들은 양쪽 진영 전체에서 은근히 괄시받았던 탓이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춰질 것이었다.
“우승자 아랑드에겐 ‘베너렛 기사’의 직위를 주겠다. 기사단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최대 50명까지 이끌 수 있는 권한이다. 내가 없을 때 발탄과 함께 영주대리의 자리 역시 수행하게 된다.”
말을 끝마치고 아랑드의 눈을 직시했다.
그런 직위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아랑드의 눈이 불타는 것처럼 이글댔다.
무영은 내심 ‘재밌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가르의 말마따나 축제를 즐기게 된 걸까?
“아랑드를 치료하라. 마지막 여흥으로써 나와 검을 맞대는 걸 허락한다.”
스릉!
비탄이 잘게 흐느꼈다.
이어 배승민이 앞으로 나가 아랑드의 상처를 치료했다.
배승민은 리치지만 성자의 힘도 사용할 수 있었고, 성자는 사제들 중에서도 만 명에 한 명만 도달하는 경지다.
신성도시 뮬라란에도 수십 명밖에 없는 귀중한 인재.
그들은 오로지 뮬라란에서만 생활한다. 성자와 성녀가 순회하는 일정기간이 아니면 그들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성자를 가졌다는 건 어느 집단에게도 밀리지 않는 이점이었다.
후아아앙!
아랑드의 전신에서 빛이 솟구쳤다.
엄청난 회복량으로 밀어붙여 상처를 말끔히 복원한 것이다.
다른 스킬도, 기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신성력을 밀어 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뚜벅!
무영은 천천히 걸어왔다.
아랑드가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필요 없었다.
‘질 생각이 없군.’
무영도 피식 웃었다.
아랑드는 무영과의 싸움에서 전혀 질 생각이 없었다.
전형적인 전사의 눈!
오랜만에 무영의 피도 들끓는 느낌이었다.
무영은 모든 일에 있어서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게 무영이었다.
하물며 아랑드는 전사.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고 싸움에 임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리고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확실하게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다.
‘압도.’
그게 필요했다.
크롸아아앙!
무영의 전신에서 화염을 입은 용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광경을 본 관중들은 경악했다.
단순한 형상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드래곤 피어’의 효과가 있었다. 용의 혼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 힘은 영지를 떠나기 전까진 없었던 것이다.
“움께선······ 용마저 정복하셨단 말인가!”
서한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전신이 감격으로 떨려왔다.
고작 수개월. 용을 제압하고 그 영혼을 손에 쥔 게 분명했다.
오가르 역시 놀랐다.
용은 불타르들보다도 훨씬 상위의 종이다.
그나마 대족장은 되어야 맞상대를 해볼법한 상대.
설마 무영이 그런 용의 힘마저 얻을 줄이야.
‘품의 나무를 치료하던 게 엊그제 같거늘.’
오가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 대족장마저 뛰어넘을 게 분명하다.
만약 그때 무영을 홀대했다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쳤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품의 나무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줬대도, 꽉 막힌 장로들은 무영이 도깨비이기 때문에 보상을 하는 걸 주저했다.
더 나아가 그 속내에는 꼬투리를 잡아 제거하는 방향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무영이 복수심을 키우며 언젠가 칼을 들이미는 걸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천추의 한이 되었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았는데 전부가 멸한대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 오가르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었다.
온갖 귀중한 약재를 아낌없이 써서 각성을 시켰으니.
“용의 힘······ 대단하군요.”
하아!
아랑드가 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저 힘을 보인 게 전부임에도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무영은 무심하게 내뱉었다.
아랑드가 그동안 보인 게 전부라면, 실망할 것이었다.
스슥!
카앙!
이윽고 아랑드가 잔상을 남기며 눈앞에 당도했다.
단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무영을 압박하려 들었다.
차창!
콰르릉!
아랑드는 뇌전의 힘을 다를 줄 알았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빠르기였다.
자동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용의 힘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랑드의 표정은 점차 조급해져가는 중이었다.
‘내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맞수는 되리라고 생각했다.
용의 힘을 보았지만 크게 밀릴 거라 여기진 않았다.
실제로 무영의 밑에 있던 서한과 발탄을 제압했으니 자신감이 하늘을 뚫은 정도였다.
그러나 직접 부딪혀보니 알겠다.
무영의 거대함을.
무영은 한 발자국도 원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아랑드는 여기서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그대로 당할 것 같아 쉴 새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 역시 오래 가진 못했다.
무영이 비탄을 들었다.
이어 아주 느릿하게, 검을 뻗었다.
‘느린 검?’
아랑드의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렸다.
피하는 건 식은죽 먹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지의 범위를 벗어날 수준으로 느렸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비탄이 아랑드의 단검을 부수고 가슴을 꿰뚫어, 뼈를 짓뭉갰다.
푸아악!
그리고 비탄이 회수됨과 동시에 아랑드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단 한 번의 검격.
그러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어··· 떻게······?”
“내 최대한의 검이다. 끝없이 고민하며 치열하게 부딪혀라. 얻는 게 있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을 터.”
무영이 몸을 돌렸다.
가속은 쓰지 않았다.
단지, 그동안의 모든 깨달음을 담아 하나의 검격으로 선보였을 따름이었다.
이게 우승자인 아랑드에게 보이는 무영만의 ‘인정’이었다.
<영지민들의 조화도가 올라갑니다.>
<스킬 ‘영주’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B->A>
<영주점수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지와 영지민의 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영지민들의 상태:
- 영주를 존경합니다. 강력한 영주가 존재하는 한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조화도 B. 모든 종족이 적당한 조화를 이뤘습니다.
- 성장도 A. 강함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조건이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 만족도 B-. 청결과 거주 부분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영지를 전체적으로 손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영주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더욱 넓은 땅을 지배하십시오.>
<넓은 영토의 지배자들이 조금씩 사용자를 신경 쓰기 시작합니다.>
*
축제가 끝난 즉시 무영은 전반적으로 영지의 강화를 실시했다.
700의 드워프와 모든 인력이 힘을 합쳐 벽을 쌓고 단단한 건물을 지었다.
여기에 무영은 영주점수 천여 점 가량을 사용해 작은 신전을 하나 들였다.
보통의 신전을 짓는데 이천점이 필요하지만, 대충의 효과만 추가하는 정도라면 천 점도 충분했던 것이다.
‘악마의 긴 밤을 보내려면 신전이 있어서 나쁠 건 없지.’
무영이 들인 신전은 도깨비들의 신인 ‘아수라’를 모시는 곳이었다.
비록 그 크기는 단촐했으나 아수라는 무영에게도 관여하고 영향을 끼치는 존재.
득이 되면 되었지 결코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역시나 신전이 지어지자 추가적인 효과가 있었다.
<‘아수라의 조촐한 신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영지에 있을 때 영지민들의 체력과 투기가 ‘5’씩 상승합니다.>
<더욱 큰 ‘악’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정신지배로부터 저항을 갖게 됩니다.>
<온갖 괴물의 성장이 빨라집니다.>
<전승효과 ‘아수라의 사도’가 ‘아수라의 대변자’로 바뀌었습니다.>
<아수라는 더욱 크고 더욱 많은 신전을 원합니다. 아수라의 신도를 늘리고 확장하십시오. 그럴수록 축복의 효과는 강해질 것입니다.>
충분히 그 값을 하는 신전이었다.
아수라의 사도가 대변자로 바뀌며 등급 또한 올랐다.
악마를 대비하는데 있어서 이 정도면 충분할 듯싶었다.
이종족이 빠르게 성장하며 저항할 힘을 갖췄으니 어지간한 악마가 쳐들어와도 해볼만 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아수라의 축복은 계속해서 추가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려면 신전을 늘려야하지만, 이 역시 악마의 긴 밤이 시작되거든 동시에 해결될 일이라고 보았다.
“영주님께서 훔의 신전을 지으셨다!”
“아움! 아훔!”
“아아!”
신전이 지어진 즉시 도깨비들은 환호했다.
춤과 노래를 부르며 전율하였다.
움과 훔이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부가적인 효과도 있었다.
“훔의 목소리를 들었소. 우리 흙도깨비 부족을 받아주시오.”
“그대가 움입니까? 훔께서 그대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신전이 지어지자 사방에서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신전의 효과가 꽤 멀리까지 퍼지는 듯했다.
대부분이 훔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며 찾아온 것이다.
움의 의식을 행할 때 모인 것처럼 특별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듯싶었다.
승승장구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릴 수가 있을까.
덕분에 영지의 발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종족 모두가 빠른 성장을 도모했으며,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갔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추가로 떠오른 문구가 있었다.
<‘악마의 긴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온갖 마성에 젖은 악마들이 길을 배회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기간 동안 악마를 사냥하면 추가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떠도는 악마 중에는 작위를 가진 귀족 또한 존재할 수 있습니다.>
< 29. 악마의 긴 밤(完) > 끝
ⓒ
< 30. 공작, 바스트로(1) >
악마의 긴 밤.
달이 붉은색으로 뒤바뀌며 영혼을 울리는 주기.
특히 악마들은 이 주기에 취약했다.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아는 이는 없었다.
대략적으로 5년에 한 번, 3개월간 지속되며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악마가 배회한다.
마왕급 이상이 아닌 악마들은 모두가 그랬다.
‘악마는 완벽하지 않다······.’
수십 년간 악마들과 싸우며 인류가 내린 결론이었다.
악마들이 마신의 영역 바깥에서 잘 활동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악마의 긴 밤’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아무리 미쳐 날뛴대도 어지간해선 이 영역을 벗어나진 않았던 탓이다.
물론 간혹 공작급 이상의 악마가 영역을 벗어나 대군을 이끌고 인류를 공격했던 사례가 없진 않았지만, 대개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불과 5년에 한 번일지라도 이런 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악마가 불완전한 생명체임을 알리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생명체조차 어쩌지 못한 게 인류이기도 했다.
‘괴물들도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할 순 없다.’
무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달.
만월의 달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저 달을 보고 있으면 무영마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괴물들도 서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분명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었다.
그나마 이곳이라면 ‘아수라의 조촐한 신전’ 덕택에 약간의 정신적 영향에서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벽을 쌓았다. 어지간한 마법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했다.
공성용 무기를 만들고 훈련을 지시했다.
2만 여에 불과했던 영지민의 숫자도 3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 또한 아수라의 신전을 지으며, 여러 곳에서 도깨비들이 물밀 듯 몰려온 덕이었다.
적어도 무영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는 던졌다.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허무히 무너질 생각은 결코 없었다.
“아랑드. 첫 명령을 내리겠다.”
성 위. 영주의 방.
작게 말하자 문 건너편에서 반응이 있었다.
“무엇입니까?”
척!
아랑드가 곧추섰다.
베너렛 나이트가 된 아랑드는 여전히 도전적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무영을 따랐다.
한 번 보여준 ‘느린 검’의 효과가 제대로 먹혀든 듯싶었다.
“몸이 날렵한 이들을 꾸려 주변의 정찰을 시작해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임무였다.
아랑드가 그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뭔가 더 바라는 게 있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임무를 끝마치면 다시 그 검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무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아랑드.
참으로 재밌는 녀석 아닌가.
문 건너편에 있음에도 투지가 절로 느껴졌다.
영주라서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이기고자 따르는 느낌이었다.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겠지.’
아랑드는 무영도 조금 놀랄 수준으로 빠르게 강해지는 중이었다. 하물며 틈만 나면 무영과의 대결을 꿈꾸는 꿈나무다.
이런 이가 곁에 한 명쯤 있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항상 경각심을 세우도록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나태의 최대천적이 될 수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보이는 검이 아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그럼 더 공훈을 쌓고 부탁하겠습니다.”
아랑드도 그리 염치가 없진 않았다.
대신 공훈을 쌓아 거절하지 못하도록 만들 셈이었다.
무영은 저 뻔한 의도를 묵인해주었다.
이윽고 아랑드가 문의 곁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악마가 나타날지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다. 이게 가장 큰 문제지.’
악마의 긴 밤을 버티는데 있어서 무영은 가장 중요한 게 정찰이라고 보았다.
사전에 파악이라도 할 수 있으면 대책을 세우는 게 가능하다.
마냥 속수무책으로 막는 것보단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무영 자체가 어지간한 악마는 이길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내게 사냥당할 수도 있음을 너희는 알아야한다.’
먹잇감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영은 사냥꾼이었다. 누구보다 노련한!
허리춤의 비탄을 매만지며 붉은 달을 올려다봤다.
절로 투기가 치솟고 당장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움’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타닥.
타닥.
마치 사신을 연상시키는 거구의 남자가 유니콘의 뿔로 만든 왕좌에 앉아, 손가락으로 의자를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검은색 망토와 수많은 뼈로 둘러싸인 희귀하기 짝이 없는 이 모습이 바로 제 64좌의 마신 ‘하우레스’였다.
하우레스는 21개의 마왕군단을 이끌고, 적이라 간주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권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시기가 안 좋군.”
타닥.
타닥.
의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끔찍하게 넓은 성의 내부를 울렸다.
하지만 그 앞에는 족히 수만의 악마들이 그를 향해 조아리고 있었다.
“붉은 달이 뜨기 전에 반대파의 숙청을 이뤄냈어야 하거늘. 계산을 잘못했어.”
“하우레스님. 당장이라도 명하신다면 다시 출정토록 하겠습니다.”
그때 마왕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얼굴을 들고 말했다.
하우레스가 턱을 쓸며 답하였다.
“몇 명의 제후가 영향을 받았지?”
“정확히 일흔 여섯 명의 제후가 달의 영향을 받고 뛰쳐나갔습니다.”
제후. 귀족들을 말함이다.
그 숫자가 76명이라.
생각보다 많다.
그 밑의 부하들까지 생각하면 족히 수만은 될 것이었다.
“녀석들의 영토를 회수해라. 붉은 달 따위에 흔들리는 녀석은 내 휘하에 있을 자격이 없다.”
“하오나, 하우레스님. 그 안엔······ 바스트로 공작도 포함 돼 있습니다.”
“바스트로가?”
하우레스가 인상을 구겼다.
바스트로 공작이라면 가장 영향력이 큰 제후 중 하나로, 하우레스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한 ‘부마’였다.
마신들의 파벌싸움 도중 큰 상처를 입어서 요양 중인 걸로 알았는데 설마 달의 영향을 받고 뛰쳐나갔을 줄이야.
잠시 고민하던 하우레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회수하라. 더욱 엄격히 해야 할 것이다.”
규정은 지엄해야만 했다. 예외를 둬선 하나씩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엔 더욱 그렇다.
마신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바로 대혼돈을 일으키는 일이 논란이 된 것이다.
찬성파가 훨씬 숫자가 많다지만, 마신은 그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존재였다.
1+1=2와 같은 통상적인 공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혼자서 열 명을 상대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게 바로 72마신이었다.
하여 섣불리 움직였다간 역공을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그게 설령 부마라고 할지라도 더한 잣대를 들이대 기강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레모리. 그년의 세작이 아직 있을 테지. 그토록 솎아냈건만······.’
하우레스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이런 데에서 틈을 보일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다. 반대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고 도망치는 것뿐이 없었으므로.
쿵!
하우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이이잉!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강렬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붉은 달이 뜨는 기간 동안 내부를 정리한다. 그게 최선의 수인 듯했다.
“당장 시행하라.”
하우레스가 말함과 동시에 악마들이 들썩였다.
“위대하신 하우레스님의 명을 따릅니다.”
“위대하신 하우레스님의 명을 따릅니다.”
“위대하신······.”
사방에서 귀를 찌를 정도의 단일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악마들은 성 내부만이 아니라 바깥에도 있었다.
그 숫자가 족히 수십만.
이윽고 수십만의 악마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마, 그중에서도 귀족과 영토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귀족악마의 경우엔 영토 자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영향을 끼쳤는데, 붉은 달이 떠서 귀족이 미친다면 당연히 그 안에 있는 악마들도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바스트로가 그랬다.
바스트로와 휘하 5만의 악마들이 그러했다.
‘피를 보고 싶은 날이로구나.’
바스트로는 5만의 악마들을 데리고 천천히 남하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스트로를 따르던 제후들을 합치면 족히 10만은 되는 악마병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와중 걸리는 모든 괴물들을 먹어치웠지만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더욱 강한 적이 필요하다. 이런 잔챙이들로는 안 돼.’
한참이나 남하하던 도중 바스트로의 눈에 띄는 괴물이 있었다.
불의 거인.
불타르!
능히 상위포식자라고 칭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불타르는 무리생활을 한다.
제법 넓은 영역이었는데, 이곳의 주인이 불타르인 듯싶었다.
바스트로의 눈에 이채가 생겼다.
아랑드의 보고를 들은 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10만 악마병······.’
규모자체가 달랐다.
그 정도 규모를 움직일 귀족이라면 적어도 백작 이상일 터.
시작부터 보스급의 괴물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리고 무영이 악마를 인식한 순간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공작 바스트로와 10만 악마병’이 출현했습니다.>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작 바스트로
백작 아르지오프
남작 알리만, 남작 오르아타, 남작 알루나······.
상급 악마 43
중급악마 620
하급악마 96,300>
적의 규모에 대한 부분이었다.
대부분이 하급악마라지만 귀족 수준의 악마가 족히 일곱은 되었다.
공작이라면 마왕의 바로 아래다.
쉬이 볼 수 없으며, 쉬이 봐서도 안 되는 레벨의 강자.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영의 영지를 노리고 쳐들어온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불타르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공작 바스트로의 목적은 모든 불타르였다.
무영의 영지 자체가 약간 외곽에 있기 때문에, 잘하면 들키지 않고 이번 위기를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
불타르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악마들을 잘라먹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영주님. 악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무영이 여러가지 수를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영토수호자 발탄이 급히 들어와선 말했다.
남작 알리만.
그가 이천가량의 악마병을 이끌고 무영의 성벽을 건드렸다.
“크하하! 운이 좋구나! 영락없이 정찰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어!”
쿵! 쿠웅!
악마병들이 거대한 바위 따위를 던지거나, 공성병기를 이용해 성문을 밀어댔다.
거대한 충격이 연달아 일어났고 성문은 머지않아 열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흔들리기만 할뿐 아무리 건드려도 성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성문도 열리지 않았다.
“응?”
처음엔 의기양양했던 알리만도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성문과 성벽 모두가 너무나도 단단했던 것이다.
“마법적인 설계가 되어있군. 드워프의 손길이 닿았어. 어쩐지······ 마법사단은 뭐하느냐? 어서 공격해라!”
문제점을 파악한 알리만이 외쳤다.
그러자 알리만의 뒤에 서있던 일백가량의 악마들이 주문을 외웠다.
콰아아아앙!
곧 수많은 마법들이 떨어지며 벽을 강타했다.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벽이 크게 흔들리며 상반신의 일정부분이 휩쓸려나갔다.
“제법 단단하다만 나 알리만님을 막진 못하지! 크흐흘! 다 죽여주마!”
잠시 후 시작 될 살육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알리만의 감정이 한창 고양된 순간.
쉬이이이익.
쿵!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거대한 괴물, 켈베로스와 악령포식자 타칸!
배승민과 무영도 당연히 자리하고 있었다.
네 명이서 뒤를 막았다.
끼이이이익.
곧 문이 열리며 수만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선두엔 발탄과 아랑드가 있었다.
‘피할 순 없겠군.’
스릉!
무영은 쓰게 웃으며 비탄을 꺼냈다.
‘한 명도 살려보내지 않는다.’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지웠다.
이 중 생존자가 생기면 일이 복잡해진다. 일거에 쓸어버려야 했다.
무영은 곧 살육자 그 자체가 되었다.
악마들과 부딪히는 건 아무래도 필연인 듯싶었다.
하는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싸그리 지워버릴 수밖에.
< 30. 공작, 바스트로(1) > 끝
ⓒ
< 30. 공작, 바스트로(2) >
무영의 주변으로 붉은 빛이 감돌았다. 절대자의 영역이 선포되며 악마들에게도 약간이나마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쉬쉬쉭!
그러나 먼저 나간 건 무영이 아니다.
검이와 검삼이 무영의 등 뒤에서 치솟듯이 뛰쳐나갔다.
“크하하하! 좋다! 우리 함께 투쟁을 해보자꾸나!”
남작 알리만이 크게 웃었다.
그는 현재 붉은 달의 마력에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피를 보고 싶고,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거기에 ‘미쳤다’고밖엔 표현이 안 되는 무한한 투쟁심마저 갖고 있었다.
인류가 왜 악마를 전투종족이라 부르는지, 그 단편적인 예가 눈앞에 있었다.
비단 남작 알리만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천 악마들도 곧 있을 싸움에 몸을 떨어대는 중이었다.
‘이때의 악마들은 언데드보다 더 언데드같지.’
숨이 완전히 멎기 전까지 싸운다. 어디 하나 잘려나가는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한다. 흥분을 하면 고통까지 잊어버리는 게 악마라는 족속들이었다.
악마와의 전쟁이 심화되고 나서도 인류가 ‘악마의 긴 밤’을 피하려던 이유.
그 숫자가 이천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순 없다.
“움께서 참여한 성스러운 전쟁이다! 적의 씨를 말려라!”
“아움! 아훔!”
“아움! 아훔!”
촤아아아악!
서한이 거대한 몽둥이로 악마병 하나를 짓뭉갰다.
그것을 시작으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악마병 하나에 거의 네, 다섯은 붙어야 상대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도깨비를 비롯한 이종족 모두는 착용한 장비의 질자체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드워프들이 밤을 새워가며 망치를 두드린 결과였다.
“캬하하하하! 이 맛이다! 전장의 피 냄새가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남작 알리만은 전신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 가시는 자유자재로 늘어나 근처에 있는 모든 ‘적’이라 판명한 이를 꼬치처럼 꿰뚫었다.
가시를 타고 흐르는 피는 알리만이 직접 받아마셨다.
그리고 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알리만의 날개가 심장처럼 울려댔다.
조금씩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가시는 방출도 되는 것 같았다.
“검이와 검삼은 ‘기사’들을 노려라. 알리만은 내가 잡겠다.”
그것을 본 무영이 명했다.
악마병들 사이에서도 기사의 차림을 한 악마 두 명이 남작 알리만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둘이 있는 이상 무영 혼자서 알리만을 상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검이와 검삼이라면 능히 상급의 악마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지위를 가진 것 자체가 최상급의 악마라는 뜻.’
작은 권능 또한 갖고 있다는 의미다.
남작 알리만의 권능은 바로 저 가시였다.
수많은 가시가 몸을 지키고, 적을 꿰뚫는, 창과 방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내고 있었다.
하물며 피를 마실수록 몸집이 커지니 빠르게 제압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속출할 터.
‘귀족의 진정한 강함은 권능에 의함이지. 권능만 꿰뚫고 파훼할 수 있다면 상급악마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귀족이, 마왕이 그러하였다.
어쩌면 마신도 그럴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악마의 강함은 단순한 등급의 차이가 아니라 권능에서 나온다.
말인 즉, 권능만 무효화시킨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타칸. 길을 터라.”
“나 타칸만 믿어라. 악마들은 지겹도록 상대해보았다.”
악령포식자 타칸은 본래 아수라도에 있던 존재다.
악마가 악령의 형태로 그곳에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촤촥!
이윽고 검을 쥔 타칸이 빠르게 발을 옮기며 악마들을 배제해나갔다.
그 검술과 움직임이 많이 눈에 익다.
‘그 사이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군.’
검일과 검이의 전매특허.
검술과 달리는 법을 어느 정도 소화시켰다.
도둑질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익히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기에 무영조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영은 타칸이 만든 길을 따라 직선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양자리 허리띠의 ‘비행’능력을 사용해 일시에 거리를 줄였다.
콰창!
남작 알리만의 피부에 비탄이 닿았다.
하지만 살짝 긁는 게 전부였다.
가시가 갑옷과 같은 형태로 전신에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간지럽군.”
알리만이 웃었다.
이어서 알리만이 이죽였다.
“먹이가 스스로 죽으러 들어왔구나. 왜인지 모르겠다만, 네놈이 이곳에서 제일 신경 쓰였는데 마침 잘 됐다.”
남작 알리만의 신경을 은근히 긁는 존재가 무영이었다.
그냥 무영이 나타난 순간부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같았다.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이 직접 찾아갈 작정이었건만, 알아서 굴러들어왔다.
어찌 웃음이 나지 않겠는가.
‘결을 읽기가 어렵군.’
하지만 알리만의 속내와는 별개로 무영은 끊임없이 알리만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만물에는 결이 있다.
결만 찾아내면,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것도 부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수백의 가시로 얽혀있는 탓에 결을 보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하나씩 제거하는 건 끝이 없다.
저 갑옷자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결이 있을 것이다.
콰칭!
일순 알리만의 전신에서 가시가 사방으로 솟아나왔다.
가까스로 막긴 했지만 가시가 꺾어지며 무영의 활동반경 전부를 좀먹었다.
화르르르륵!
동시에 용의 영혼이 작동했다.
무영의 전신이 불로 이글대며 가시를 삽시간에 태워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알리만이 흥미롭다는 듯 감탄을 내뱉었다.
“용의 불? 대단하군. 허나 하우레스님의 불꽃에는 못 미친다.”
하우레스!
64좌의 마신.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은 건 의외였다.
‘하우레스의 악마들이었군. 가장 위험한 마신 중 하나.’
무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놈. 하우레스가 지나간 자리엔 지옥불만 남았다.
하우레스의 불은 모든 적을 태운다. 하지만 하우레스가 원하면 불에 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야말로 영원히 불타오르며 고통을 맛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푸른사원의 벽을 깨고, 멀린을 죽이고자 움직인 마신 중에 하나였다. 이후 대도시를 지옥의 업화로 휩쓸며 수십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무영의 입가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하우레스의 이름이 귓가에 들릴 정도로 무영은 분명히 나아가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72마신의 권좌에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작 알리만은 단지 그 발판일 따름이었다.
쾅! 콰앙!
수없이 공격을 반복했다.
알리만의 가시갑옷은 깨지지 않았다.
“간지러운 공격밖에는 할 줄 모르는 것이냐! 크하하!”
대놓고 비웃었다.
무영의 전신엔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용의 불도 무한히 타오를 순 없었다.
하지만 무영의 눈은 끊임없이 알리만의 전신을 훑어대는 중이었다.
단 하나의 결.
저 가시들을 일거에 꿰뚫을 하나의 결만 확보하면 된다.
나머진 안중에도 없었다.
‘······ 보였다.’
무영의 눈이 번뜩였다.
가시가 방출되어 길어지는 그 찰나와 같은 시간에, 무영은 분명히 특이한 결 하나를 감지했다.
결이라기 보단 점에 가까웠다.
모든 가시들을 잇는 점!
저게 약점이다. 알리만의 권능이 가진 유일한 흠이었다.
동시에, 뿔 두 개가 솟아나며 무영의 시간이 느려졌다.
유지시간은 1분에 불과하나 무영이 느끼는 시간은 4분에 가까웠다.
4배로 느려진 세상 속에서 알리만의 공격은 굉장히 느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오로지 그 점 하나를 노리며 무영은 달렸다.
쩌어어어어억!
비탄이 정확히 점을 뚫었다.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노옴!”
알리만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방출한 가시들을 모두 회수했다.
곧 모든 가시들이 무영을 죽이고자 달려들었다.
‘가속.’
헤르메스의 장화에 달린 기능.
세상이 더욱 느려졌다.
3초에 불과하지만, 무영의 세계가 5배속으로 느리게 재생되는 것이다.
팔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핏줄이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이 솟았다.
푸우욱!
곧 점이 뚫렸다.
“내······ 갑옷을······ 어떻게?”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알리만이 말했다.
그러나 알리만의 전신은 곧 재가 되어 으스러져갔다.
본래 악마들은 죽으면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이처럼 재가 되어 사라질 뿐.
무영을 향해 날아오던 가시들도 가루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악마는 불완전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영은 다시금 상기시켰다.
마신급이라면 모르겠으나 마왕까지는 ‘악마’의 범주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악마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다.
마치, 세계의 법칙에 위배되는 듯한 종족이 바로 악마였다.
죽어선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지 않나.
<‘남작 알리만’을 사살했습니다.>
<영주점수 300점을 획득했습니다.>
<‘가시결정화’를 획득했습니다.>
<전승효과, ‘악마사냥꾼’이 추가되었습니다.>
<‘비탄’이 잘게 흐느낍니다. 악마에 대한 타격이 더욱 강해집니다.>
쾅! 쾅! 콰르릉!
전방에서 폭발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알리만이 죽었대도 악마들은 변함없이 싸웠다.
모든 악마를 전멸시키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다.
‘재는 재로.’
그러나 무영이 볼 때, 놈들은 이미 재와 다르지 않았다.
*
알리만과 이천의 악마병을 모두 없앴다.
바닥엔 잿덩이만 난무했다.
물론 무영의 피해가 없진 않았다.
‘대략 육천여명.’
이천 악마병을 제압하는데 육천명이 죽었다.
수지타산이 안 맞지만, 처음 싸운 결과치곤 훌륭한 편이었다.
허나 남은 숫자가 고작 2만 4천여밖에 되지 않는다.
이 숫자론 공작 바스트로에 닿을 수 없다. 놈이 이끄는 악마는 아직도 9만이 훌쩍 넘게 남아있었다.
그대로 붙으면 결과는 뻔했다.
무영의 참패다.
‘불타르들과 힘을 합쳐야겠군.’
결단을 내릴 시기인 듯싶었다.
알리만이 외곽에 있는 성을 발견했듯이, 다른 악마라고 이곳을 발견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으므로.
결국 불타르들과 힘을 합쳐 대항하는 게 판도를 이어가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물론 불타르들이 무영을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 수가 최선이었다.
오가르가 나선대도 한계가 있을 테고, 이 부분은 조금 고민을 해봐야할 듯싶었다.
이윽고 무영은 품에서 검은색 구슬 하나를 꺼냈다.
손톱 정도의 크기지만 이 안에 담겨있는 힘의 크기는 제법 놀라운 것이었다.
‘고위급 악마는 죽으면 적은 확률로 결정화를 남기지.’
결정화란 악마의 힘이 응축되어있는 구슬이다.
삼키면 능력치가 오르고 무기나 방어구의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먹는 거다.
꿀꺽!
거침없이 가시결정화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동시에 전신의 근육이 요동쳤다.
<힘과 민첩, 체력 순수능력치가 5씩 상승합니다.>
<스킬 ‘가시화’가 추가되었습니다.>
<사용자 ‘무영’이 얻은 축복에 의해 가시화 스킬의 랭크가 ‘B’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름: 가시화
효과: 전신을 단단한 가시로 뒤덮는다.
* 물리저항 200 상승.
* 마법저항 150 상승.
* 사용시 민첩이 대폭(-60%) 저하된다.
* 공격한 자의 체력을 조금씩 앗아간다.>
순수능력치와 스킬 하나를 얻었다.
가시화라.
방어적인 스킬이지만, 스킬 자체는 상당히 좋은 편에 들었다.
권능을 스킬로 만든 것이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긴급상황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듯싶었다.
사용하면 민첩이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어차피 가시화를 써야할 상황이라면 크게 움직일 일도 없을 터였다.
< 30. 공작, 바스트로(2) > 끝
ⓒ
< 30. 공작, 바스트로(3) >
‘마땅한 방어스킬이 없었는데 잘됐군.’
장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거기다가 무영은 2차 각성을 이룬 뒤 대부분의 스킬이 B랭크 이상으로 고정되었다. 이면의 주인들이 건넨 스킬을 제외한 모든 스킬이 말이다.
이는 확실히 축복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익히기만 하면, 무조건 B랭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과거에도 몇 명 없었다.
서리여왕 김한나와 같이 지능이 미친 듯이 높지 않고서야.
‘지능은 스킬의 숙련도와도 관계가 있지.’
높다고 머리가 똑똑해지진 않는다.
대신 스킬의 사용을 편하게 해주고, 숙련도를 높이는데 일조한다.
스킬의 구조자체를 읽는다고 해야할까.
간혹 스킬이 가지는 반발력 자체를 없애줄 때도 있었다.
다행히 무영의 지능은 낮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높은 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300도 안 되는 수치. B랭크 이상으로 스킬을 유지할 수준의 지능이라 하긴 어려웠다.
‘이번 기회에 스킬을 잔뜩 익힐 수도 있겠군.’
무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귀족의 직위를 가진 악마들. 놈들을 없애고 결정화를 얻는다.
모두 먹어치워 이처럼 스킬을 얻으면 조금씩 아쉬웠던 부분들이 보완될 수 있었다.
적어도 익혀서 손해는 보지 않는다.
물론 스킬은 한 번 익히면 어지간하면 지울 수 없다. 잘못 된 스킬을 익히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무영에게 한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40년 간 쌓인 수많은 경험과 정보들.
그 시간이 마냥 허투였던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귀한 현재, 이곳 마계에서 무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승효과->
악마사냥꾼(B++, 악마를 사냥하여 결정화를 얻을 확률이 올라간다.)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사냥을 하면 마땅히 남기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사냥꾼의 칭호다운 효과였다.
“불타르들과 합류하시겠습니까?”
배승민이 물었다. 그는 죽어서 리치가 되었지만, 리치답게 지능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간혹 이처럼 조언을 해오기도 하였다.
허나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합류하는 건 나중이다.”
불타르들과 합류하려 한들 그들이 무영을 받아줄지가 의문이었다.
아니,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모든 불타르가 오가르와 같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지만 공작 바스트로와 십만에 달하는 악마병을 상대하려거든 불타르들의 힘이 필수였다.
그러니 싫어도 공조하게끔 만드는 게 최상이었다.
“우린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
악마도 먹어야 산다.
보급로라고 해봐야 괴물을 사냥해 뜯어먹거나 호수의 물 따위를 마시는 게 전부지만,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어떨까.
가뜩이나 악마들은 붉은 달의 영향을 받아 흥분항 상태다.
‘극단적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
악마의 긴 밤을 대처하고자 만들어낸 전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전쟁에서 보급로를 끊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니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었다.
게다가 불타르는 딱히 먹지 않아도 장기간을 버틸 수 있다.
ⓒ 도깨비나 이종족도 성 내에 비축한 식량만 가지고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터.
‘전쟁은 조급해하는 쪽이 진다.’
전장만큼 암살을 하기 쉽고 좋은 장소는 없으니, 무영보다 많은 전장을 경험한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전장을 보고 내린 결론을 하나였다.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실수를 남발하게 되어있었다.
작은 일이 크게 돌아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하여······ 무영은 착실히 적의 숨통을 조일 계획이었다.
무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품의 나무가 있는 곳에 불타르들이 모인다.
불타르는 품의 나무가 주는 안정감 없이는 살 수 없는 종족. 당연한 이치였다.
아니면 자신이 내뿜는 불길에 스스로가 잡아먹히는 탓이다.
그리고 바스트로와 악마병들은 그 품의 나무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서로 적대하던 불타르들도, 이번 기회엔 힘을 합쳤다.
“오가르 소족장. 대족장께선 아직 결정을 안 내리신 건가?”
그렇게 모인 불타르가 물경 팔백.
다섯 개의 부족이 모였다.
악마에 비하면 숫자가 한참 적지만 그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그 하나하나가 상위의 포식자였으니.
그리고 다섯 부족 중 하나를 다스리는 족장이 오가르에게 묻자, 오가르는 묵묵히 고개만 저어보일 따름이었다.
“대족장께선 우리의 승리를 위해 고민하고 계십니다.”
“악마들 따윈 밟아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러다가 ‘날 선 깃털 부족’이 전멸했지. 그새 잊으셨습니까?”
“불타르의 적은 불타르뿐이다.”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했다.
불타르는 강하다. 인간들도, 악마들도 어지간하면 피해가려하는 게 불타르다.
하지만 그 피해가는 게 꼭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건드려봤자, 그들이 불타르에게서 얻을 게 없었다.
기본적으로 불타르는 품의 나무 근처에서만 살아가는데, 품의 나무는 악마들의 영향이 적은 외곽 쪽에 주로 있는 편이었다.
조금만 돌아가면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거늘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불타르의 반격을 겁내는 것도 아예 없다 할 순 없지만······.
‘이대로는 답이 없다.’
오가르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봐도 불타르들은 너무 오만하다.
나아가려는 기색 없이 정체만 하고 있다.
불타르의 적은 불타르뿐이다?
하. 이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침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도 모른다.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는데 어찌 알겠는가.
오랜 시간 한 영역에 머무른 결과이기도 했다.
마땅한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정체하였다.
‘그런 면에서 무영. 놈은 난놈이었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게 놀라웠다.
도전을 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정신의 그릇자체는 위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오가르도 무영에게 끌린 것이었다.
반면에······ 불타르들은 어떤가.
“악마들 따윈 우리의 상대가 못 돼.”
“전사 한 명당 악마병 백 마리만 데려가면 된다. 간단하군.”
“대족장께서 나이가 드시더니 겁이 많아지신 게 분명하군. 과거에는 정말 수많은 대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떨게 하셨거늘.”
저들은 모른다.
대족장은 나이가 들고 혜안을 떴다.
그저 무작정 부딪히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아는 건 불타르 중에서도 대족장밖에 없었다.
ⓒ 쿵!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품의 나무를 향했다.
품의 나무 근처에서 교감하듯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대족장이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다른 불타르보다 1.5배는 커다란 체구.
이마에 새겨진 X자의 상처와 머리카락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품의 나무를 버린다.”
“······ 품의 나무를?”
“말도 안 됩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품의 나무는 불타르의 어머니와 같다.
그들에게 있어선 신성시되는 장소.
설령 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른 품의 나무를 찾으려거든 기약이 없었다.
“이곳에 발이 묶이면 우린 진다.”
허나 대족장의 의견은 확고했다.
적의 숫자와 규모를 따져보고 내린 결론.
대지의 나무 근처에 한정되어 싸우거든 불타르는 악마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겁을 먹은 겁니까? 대족장!”
“실망이오. 고작 악마들 따위에 품의 나무를 버리다니!”
“닥쳐라.”
콰지지지지직!
주먹을 쥔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나온 즉시 불에 타 승화되었다.
모두가 입을 꾹 닫았다.
압도.
주변 만물을 지배하는 패기가 그에겐 있었다.
오래전 몇 개의 대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잘게 떨도록 만들었던 대족장의 전설이, 그들의 머릿속에 다시금 새겨졌다.
“너희는 악마의 무서움을 모른다.”
그가 천천히 이마의 X자로 새겨진 상처를 쓰다듬었다.
대족장의 몸에서 유일하게 난 상처였다.
“하우레스. 놈은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지.”
마신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번에 쳐들어온 바스트로도 대족장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품의 나무를 버리겠다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 것이고.
동시에 모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족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전설이다.
불타르라는 그 태생에 대한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마왕과 마신도 은연중 불타르가 모이면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저 상처의 진원지가 마신이었다니.
오가르마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 악마병을 이끌고 있는 바스트로라면 내게도 맞수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나와 대적하여 맞수를 이룰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주변은 적막만이 가득하였다.
대족장과 대적할 수 있는 불타르가 있을 리가 없다.
모두가 침묵하자 대족장이 몸을 돌렸다.
“이곳에 발이 묶이면 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 허나, 도망가는 게 아니다. 조금 더 넓게 움직이며 바스트로를 짓뭉개버릴 것이다.”
대족장이 강한 의지를 보였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바로 싸워서 이길 순 없다.
그리고 기적에 기댈 정도로 정신이 무르진 않았다.
다만 기회를 기다릴 따름이다.
800의 불타르가 대족장 하나에게 압도당했다.
결국 모두가 품의 나무를 버리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발 전진을 위한 한 발 후퇴.
‘무영······.’
오가르는 무영과 그의 영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불타르들이 일거에 빠진다. 그 틈에 악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 악마병들에게 걸리거든 지금 그가 가진 힘만으로는 대적이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오가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없었다.
무언가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역전시킬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숲을 태웠다.
물을 마르게 만들고 식량이 될 만한 모든 걸 없앴다.
오천의 병사가 50개의 부대로 나뉘어 일사분란하게 일을 진행했다.
괴물들을 죽여서 살점을 모두 불사르거나 땅속 깊은 곳에 묻었다.
악마병들의 활동반경 내에 섭취 가능한 모든 걸 제거할 작정이었다.
“악마들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아랑드가 말했다.
이 역시 예상한 수순이다. 십만이나 되는 악마병들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보급을 모두 끊은 게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악마병들이 잔뜩 흥분한 상태입니다. 빠르게 대피시키지 않으면 5천의 병사가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아랑드가 조급한 듯 말을 이었다.
무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효과가 있다.
이제 방비를 위해 악마병들이 움직일 것이었다.
여기서 싸우느냐, 마느냐의 갈림이 있었다.
하지만 전력으론 상대가 안 된다.
그나마 악마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면 바로 정보의 전달력이다.
무영이 직접 만들고 운영하여 구축화 한, 일사분란한 활동체계!
이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유리한 점을 최대화에 불리한 상황에 맞서는 게 기본이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
전략과 전술에 능하진 않지만 지식은 있었다.
수많은 전쟁을 두 눈으로 목도했고 그 숫자만큼의 역전극 또한 보았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싸움을 이긴 영웅들이 몇몇 있었다.
무영은 그들의 수를 떠올렸다.
‘맞서는 건 최악의 수다.’
자살과 다름없다.
하지만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완성 된 체계를 바탕으로 최대한 지연하며 속도전을 벌인다.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고 적을 방심시킨다.
이길 듯,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최대한 적을 안달나게 하면 기회가 한 번은 분명히 올 것이었다.
무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후퇴하지 말고 진지를 구축하라. 적을 유인하겠다.”
< 30. 공작, 바스트로(3) > 끝
ⓒ
ⓒ < 30. 공작, 바스트로(4) >
공작 바스트로의 휘하에 있는 귀족은 다섯이었다.
남작 알리만, 남작 오르아타, 남작 알루나, 남작 스인, 백작 아르공.
“알리만이 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정찰을 나갔던 알리만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자 바스트로가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알리만을 본 이가 없는 탓이다.
‘당한건가?’
바스트로가 의아해했다.
자신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이 영역에서 불타르뿐이었다.
하지만 불타르는 품의 나무조차 버리고 줄행랑을 치지 않았던가.
알리만을 제거할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자신들이 점거한 이곳은 품의 나무가 있는 지척이었다.
화르르륵!
품의 나무는 불타고 있었다.
불타르의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존재이며, 그들이 어머니라 떠받드는 나무.
바스트로에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거슬렸기에 태웠을 따름이다.
“오르아타. 알리만이 정찰을 갔던 지역을 둘러보도록. 이상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남작 오르아타가 오천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스트로의 눈에 이채가 생겼다.
‘누가 방해하고 있는 진 모르겠다만······.’
바스트로가 놓친 제 3자. 그 규모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강력한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보아하니 숲을 태우고, 호수를 매몰한 뒤 주변의 생명을 모조리 앗으며 악마들이 고사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의 명령체계에서 움직인다는 말.
불타르의 영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놈이 있다는 뜻이다.
어찌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타르들처럼 겁쟁이가 아니길 바라지.’
솔직히 품의 나무를 버리고 도망간 수에 대해선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새로이 나타난 적은 부디 다르길 빌었다.
히이이잉!
바스트로가 타고 있던 말의 등을 찼다.
지옥마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색깔이 하얀 말.
유니콘이 잘게 울었다.
남작 오르아타는 오천의 병력과 함께, 본래 알리만이 해야 했을 지역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여기로군.’
머지않아 외곽에 있던 성을 발견했다.
그 근처엔 온갖 악마병들의 장비들이 정리되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알리만이 당한 듯싶었다.
‘모자란 놈.’
오르아타가 쯧쯧 혀를 찼다. 알리만은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돌진하는 녀석이었다. 언젠가 이런 꼴을 당할 줄 알았다.
붉은 달의 영향을 받은 탓에 그 행동에 더욱 거침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복수는 해주마.’
오르아타는 다르다. 하지만 오르아타 역시 붉은 달의 영향을 받았다.
복수라는 명분 아래 명했다.
“성문과 성벽을 부숴라. 안에 있는 놈들을 끌어내겠다.”
가장 먼저 크기만 5m에 달하는 거구의 악마병이 몸을 날려 문과 부딪혔다.
ⓒ 쿠우우웅!
문이 크게 떨렸다.
몇몇 악마가 날개를 활짝 폈다.
쉬이이잉-!
푹!
수십 발의 화살이 성 안에서 날아들었다.
하늘에 뜬 몇몇 악마가 화살을 맞았다.
공성병기에서 날아온 돌무더기가 악마병 진영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었다. 크게 효과는 없었다.
이윽고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악마병들이 창을 들고 벽을 넘었다.
콰앙!
곧 문도 함께 부서졌다.
오르아타가 검을 뽑았다. 이어 그의 권능인 ‘격통의 발한’이 발동되었다.
쩌정!
그의 검에 서리보다 더욱 차가운 한기가 맴돌았다.
검은 얼었고, 검에 닿는 수증기도 순식간에 얼어서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야말로 닿는 모든 걸 얼려버리는 능력!
오르아타와 오천의 악마병이 별 다른 제지 없이 성 안으로 입성 했다.
‘적이 없다?’
오르아타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화살을 날리던 적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새 도망간 건가?
허나 붉은 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일이다.
알리만을 죽인 저력이 있는 적들이 이 정도로 저항하지 않고 성을 내준 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르아타도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성 안으로 발을 들였고,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
콰아아아아앙!
쿠우우웅!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성 자체를 매몰시키려는 셈이구나!’
오르아타가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폭발로 악마병을, 오르아타를 위협할 순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폭발은 예사롭지 않았다. 악마와는 극상성의 신성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용의 피부조차 녹여버릴 수준의 화력이었다.
조금만 신중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나 이미 한 발 늦었다.
“모두 성을 빠져나가라!”
오르아타가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성문을 다시 넘어가긴 쉽지 않았다.
‘방어벽! 왜 방어벽이 거꾸로······?’
본래는 성의 외벽을 지켜야할 방어벽이, 거꾸로 내부에 새겨져 있었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불가하도록.
처음부터 안으로 유인하는 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화살과 공성무기가 날아들었다. 안에 놈들이 있었다는 뜻!’
저 보이지 않는 방어벽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제아무리 오르아타라 해도 힘들었다.
다시금 방향을 우회했다.
화살이 날아오던 지점 주변을 뒤지다보면 분명히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가 하나쯤은 나타날 것이다.
팅-
휘이익!
이 또한 오르아타의 기대를 배신했다.
자동으로 발사되는 석궁과 공성병기였던 것이다.
결국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오르아타는 마지막 시간마저 날려버렸다.
꽈앙!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오르아타의 주변이 폭발했다.
ⓒ *
<‘남작 오르아타’를 제거했습니다.>
<영주점수 350점을 획득했습니다.>
<5,124명의 악마를 사살했습니다.>
<전승효과 ‘악마사냥꾼’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B++->A>
<결정화를 얻을 확률이 크게 올라가고, 이제부턴 고위급 악마를 사냥하면 그들의 칭호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단, 그 칭호 중 하나만 적용됩니다.>
무영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성이 매몰되어갔지만 아쉽다는 눈초린 결코 아니었다.
‘마룡살상포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신성력이 섞이니 효과가 좋군.’
암흑룡을 한 수에 죽였던 마룡살상포의 포탄만을 재현해보았으나 화력자체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배승민이 신성력을 더해서 악마들에게 극상성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오천의 악마병 모두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성은 다시 만들면 된다.”
무영은 뒤를 돌아 아쉬운 눈초리로 매몰되는 성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말했다.
드워프를 동원하면 성은 몇 달이면 재건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패배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곧이어 무영이 매몰된 성으로 다가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유독 반짝이는 결정화가 눈에 띄었다.
알리만의 결정화와는 달리 한기가 가득했다.
손에 쥐었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얼어붙을 듯했다.
꿀꺽!
그러나 무영은 지체 없이 삼켰다.
이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민첩과 지능, 지혜의 순수능력치가 5씩 상승합니다.>
<스킬 ‘격통의 발한’이 추가되었습니다.>
<사용자 ‘무영’이 얻은 축복에 의해 ‘격통의 발한’ 스킬의 랭크가 ‘B’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름: 격통의 발한
효과: 무기에 극상의 한기를 심는다.
* 무기에 닿는 모든 걸 얼린다.
* 자기 자신조차 얼릴 수 있으니 주의.>
쩌저정!
비탄의 전신에 얼음이 입혀졌다.
가볍게 흔들자 주변의 모든 수분이 얼어버렸다.
입자처럼 얼음가루가 흩날리는 걸 보곤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단지 얼리는 스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얼음계통의 스킬과는 격이 다르다.
괜히 ‘권능’이라 칭해지겠는가.
이 권능 하나만으로 오르아타는 남작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블리자드, 혹은 얼음룡의 숨결과 같은 최상급의 얼음계통 스킬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수준이었다.
‘결정화가 생각 이상으로 잘 나온다.’
남작 둘을 죽였는데 두 개의 결정화가 나왔다.
악마사냥꾼 칭호 덕이라고 하기에도 운이 좋았다.
대략적인 산술로 최소 귀족 스물은 죽여야 고작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게 결정화였으니.
“구축한 진지로 돌아가겠다.”
모든 악마가 재가 된 걸 확인하곤 몸을 돌렸다.
성을 매몰시키는 수는,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바람이 바뀌었다.’
기적이 없다면 만든다.
무영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많은 묘수를 머릿속에 늘어놓았다.
ⓒ
알리만과 오르아타가 당했다.
바스트로가 의아함을 느끼고 병력을 더 보냈을 때, 그곳에는 무너진 성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당했군.”
과연 연달아 당하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로써 적이 만만치 않음이 판명된 것이지만 얕보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걸어온 싸움을 마다한다면 나 바스트로의 전사라 할 수 없다.”
10만에 달하던 병사가 어느덧 9만으로 줄었다.
고작 10분의 1이라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쉽게 내줬다.
“알루나! 스인! 너희에게 각각 2만의 병력을 내어주마. 찾아내어 잔인하게 죽여라!”
이천으로, 오천으로 안 된다면 일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2만의 악마병은 인간들의 거대한 성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지금 나타난 적이 2만 악마병까지 상대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간 동원 된 괴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무척이나 허접했던 것이다.
‘도깨비, 드워프, 엘프······ 다들 보잘 것 없는 녀석들뿐이다.’
태생자체에 한계가 있는 놈들.
하이엘프나 룬드워프 같은 극히 희귀한 종이라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악마와 싸울 순 없었다.
여기서 당한다면 그 역시 수모다.
그런 창피를 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적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바스트로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어 남은 두 명의 남작이 4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떠났다.
남작 알루나와 남작 스인도 자신들이 패배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영이 택한 건 게릴라다.
속도전을 필두로 적들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고, 우회하고 진을 치며 그야말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을 교과서처럼 행했다.
여기서 배승민이 큰 활약을 했다.
아크리치인 그는 마법과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고, 리치인 주제에 악마와 상극이라 할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스르르르릉!
남작 알루나의 몸이 꽁꽁 얼었다.
무영의 검이 알루나의 중심을 꿰뚫었던 탓이다.
<‘남작 알루나’를 처리했습니다.>
<영주점수 500점을 획득했습니다.>
<‘조화의 결정화’를 얻었습니다.>
연달아 세 개째.
귀족을 죽이는 족족 결정화를 얻었다.
물론 얻어서 나쁠 건 없었다. 결정화는 악마의 힘 자체다.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진다.
챙! 채챙!
알루나를 죽이자 와해된 악마병이 발악했다.
무영 역시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전황은 막상막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급악마병 하나가 도깨비 셋을 상대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 건 이미 악마병들의 힘을 쫙 빼놓은 덕이었다.
이기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면치 못할 터.
쿵! 쿵!
그때였다.
멀리서, 불의 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무영!”
바로 오가르와 백에 달하는 불타르였다.
오가르는 반갑다는 듯 무영의 이름을 외치며 악마병들을 날려버렸다.
아무리 악마병이라도 귀족이 아니고선 오가르를 쉬이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
거기엔 유독 큰 불타르, 대족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흥분한 악마병들마저 그에겐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의 주변으로는 보이지 않는 벽같은 게 설치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왔군.’
그들을 바라보는 무영의 입가가 작게 호선을 그렸다.
< 30. 공작, 바스트로(4) > 끝
ⓒ
< 30. 공작, 바스트로(完) >
대족장과 오가르, 거기에 불타르 백여 명!
예상보다 숫자가 적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준은 되었다.
“하하!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설마 여기까지 해낼 줄이야!”
오가르는 연신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싱글벙글대는 중이었다.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에서 전혀 안 어울리는 웃음이었지만 그만큼 주체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는 방증이었다.
그도 그럴게, ‘설마’한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수백의 불타르가 품의 나무를 버리고 떠났다.
작전상 후퇴. 두 발 전진을 위한 뒷걸음질이라 자기위안을 했지만 결국은 악마를 피해 달아난 것과 진배없었다.
틈을 노리고 파고들 기회만 보고 있었으나 그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판을 뒤집었다.’
무영은 판을 뒤집었다.
귀족이라 일컬어지는 악마를 연신 사냥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다.
어느 누구도 무영에게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무영이 처음 나타났을 당시를 기억하면 당연한 일이다. 품의 나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줬다고는 하나, 무영의 힘 자체는 불타르와 견줘도 부족함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데 지금.
스아악!
남작 알루나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귀족의 칭호를 갖고 있는 악마를, 홀로 처리하였다.
뿐만 인가.
“움께서 적의 대장을 쓰러트렸다!”
“더 몰아붙여!”
무영을 따르는 수만의 병사 또한 만들어냈다.
이게 고작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대족장께서 마음을 바꾸셨을 정도다. 고집을 꺾는 걸 본 적이 없거늘.’
무영이 아크리치인 배승민을 보내지 않았다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쉬이 믿지 않았고, 결국 대족장을 비롯한 오가르와 그 일족만이 이곳에 당도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내면, 모두가 마음을 바꾸리라 믿었다.
품의 나무를 불태운 악마들을 그대로 놔둘 순 없는 노릇.
대족장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무영을 돕는 걸 허락했을 터였다.
실제로 대족장의 눈은 연신 무영에게 닿고 있었으니.
‘그는 대단한 친구입니다. 얼굴이 마르고 닳도록 보십시오.’
자신이 인정한 친구가 대족장에게도 인정받는 것 같아, 가슴속에 묘한 떨림이 일어났다.
누구도 인정 하지 않던 걸 무려 대족장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영에겐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머지않아 대족장마저 뛰어넘어 버릴지 모르는 자!
어쩌면 지금처럼 이 세계의 판도를 바꿀······ 그런 자.
“늦었군.”
수많은 악마병을 뚫고 무영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자, 무영이 한 말이다.
오가르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쌀쌀맞군.”
“이야기는 전투가 끝난 후에.”
무영의 얼굴에 피곤함이 드러났다.
말이 게릴라 작전이지, 무려 14일간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영주로서, 사령관으로서 모든 상황을 살피고 지시해야하기 때문에 제대로 잠조차 들지 못한 나날이었다.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졌으리라.
이런 강행군이 가능했던 것도 그 중심에 있는 이가 무영이었기 때문이다.
오가르는 내심 혀를 찼지만 그래도 이해했다.
쫓아내지 않은 것이 어딘가.
상황을 보면 아주 여유롭지는 않았다.
“오냐. 미친 듯이 날뛰어주마.”
촤아악!
오가르의 창이, 땅을 갈랐다.
*
조화의 결정화.
남작 알루나를 죽이고 얻은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 무영은 그것을 날름 삼켰다.
<‘조화의 결정화’를 섭취했습니다.>
<지능과 지혜가 7씩 상승합니다.>
<‘만물조합’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사용자의 축복에 따라 ‘만물조합’ 스킬의 랭크가 ‘B’로 격상합니다.>
조합스킬이라!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과 관련된 스킬은 잘만 쓰면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법이었다.
물론 잘못 사용하면 안 쓰느니만 못한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당장 관련된 스킬이 하나도 없었던 만큼 이득에 가까웠다.
“악마가 되는 게 두렵지 않느냐?”
그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던 대족장이 말했다.
대족장. 무영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전과 달리 떨림은 전혀 없었다. 일전 그를 멀리서 보았을 땐 ‘격’의 차이가 느껴져 본능적으로 몸이 떨어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거리가 있을 뿐 격의 차이까진 느껴지지 않았다.
많이 따라잡았다는 뜻이다.
“악마의 힘을 취해도 악마가 되진 않는다.”
무영은 담담하게 답했다.
과거, 무영이 회귀하기 전 돌았던 소문이다.
귀족의 직위에 있는 악마를 죽이고 결정화를 얻어 계속 섭취하면 악마자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결론은 아니었다.
가장 많은 악마를 죽이고, 결정화 50개가량을 섭취한 ‘데빌킬러’가 단언한 것이다.
물론 50개로 부족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결정화 50개를 모으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악마보다 더욱 악마 같은 것이 되지. 과거 그런 놈이 있었다.”
무영이 의아한 듯 쳐다보자 대족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네놈의 활약은 잘 보았다. 이만한 병력으로 용케 악마들을 밀어붙였군.”
“전쟁은 단순 힘 싸움이 아니다.”
백 명으로 천명도 막을 수 있는 게 전쟁이다.
압도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예외지만, 요는 전략과 전술이었다.
수많은 병력이 부딪히는 힘의 소용돌이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
다행히 무영도 아예 소질이 없진 않은 듯싶었다.
“그래. 힘 싸움이 전부는 아니지. 허나 바스트로와 함께 온 귀족악마는 다섯이었다. 홀로 몇을 처리했느냐?”
“둘.”
“둘? 대단하군.”
허나 대족장도 지금 전장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었다.
무영이 둘을 처리하고 수만의 병사를 없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해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둘 남았다. 남작 스인, 백작 아르공.”
“······ 바스트로가 조급해할 만하군.”
이 대목에선 대족장도 약간은 놀란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주변에 모인 무영의 병력이라 해봐야 구성자체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병력들을 이끌고 어찌 3명이나 되는 귀족악마를 잡는단 말인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타르는 이게 전부인가? 못해도 500은 모일 줄 알았는데.”
무영이 이맛살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대족장의 앞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
실제로 다른 불타르들이 반발하려 했지만, 대족장이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귀족악마들이 연이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속속들이 모일 것이다.”
“그럼 전투를 속행해도 괜찮겠군.”
“너와 너의 병사들은 휴식이 필요하다.”
“지금이 아니면 남작 스인을 몇 배는 어렵게 잡아야 한다. 지금이 적기다.”
무영은 뚝심있게 밀고나갔다.
남작 알루나와 남작 스인은 각각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햇다.
그중 남작 알루나를 잡았으나, 게릴라를 펼친 건 스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악마병의 힘이 빠져있을 지금이 아니면 모든 악마들이 한데 뭉칠 가능성이 있었다.
몇 배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무영의 눈이 대족장에게 향했다.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눈빛. 어찌 보면 도전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전사의 눈이라 아니할 수 없으리라.
대족장도 그런 면모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좋다. 우리 부족이 도울 것이다.”
“고맙군.”
무영이 짧게 표하며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족장과 오가르가 포함 된 불타르 100이라면, 힘 빠진 악마병 2만을 잡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였다.
백작 아르공이 바스트로에게 말했다.
“바스트로님. 알루나경과 스인경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4만 병사 중 단 하나에게도 소식이 없다.
아무리 정찰이 급해도 정보병을 뽑아 이야기라도 전했어야 함이거늘.
아니면 마법을 이용해 통신이라도 보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 뿐이었다.
“······ 전멸한 건가?”
“불타르들이 다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들과 관계가 있지 않을는지요?”
빠드득!
바스트로가 이를 갈았다.
도합 절반의 병력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증발한 것이다.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었다.
히히히히힝!
바스트로가 유니콘의 옆을 쳤다.
“과연 어떤 놈들인지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다.”
이어 인상을 잔뜩 굳힌 채 바스트로가 말했다.
“전 병력. 출전하라.”
품의 나무를 벗어난 악마들의 동태를 무영도 읽고 있었다.
“무영. 어찌 할 것이냐?”
오가르가 물었다.
스인마저 제거하며 무영은 믿을 만한 지휘자가 되었다.
무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도합 700이 훌쩍 넘는 불타르와 무영이 갖고 있는 1만 여의 병력.
보통이라면 상황을 관망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승기를 잡았다.
‘기세’라는 건 결코 얕봐선 안 되는 거다.
승리의 기쁨에 취하고, 승리를 위해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잠시 주춤거린다면 그 기세를 잃을 가능성이 있었다.
“건곤일척.”
“그건 무슨 말이냐?”
“한 번의 싸움에 모든 걸 건다. 악마들도 더는 수 싸움에 놀아나지 않을 터이니.”
바스트로는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움직이는 경로를 보건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싸움으로 가면 언뜻 무영이 유리해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숲을 태우고 식량을 없앤 건 바스트로를 조급하게 만들어 실수를 하게끔 유도한 것에 불과했다. 만약 장기전으로 가면 무영과 병사들도 무사하진 못한다.
그래서 건곤일척이다.
다만, 지형을 고를 권리는 무영에게 있었다.
“오가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든지 말해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하마.”
오가르는 이 영역의 태생이다.
누구보다 주변 지대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반면 바스트로는 한계가 있었다. 토박이와 이제 막 도착한 외지인의 차이였다.
‘반드시 이긴다.’
건곤일척이라고는 하나, 무영은 질 생각이 없었다.
바스트로와 5만의 악마병이 양 옆이 절벽인 장소로 다가갔다.
이곳 주변에 적의 병력이 모여 있는 걸 파악한 탓이다.
‘보나마나 함정이겠지.’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바스트로는 척후병을 보내 주변을 살피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절벽 사이가 아닌 길로 우회하여 돌아갔다.
굳이 지형이 불리한 곳에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스트로가 피할 거라는 사실 역시 무영은 읽고 있었다.
길을 돌았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콰앙! 콰르릉!
바닥에 균열이 생겼다.
드워프들이 땅을 파고 돌아가는 길목에 폭약을 설치한 것이다.
추아아악!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 장소에서 물이 솟구쳤다.
지하수를 건드린 것이다.
‘당했다.’
바스트로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으나 땅이 파이며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멀리서 불타르와 1만 병사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놈! 이 따위 얄팍한 수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바스트로가 유니콘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수많은 악마들도 날개를 폈다.
실제로 죽은 악마병의 숫자는 극소수.
하지만 무영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날개가 부식되는 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치이이이익!
활짝 편 날개가 조금씩 타들어갔다.
그 효과는 미미했지만 비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무영의 옆에서, 아크리치인 배승민이 끊임없이 주문을 되뇌는 중이었다.
‘성수는 아니지만 신성력을 머금은 물이지. 하급악마에겐 제법 효과가 있다.’
지하수에 신성력을 가미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하급악마를 기준으로 효과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피부가 약한 날개에 영향을 주는 게 전부다.
하지만 악마병 대부분이 하급악마인 걸 감안하면 생각 이상의 결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노오오오옴!!”
바스트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내질렀다.
< 30. 공작, 바스트로(完) > 끝
ⓒ
< 31. 그레모리(1) >
직감적으로 무영이 이 모든 일의 원흉임을 알아본 것이다.
네 명의 휘하귀족들을 없애고, 물경 5만여 악마병을 몰살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원흉!
그로도 모자라 바스트로 본인이 함정에 당했다.
붉은 달의 영향을 받는 지금, 바스트로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투둑! 투두둑!
전신의 근육이 팽창하며 크기를 늘렸다. 그 주위로 아지랑이와 같은 안개가 생성되었다. 이윽고 그 안개들이 합쳐지더니 바스트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분신!
총합 여섯의 분신이 완성된 것이다.
이윽고 완성 된 분신들이 움직이며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분신들은 외견만 같을 뿐 행색이 가지각색이었다.
예컨대 본체로 추정되는 자는 유니콘을 타고 있었지만 나머지 여섯은 아무런 탈 것도 타지 않고 있었다.
무기나 입은 갑주도 달랐다.
‘저게 권능이로군.’
분신 하나하나가 본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영의 병사들은 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일곱의 바스트로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통의 분신이라면 유니콘에 탑승한 본체만 잡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일곱 모두가 분신이고 본체다.’
무영은 도합 일곱 모두의 결을 읽었다.
그리고 결은 모두 같았다.
본체를 죽이면 나머지 분신 중 하나가 다시 본체가 될 것이다.
저건 그런 권능이었다.
공작쯤 되는 자의 권능이니 과연 평범하진 않았다.
“바스트로는 내가 맡겠다. 너와 오가르는 나머지를 상대하라.”
불타르의 대족장이 나섰다.
그는 칠백의 불타르 모두의 추앙을 받는 자.
불타르의 생태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충분히 바스트로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스트로를 대족장이 맡는다면, 그 다음 장애물이라 여겨지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백작 아르공!
무영이 없앤 네 명의 귀족은 모두 남작이었음을 감안할 때 백작이면 거대한 벽 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는 무기가 없었다. 대신 구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슈아아아악!
구슬을 쓰다듬을 때마다 검은 돌풍이 튀어나왔다.
악마병들 또한 터진 지하수의 잔재에서 뛰쳐나왔다.
마냥 좋지만은 않은 상황.
“무영. 불타르가 왜 적수가 없는 포식자라 불리는 줄 아느냐?”
오가르는 전혀 긴장감없는 얼굴로 말했다.
“태생적으로 강하기 때문 아닌가?”
“그것도 그렇다만······ 우린 싸움에 이골이 났다.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무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아아앙!
대족장은 바스트로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어느새 다가가 주먹을 뻗었고 그 풍압만으로 땅이 들썩일 수준이었다.
그 외에 다른 불타르들도 대족장의 싸움을 위해 주변을 정리했다. 고위 악마병들의 발을 묶으며 강하게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또 우리는 품의 나무를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하기도 했다만, 무영 네가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준 덕분에 평화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비효과와 같았다.
만약 무영이 품의 나무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불타르들은 쉽게 뭉칠 수 없었을 것이다.
품의 나무를 두고 경쟁하는 건 어디까지나 품의 나무의 생명이 짧아서이지, 그 문제가 해결되면 서로 충분히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화합을 도모한 찰나에 공작 바스트로가 품의 나무를 태웠다.
무영의 이해와 일치하는 700 불타르 동료가 생기게 된 배경이었다.
“오가르. 타칸. 길을 터라. 저 태풍은 내가 잠재우겠다.”
“방법이 있는 것이냐?”
태풍의 영역은 백작 아르공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있었다.
적과 아군을 가르지 않는 무차별하기 짝이 없는 바람의 칼날들.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상쇄할 순 있을 것 같군.”
전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나 악마의 결정화를 섭취하며 생겨난 스킬들이 있었다. 그를 잘 활용하면 완전한 파훼는 불가능해도 적당히 상쇄시킬 순 있을 것이다.
‘여태껏 내가 얻은 스킬은 네 개.’
네 명의 남작을 죽이고 네 개의 스킬을 얻었다.
가시화, 격통의 발한, 만물조합, 그리고 수중폭발!
이중 무영은 격통의 발한과 수중폭발을 조합해 새로운 스킬을 만든 바가 있었다.
‘두 개를 조합해 얻은 스킬, 영점폭발.’
무영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바닥부근에서 수많은 얼음결정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결정이 주먹만 하게 생성되자 무영은 그것을 던지듯 퍼트렸다.
쾅!
정확히 태풍을 향해 날아간 결정이 폭발했고 수많은 얼음을 발생시켰다.
이윽고, 놀랍게도 태풍이 얼어붙는 게 아닌가.
하지만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무영은 달려 나가며 계속해서 영점폭발을 사용했다.
“저런 재주는 또 어디서 배운 것이냐?”
타칸이 뼈다귀를 달그락거리며 물었다.
왜인지 부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무영은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었다.
지하수를 터트려 이 주변은 습하기 짝이 없었다.
태풍은 모든 수분을 빨아들이고 생성되었으니, 태풍 자체를 얼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슈아아악!
하지만 백작쯤 되는 자의 권능이 고작 태풍을 하나만 소환하는 것일 리 만무했다.
수많은 돌풍이 주변을 때렸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마치 블랙홀과 같은 강렬한 돌풍이 수십 개가 생성되었다.
스릉!
비탄이 잘게 울었다.
오가르와 타칸은 충실한 방패였다. 돌풍을 몸으로 막아내고 바람을 가르며 길을 터주고 있었다.
‘어렵지 않다.’
무영의 머리에서 두 개의 뿔이 솟아났다.
가속!
세상이 4배 느려졌다.
허나, 기회가 많진 않았다.
계속해서 싸움을 속행하기 위해서라도 단칼에 끝낼 필요가 있었다.
파아아아악!
오가르와 타칸을 방패삼아, 무영이 날아올랐다.
배승민. 그는 아크리치다. 성자의 능력과 네크로맨서의 능력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리치인 주제에 악마들과 상극에 있는 존재.
배승민은 그저 시체에 신성력을 주입한 뒤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악마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연히 악마병들의 입장에선 제거해야할 1순위였다.
하지만 하급의 악마는 배승민에게 다가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휘아아앙!
배승민이 차고 있던 목걸이, 탈리스만이 빛을 토해냈다.
탈리스만은 신성구를 만드는 재료다. 위시의 발현을 위한 필수품이며 십만 사제들과 교황, 성녀가 바라 마지않는 물건이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 악을 뿌리치는, 파마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병은 많았다. 상급의 악마병 세 명이 순식간에 배승민을 둘러쌌다.
“상극의 물건을 가지고 있군.”
“우리에게 넘겨라. 저 물건을 악으로 물들이겠다.”
“리치 한 마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포기해라!”
악마들은 마치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일종의 유혹과 비슷하지만 배승민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나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기억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기억을 떠올려도 그저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리치가 되며 모든 감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적의 기억은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허나,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하나의 의구심만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얼굴을 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유일하게 매몰 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배승민은 그 ‘무언가’를 영원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너희는 나를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쿵!
배승민이 손을 모았다.
자신에게 신성의 축복을 걸었다.
샤라라라~
어디선가 늘려오는 노랫소리. 상급의 악마들은 홀린 듯 초점을 흐릿하게 하고 침을 흘렸다.
이윽고 배승민의 머리 위로 빛이 태어났다. 빛은 둥근 원반모양으로 뭉치더니 마치 알처럼 배승민을 둘러쌌다.
성자의 힘이다.
스으으으윽.
파아아아악!
이윽고 빛의 입자가 가열되는 것처럼 보이더니 그대로 터져나갔다.
그 반경이 넓진 않았지만, 안에 있던 악마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스으으으읍!
배승민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악마의 재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악마의 기억. 누군가를 죽이고 싸운다. 그들은 그저 악하기에 악마다.’
배승민은 빛과 어둠으로부터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는 언데드였다.
그리고 지금 악마의 재를 흡입하여 그들의 기억과 힘을 얻었다.
비록 결정화를 먹는 것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로군.”
배승민이 원하는 기억과 힘은 아니다.
‘더 많은 악을 탐하면 알 수 있을까.’
주문이라도 걸린 듯이 움직이며 배승민이 악마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털썩!
백작 아르공이 쓰러졌다.
전신이 꽁꽁 얼은 채 그 안에서 재가 되어갔다.
<‘백작 아르공’을 처치했습니다.>
<‘바람의 결정화’를 획득했습니다.>
다섯 번 연속.
귀족을 죽이는 족족 결정화를 얻었다.
무영은 즉시 들어 결정화를 흡입했다.
그러자 전신이 꿈틀대며 다시금 변화를 맞이하였다.
<‘바람의 결정화’를 섭취했습니다.>
<순수 민첩이 20 상승합니다.>
<‘돌풍의 참혹함’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사용자의 축복으로 ‘돌풍의 참혹함’ 스킬의 랭크가 ‘B’로 격상합니다.>
이 또한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만 하긴 어려웠다.
쿵!
저 멀리서, 광음이 멎었다.
대족장과 바스트로의 싸움은 천지개벽이라 할 수준의 광경을 연출했으나 무영이 백작 아르공을 처리한 것처럼 승부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승자는 대족장이었다.
“바스트로. 하우레스의 종자야. 하우레스가 너를 지켜줄 것 같으냐?”
하우레스는 마신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분신이자 본체.
대족장이 그의 목을 쥐었다.
허나 바스트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분은 악 그 자체다. 너 따위가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야.”
“너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너를 기억한다. 하우레스의 딸과 결혼한 부마 바스트로.”
대족장의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상처.
불타르의 살아있는 전설이지만 그 상처만은 어쩐지 눈에 띄었다.
“나는 하우레스에게 붙잡힌 광대였다. 전신을 난도질당하고 개처럼 기었지. 놈을 따른 자신을 원망해라.”
바스트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기분나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대족장이 놈의 머리와 다리를 붙잡고 좌아악 찢어버렸다.
퍼억!
바스트로의 전신이 고무처럼 늘어나더니 이내 내장이 쏟아지며 절명했다.
잠시 후 조금씩 바닥에 널린 내장이 재가 되기 시작하였다.
“······.”
재가 되어가는 걸 확인한 대족장이 몸을 돌렸다.
그 역시 바스트로를 상대하며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귀 한 쪽이 잘려나갔고 얼굴의 오른쪽 광대가 보일 정도로 피부가 긁혔다.
그러나 대족장은 승리자였다.
“대족장께서 적의 대장을 죽였다!”
“바스트로가 죽었다!
대족장이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승리를 알리는 표시였다.
푸욱!
그 순간이었다.
대족장이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관통당한 가슴의 자상을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불타르의 덕목 아니었나? 광대 하르카여.”
바스트로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모습 또한 바뀌었다.
네 개의 다리, 여섯 개의 꼬리가 달린 거대한 괴이 생명체!
털은 없었다. 대신 불타르만큼 커다랬으며 전신은 검은불길로 뒤덮여있었다.
“내가 왜 부마로 선택받았을 거 같으냐? 마왕도 아닌 내가!”
수우욱.
바스트로의 꼬리가 대족장 하르카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네놈······.”
대족장 하르카의 눈빛이 일렁였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진 못했다.
쿵!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전장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무영조차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변한 바스트로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일곱 개의 본체가 바스라지자 나타난 저것이 진짜 본체였다.
일곱 개의 결이 모두 저 한 곳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다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았다.
무영은 법보 한 장을 꺼냈다.
쫘아악!
법보를 찢자 글귀가 떠올랐다.
<소드데빌 ‘검일’을 소환합니다.>
<레벨차이가 150이상 납니다. ‘민첩’ 순수능력치 15가 하락하고 B등급 이상의 장비 하나를 제물로 바칩니다.>
<‘미치광이 군주의 망토’가 증발했습니다.>
바스트로. 놈만 악마가 아니다.
검일 또한 악마로 거듭났다.
인류 10강 중 일인인 그가, 나타난 즉시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비탄을 뽑으며 짧게 말했다.
“네가 나서야겠다. 검일.”
< 31. 그레모리(1) > 끝
ⓒ
< 31. 그레모리(2) >
그 순간 검일의 검에 검은색 기운이 덧씌워졌다.
민첩이 깎이고 미치광이 군주의 세트효과인 모든 능력치 5를 상실했지만 검일의 활용도는 그 이상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바스트로.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대족장을 상회하고 있었다. 검일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녀석을 사냥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보상은 확실하다.
수만의 악마를 잡고 모든 귀족을 처치했으며 바스트로까지 끝장내는 일이다. 어중간한 보상일 리는 없었다.
“모두 죽여주마!”
바스트로는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모든 제약이 풀린 듯 적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마왕도 아닌 주제에 마신의 딸과 결혼한 부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완성되지 않은 힘.’
본체와 분신. 일곱 개가 모두 합쳐져 빚어낸 형상이지만 완성되지 않았다.
저 형태는 왜인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일곱 개의 결이 제대로 뭉치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저만한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왕과 마신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권능이었다.하지만 저 막무가내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다른 불타르들도 혼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가르는······.
굳어버린 석상처럼 우뚝 서있을 따름이다.
“내 상대는 저 괴물인가?”
검일이 검을 들어 바스트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반적인 언데드와 달리 ‘악마’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확실히 다른 언데드와는 차별되는 성향.
검이와 검삼이 차례대로 검일의 근처로 다가왔다.
이 세 명은 ‘검’이란 이름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세 명이 뭉치면 추가효과를 받는다.
세 개의 검이 공명하며 삼각형 모양으로 흩어졌다.
그 선두에 검일이 서서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이 느즈막하게 말했다.
“다른 검골과 함께 협력하여 죽여라.”
“알겠다. ‘검의 원류’가 아니면 나는 지지 않는다.”
검의 원류······ 아마도 킹슬레이어를 말하는 것일 테다.
검일은 악마가 되었지만 킹슬레이어의 싸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처참하게 패했는지도.
그것은, 싸움이라 칭하기에도 아까운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검일은 킹슬레이어를 ‘검의 원류’로 취급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킹슬레이어가 워낙 변칙적인 존재라 그런 것이다. 이면의 주인들. 잘은 모르지만 대마법사 멀린조차 그들을 치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런 변칙적인 존재만 아니라면 검일은 쉬이 당하지 않는다.
인류 10강이라 함은 마왕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인류 10강 수준의 강자들은 꽤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마왕을 상대할 순 없다.’
마왕. 권능의 종식자.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강’의 칭호가 붙는다.
지금은 그 의미가 살짝 변색되어 ‘가장 강한 10인’이라 불리지만, 사실 그 원류는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10인의 영웅’을 기리는 말이었다.
어쨌거나 그만큼 권능을 파헤치는데 도가 텄다는 말.
바로 순수다.
10강의 인원은 모두가 순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강해진 자들이다.
의미가 변색되었다 한들 그 최저한의 기준을 통과한 자만이 10강이라 불린다.
‘권능을 파헤치는 진짜 힘은 순수에 기반을 두지.’
그리고 검일은 오로지 ‘검’만을 갈고닦으며 강해졌다.
때문에 바스트로의 상대에도 제격이었다.
대족장이 쓰려졌다면, 사실상 바스트로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검일뿐이다.
그러나 무영도 놀고 있을 작정은 아니었다.
“배승민.”
스아악.
바닥에 검은 원이 생기며 그 아래에서 배승민이 솟아나왔다.
악마의 심장을 손에 쥐고 있던 배승민이 그것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내게 성자의 축복을 걸어라.”
“몸을 해칠 겁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성자의 축복은 강력한 빛계열의 스킬이다. 반면 무영은 어둠의 힘을 타고났다. 움과 아수라, 비탄의 그레모리······ 빛을 연상케 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축복을 받을 경우 그 반발력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전황이 다시 뒤집혔다.
대족장의 죽음은 모든 불타르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탓이다.
이대로 다시 바람을 꺾지 않는다면 패배는 물 보듯 뻔한 일.
검일이 바스트로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아군들이 우후죽순 죽어나갈 터였으니.
무영은 재차 말했다.
“10분이면 족하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배승민이 눈을 감았다.
다른 언데드라면 주저 없이 행했겠지만 배승민은 ‘죽음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리치.
예컨대 영토수호자 발탄의 경우 그 속내가 인간을 지키는 것에 있듯이, 다른 언데드와 달리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무영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도 이 ‘특수성’ 때문일지 몰랐다.
잠시 후 눈을 뜬 배승민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습니다.”
동시에 무영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배승민의 손에서 빛의 문장이 새겨지며 축복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화아악!
<‘성자의 축복’이 깃들었습니다.>
<악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비탄의 검격이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악마를 대상으로 하는 비탄의 공격이 더욱 강화됩니다.>
<10분간 모든 능력치가 30씩 상승합니다.>
<축복이 끝나면 모든 능력치가 24시간 동안 30씩 하락합니다.>
10분이면 충분하다.
무영의 10분은 남들보다 더욱 길다.
검골 삼형제가 떠난 지 얼마 안 돼 무영도 움직였다.
뿔이 솟아나고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오가르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대족장. 그가 쓰러졌다.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불타르들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오가르에게 있어선 우상의 대상.
오가르가 오가르로 있을 수 있던 건 모두 대족장 덕이었다.
‘아······.’
보통의 불타르는 딱딱하다.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고 지금의 상황에 만족해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반면 오가르는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크게 웃고 만다.
그 성정이 갑자기 생성될 리 없었다.
대족장의 아래에서 자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유에 대해 가르치며 책임과 의무 또한 강조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누차 강조했고 힘에 취한 뒤 오만해지는 일에 대해 경계하라 일렀다.
좋은 아버지이자 엄격한 스승의 역할을 동시에 했던 것이다.
헌데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줄 알았던 그가 지금 바닥에 누여있다.
세상이 멈추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극 따위에 멈출 셈인가? 그렇다면 실망이군.”
무영이 말했다.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멈추고 싶은데 멈추지 말라 한다.
이후 무영이 보인 전장에서의 활약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악마병들의 시선을 받으며, 전장의 중심으로 날아들었다.
빛의 축복과 함께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평소의 무영답지 않지만 오가르는 그것이 ‘보여주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그렇다.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타르들에게, 오가르에게.
굳이 저런 요란을 떨 필요가 없음에도.
“움께서 전장을 지배하신다!”
“악마 따위에 굴하지 마라! 우리에겐 더 위대한 움과 훔이 있으니!”
“아움! 아훔!”
“영주님을 구해야한다!”
“전장의 한복판에······ 젠장, 가자!”
작은 생물체들이 법석을 떨어댔다.
무영은 자신을 미끼삼아 다시 바람을 꺾어보고자 하였다.
역풍이 될지 순풍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저 작은 생명체들에겐 강렬한 태풍으로 작용한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내가 움직여야 한다.’
대족장이 쓰러졌다.
남은 건 소족장인 오가르뿐이었다.
오가르가 멍청히 있다면 다른 불타르들도 구실을 잃고 만다.
작은 생명체들이 저리 노력하는데, 불타르가 방관하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부턴 내가 대족장이다.’
대족장의 부재를 확인한 지금 오가르는 그 자리에 빨리 올라야 했다.
그래서 혼란을 없애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대족장은 언제나 바랐다.
대족장이 오가르를 이처럼 자유로운 사고로 키운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불타르의 부족이 아닌 불타르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는 그 바람에 따라 움직일 차례였다.
검일의 검은 공간을 가둔다.
검일의 검은 법칙을 지배한다.
혼돈 그 자체인 바스트로에겐 천적과도 같았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어중간한 놈! 네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더냐?”
“싸움에 진 개가 시끄러운 법이지.”
바스트로에게 달린 여섯 개의 꼬리가 공간을 휘저었다.
하지만 검일의 검술은 그 꼬리의 공격마저 무산시켜버렸다.
궁극엔 달하지 못했으나 한없이 순수한 검일의 검술은 꼬리에 담긴 권능을 베어버린 것이다.
우뚝 솟은 거대한 산처럼 검일은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바스트로는 조급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검일이 지배하는 공간에 갇힌 것이다.
마치 거미줄처럼 엮어진 이 공간에서 허우적대는 게 최선이었다.
“언제까지 나를 가둬둘 수 있을 것 같은가!”
여섯 개의 꼬리가 일자로 섰다.
쿵!
기둥처럼 땅에 박혀선 검은 연기를 마구 피워냈다.
이윽고 꼬리에서 원형의 물체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쾅! 콰콰콰콰쾅!
원형의 물체에 닿은 모든 게 폭발했다.
그리고 폭발의 여파 뒤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무언가가 베어 문 것 마냥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 영향으로 검일은 잠시 흔들렸다. 검이와 검삼이 만들어놓은 진이 깨졌다.
“너는 원류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완성되지 못한 불안전한 존재다.
원류조차 아닌 것이 그 흉내를 낸다고 순수를 당할 순 없었다.
물론 검일도 그 수준에 이르진 못했지만, 원류조차 아닌 것에 지진 않을 것이었다.
괜히 그가 인류 10강이라 불렸겠는가.
검일이 기운을 정비하며 검을 들었다.
동시에 꼬리에서 날아온 구가 검과 부딪혔다.
꽝!
오가르의 각성을 시작으로 전장이 다시 뒤집혔다.
정말 각성이라고밖엔 부를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멈춰섰냐는 듯 누구보다 빠르게 발을 놀렸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죽였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다.
악마병들이 제압된 순간 바스트로와 검일의 싸움도 끝을 맞이했다.
촤아아악!
검일의 검이 바스트로의 몸통을 썰었다.
여섯 개의 꼬리는 이미 잘려있었다.
싸움의 격렬함을 말해주듯 주변 땅이 남아난 곳이 없었다.
짙은 연기만이 자욱했고 그 속에서 둘은 미친 듯이 치고받았다.
카아아아아악!
오금을 울리는 비명소리.
전투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바스트로는 이내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일은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고 날개가 찢어진 채 무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없어진 다리 대신 검을 지팡이 삼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계약은 이행했다.”
처음과 같이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
그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검이와 검삼, 그리고 검일의 형체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내 다시 법보의 형태로 돌아갔다.
계약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바스트로를 죽이는 것이었고 그를 이행했으니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망가진 신체를 수복하려거든 법보의 형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팅!
데구르르르······.
검일이 사라지자 바닥에 검은색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스트로의 결정화.’
이로써 여섯개 째.
모든 귀족의 악마가 결정화를 내뱉었다.
마치 무언가의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 31. 그레모리(2) > 끝
ⓒ
< 31. 그레모리(3) >
결정화를 연속해서 귀족의 악마들이 뱉어낼 확률은 얼마나 될까?
확언하건데 지극히 적을 것이다. 그야말로 수천 만분의 일의 확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고 무영의 손엔 또 다른 결정화가 쥐어져 있었다.
<공작 ‘바스트로’를 퇴치했습니다.>
<‘검은 혼의 결정화’를 획득했습니다.>
<‘어둠과 심연’ 칭호를 빼앗아왔습니다.>
<칭호를 적용하시겠습니까? 악마에게서 빼앗은 칭호는 두 개 이상 중첩하여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승효과인 ‘악마사냥꾼’이 A랭크가 되고나서 생긴 부가적인 효과.
바로 상대 귀족악마를 없애고 그 칭호를 빼앗아오는 것이었다.
무영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무영의 휘하 언데드가 죽이면 같은 효과가 적용되는 듯싶었다.
‘적용하겠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이어 무영의 주변으로 회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어둠과 심연’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모든 능력치+10, ‘악성향’ 능력치가 개발되었습니다.>
<개발된 능력치는 칭호의 착용을 해제해도 계속해서 지속됩니다.>
<악성향이 높을수록 더욱 악에 가까워집니다.>
<칭호의 효과로 인해 어둠에 속한 이들은 친근함을, 반대로 빛에 속한 이들은 경계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악성향 능력치라······.
무영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으하하하하! 악마들 따윈 다신 얼씬도 거리지 마라!”
“이 승리를 움에게!”
도깨비들은 신이 났다.
서한을 필두로 무기를 든 채 승리를 맛보는 중이었다.
그렇다.
승리.
모든 악마병을 제압하고 이긴 것이다.
피해는 컸지만 당장은 승리의 달콤함이 더욱 컸다.
하지만 모두가 승리의 달콤함을 맛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불타르들. 특히 오가르는 이겼음에도 표정이 펴질 줄 몰랐다.
그는 대족장의 앞에서 묵념한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대족장이 죽었군.’
바스트로에게 결정타를 맞고 결국 살아나지 못한 듯싶었다.
그 천하의 오가르조차 침묵할 정도라니.
무영은 대족장과 접점이 별로 없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는 슬픔이 무엇인지도 사실 잘 모른다.
그래서 오가르의 슬픔에 동조해줄 수 없었다. 감정이입조차 불가했다.
하지만 오가르는 마계에서 생자 중 무영과 가장 가까운 이였다.
하여 무영은 제안했다.
“내겐 죽은자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언데드로······ 말이냐?”
오가르가 반응했다.
무영이 긍정하자 오가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영. 부디 농담이길 바란다. 대족장께서도, 이곳에서 죽은 모든 불타르들도 언데드로 살아나길 바라진 않을 테니.”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낸 게 무영이 아니었다면 당장 창으로 찔려 죽였을 기세다.
‘슬픔이라.’
무영은 한쪽에서 악마병을 우적우적 씹고 있는 킹뮤턴트를 바라봤다.
킹뮤턴트의 주재료는 살수들이다.
웡 청린에 의해 키워진, 살수림의 살수들.
과거 그들은 무영의 동료였다. 그래서 복수자들로 되살려냈다. 그 사이에는 어떠한 슬픔도 아련함도 없었다.
그토록 가까운 자라면 다시 살려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게 언데드일지라도 말이다.
허나 무영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상식이나 관념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40년을 꼭두각시로 살아왔는데 평범할 리가.
‘생자와 죽은자의 중심에 선다. 어렵겠지만 이 또한 성장의 디딤돌이 될 터.’
그러니 어그러진 균형감각을 키워야 했다. 그 균형만 맞출 수 있다면 더욱 ‘절대자’에 가까워질 것이다.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전투에서 가장 큰 공적을 차지했습니다.>
<히스토리에 ‘악마 공작과의 사투’가 추가되었습니다.>
<추산결과 ‘불가능’ 판정을 내립니다.>
<한계를 벗어나 시련을 돌파한 자여! 그대의 무용에 이면의 주인들이 매우 만족해합니다.>
<이면의 주인들이 심사를 시작합니다.>
이윽고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판과 같은 글귀가 떠올랐다.
무영은 가만히 그 글귀에 집중했다.
불가능 업적.
현재 무영의 기준으로 도달하기 ‘불가’하단 판정이 내려지면 얻을 수 있는 업적이다.
그리고 공작을 비롯한 여섯 악마들과의 싸움은 무영이 해나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족장과 불타르들의 도움이 있었대도 마찬가지다.
전투 도중 몇 번이나 상황이 역전되지 않았던가.
<‘12궁도의 별’이 사용자를 선택했습니다.>
<‘황소자리 투구’를 선물했습니다.>
<‘쌍둥이의 망토’를 선물했습니다.
업적이 업적이라 그런지 저번과는 달리 두 개를 동시에 선물로 내렸다.
무영은 고개를 주억이며 허공에 생성 된 두 가지를 바라봤다.
명칭: 황소자리 투구
등급: A+++
분류: 장착형
내구: 100,000
효과: 12궁도의 별 중 하나. 황소자리에 놓인 투구.
* 마법저항+100
* 황소의 온후함(풍요의 상징. 사용자의 영역에 대한 성장률이 크게 오른다.)
* 빠른 돌진 가능
** 12궁도의 별 중 3개를 모을 시 모든 능력치+30
** 12궁도의 별 중 6개를 모을 시 A랭크 이하 스킬 무시
** 12궁도의 별 중 12개를 모을 시 ‘12궁도의 왕’ 전승
가장 먼저 황소자리 투구.
양자리 허리띠에 이은 두 번째 세트무구였다.
게다가 황소자리 투구는 영역장비였다.
소유한 영역에 좋은 혜택을 주는 이런 무구는, 보통 길드나 세가의 주인들이 착용하기 마련이었고 그 정도로 드물었다.
‘아주 좋군.’
안 그래도 이번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 시간을 대폭 줄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영역무구다.
다음으로 망토를 바라봤다.
명칭: 쌍둥이의 망토
등급: A+++
분류: 장착형
내구: 80,000
효과: 12궁도의 별 중 하나. 쌍둥이자리에 놓인 망토.
* 민첩+50
* 두개의 항체(독과 병에 대한 면역)
* 둘의 성장(한 명을 지정해 성장률을 크게 높인다.)
*** 12궁도의 별 중 3개를 모을 시 모든 능력치+30
** 12궁도의 별 중 6개를 모을 시 A랭크 이하 스킬 무시
** 12궁도의 별 중 12개를 모을 시 ‘12궁도의 왕’ 전승
독과 병에 대한 면역효과!
혹시 모를 저주에 대비하긴 안성맞춤이었다.
이로써 3개의 세트무구가 모여 추가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미치광이 군주 세트 중 하나를 잃었대도 훨씬 좋은 효과였다.
하나를 잃고 두 개를 얻었다.
‘이제 남은 건······.’
무영은 손에 쥔 결정을 바라봤다.
악마의 힘이 한데 뭉쳐 결정화가 된 것.
공작 바스트로의 결정화라면, 무영이 본 그 힘이라면 누구라도 탐할 수준이었다.
무영은 승리의 여운을 맛보기전에 먼저 구슬을 꿀꺽 삼켰다.
부르르르!
동시에 전신이 미친 듯이 떨려댔다.
전신에서 핏줄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몸이 떠올랐다.
“크아아아악!”
<‘검은 혼의 결정화’를 삼켰습니다.>
<모든 순수능력치가 15씩 상승합니다.>
<‘혼의 꼬리’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악마의 결정화를 과도하게 섭취했습니다.>
<악성향이 300 상승합니다.>
<‘악마의 부름’이 반응합니다.>
이어서 무영의 품에서 까만색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지하투기장에서 얻은 물건.
중급악마가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것!
고위 악마의 힘이 있어야만 비밀을 풀 수 있는 책이, 지금 무영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레모리’와 연결되었습니다.>
*
거대한 사원.
한 여인이 호수의 중심부에 떠올라 있었다.
살랑이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극한의 미(美)를 자랑하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건 그녀를 본다면 첫눈에 반하리라.
신조차 아우를 그런 외모이건만, 지금은 왜인지 얼굴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우리와 뜻을 함께하던 ‘바퓰라’의 소멸이 확인되었습니다.”
호수 주변을 둘러싼 수백만의 악마가 요동쳤다.
그녀를 따르는 26명의 마왕들도 마찬가지였다.
“60좌의 바퓰라님 말씀이십니까?”
“오, 세상에······.”
“붉은 달이 떠있는데도 찬성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마신이 소멸됐다.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바퓰라라면 그녀, 그레모리와 함께 반대파의 선두에 있던 자였다.
마계의 악마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는 계획.
더불어 한 행성의 인과율을 뒤집고 박살내는 일.
그를 가지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퓰라는 비록 전투적인 마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신이다. 마신의 힘은 단순한 계산이 통용되지 않는다.
허나 소멸은 확실했다.
그레모리의 눈이 잘게 떨렸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간 이 사원의 결계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겠지요. 우리는 힘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차라리 중도파와 손을 잡는 게 어떠실는지요?”
“단탈리온이 그들과 함께하는 한 그런 일을 벌일 순 없습니다. 그 거짓의 귀재······ 뒤에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작자가 함께했다간 일을 크게 그르칠 수 있으니 말이에요.”
26명의 마왕들은 동시에 수긍했다.
단탈리온. 거짓의 귀재. 중도파는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절대로 힙을 합쳐서는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자다.
그레모리가 입술을 깨물며 이어서 말했다.
“무너진 균열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반대파가 힘을 합치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가능하겠습니까? 찬성파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 잘못했다간 위치가 그대로 발각······.”
“그대들이 힘을 써줘야겠습니다. 균열의 파편을 모아야 합니다.”
그레모리가 한 마왕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선택의 기로. 붉은 달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고 움직일 계획이다.
현재 반대파는 모두가 흩어져 있었다.
본래 마신은 자신만의 고유영역을 가지기 마련이고,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한다.
단 하나. 제 1좌의 마신인 바알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고유영역이 있기에 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유영역을 벗어나 힘을 발휘하려면 다른 조치가 필요한데 바로 균열을 틀어서 외부의 공간을 연결시켜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알이 이 균열을 흔들어 혼돈하게 만들어버렸다.
반대파와 연결되어있던 균열이 틀어지며 그들은 각기전투를 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이 균열을 다시 바로잡으려거든 흩어진 ‘균열의 파편’이 필요했다.
그리고 파편은 외부로 나가야만 구할 수 있었다.
마왕들이 이 영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위치가 발각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힘의 결집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건 어쩔 수 없어.’
반대파는 현재 궁지에 몰려있었다.
모여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모두 흩어진 이상에야 달리 방도가 없다.
이대로는 각개전투를 하다가 패배하거나, 다른 마신에게 흡수 될 것이다.
바알의 방해만 없었다면 해볼 만한 일이건만. 마신의 대표격인 1좌의 위신에 안 맞게 수작을 부렸다.
그레모리는 아미를 찌푸렸다.
동시에 그녀의 이마에서 거대한 산양의 뿔이 돋아났다.
뿔은 그레모리가 가진 힘의 상징이자 일종의 탐색기였다.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거나 모든 삼라만상을 읽어 들일 수 있는 탐색기.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 문을 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뿔을 전개함과 동시에 그레모리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 당신은 누군가요?”
< 31. 그레모리(3) > 끝
ⓒ
< 31. 그레모리(完) >
“······당신은 누군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영의 귓가를 간질였다.
단순한 ‘소리’에 불과한대도 이성을 잡아끄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현재 무영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저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심상세계.’
검은 공간이 무영의 심상이다.
한 마디로 이 대화는 텔레파시와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 심상의 세계로 자신이 오게 된 것인지를 따지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부름.
특정 악마와 연결되어 연락을 할 수 있는 책이었단 말인가?
‘그레모리.’
곧 무영은 자신과 연결된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분명히 ‘그레모리와 연결됐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26개의 마왕군단을 이끄는 56좌의 마신!
그저 목소리만 가지고 무영의 이성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 리 만무했다.
또한 무영은 그녀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27군단의 마왕’이 될 수 있는 자격과 무기 비탄이 모두 그레모리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연락이 닿을 줄은 몰랐다.
“나는 무영이다. 너는 정말 그레모리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딱딱 그 자체라도 무영조차 조금은 당황하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보상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레모리와 연결된 것이니······.
그레모리가 잠시의 시간을 두고 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보이진 않지만, 당신에게서 저의 축복이 느껴집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푸른사원에서 다윗의 별을 발견한 순간부터 무영의 노선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
그 다윗의 별의 주인이 바로 그레모리다. 축복이라 느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릉!
무영이 비탄을 뽑았다.
그러자 검이 더욱 우렁차게 울어대며 스스로의 존재를 알렸다.
“내가 27군단을 이끌 마왕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군.”
“27군단······? 아!”
그레모리의 놀란 목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그녀는 마신이고 말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좌아아악!
곧 검은 공간이 찢어졌다.
마치 가죽이 찢기는 소리를 내면서 여러 개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레모리의 심상이 무영의 심상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대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가 수없이 떨어져 있음에도 그저 말 몇 마디 나눈 걸로 심상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빠르다.
곧이어 수많은 손이 무영을 감쌌다.
꽝!
그러나 손들은 무영에게 닿지 못했다.
빛의 장막이 세워지며 수많은 손을 튕겨낸 것이다.
뾰롱!
아름과 요람의 정령이 무영의 머리 위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겉모습은 빛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 역시 고대의 정령이다. 이제 막 태어났음에도 뒤섞인 공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위대한 존재.
왜 이곳에 함께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상 속에선 원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짓이지?”
“태고의 정령······ 과 계약을 했군요.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확인해야 합니다. 당신이 정말 제가 기다리던 이가 맞는지.”
그레모리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영은 새삼 놀라고 말았다.
‘마신이 사과라니.’
생전에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인류를 침범한 마신은 그저 악의 결정체였고 그들은 아무말 없이 침략을 행할 뿐이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엔 파멸만이 남았다.
사과?
그 비슷한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헌데 56좌의 마신에게 직접 미안하단 말을 들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심상을 침범한 건 엄연한 사실.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27군단의 마왕이 되겠다면, 부탁하건대 제 손길을 마다하지 마세요.”
무영은 고민했다.
그레모리쯤 되는 마신이 매달리듯 일을 부탁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고심해보았다.
하고자 하면 그냥 행하면 되는 것 아닌지.
무영은 빛의 장막 건너편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손들을 바라봤다.
‘유일한 여성의 상이라고 했는데 괴물이었나 보군.’
72명의 마신 중 유일한 여성이며 인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미모는 모든 신을 홀릴 정도라고 하였으나, 저 수많은 손을 ‘제 손길’이라 표현한 걸 보면 역시 소문이 과장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아무리 아름과 요람의 정령이 막아서고 있대도 그레모리가 본심을 발휘하면 그조차 여의치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거쳐야하는 확인절차라면······.’
27군단의 마왕 스킬로 말미암아 한 번쯤은 거쳐야하는 검증과정.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던가?
뾰롱! 뾰롱!
무영은 아직도 머리 위에서 성을 내고 있는 아름과 요람의 정령을 진정시켰다.
손을 가져가 대충 쓰다듬자 길길이 날뛰던 녀석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스스슥.
곧 수많은 손들이 무영을 감쌌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손길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저 스치는 것뿐임에도 정신이 흔들릴 정도였다.
무영에게 이만한 영향을 끼칠 수준이라면, 다른 이들은 안 봐도 뻔하다.
‘마성. 하지만 그레모리는 인간이 아니다.’
무영의 머릿속에서 그레모리는 이미 인간을 한참 벗어난 외형을 갖고 있었다. 수많은 손이 달린 괴물인 점을 상기하자 조금은 마성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 후 확인절차를 끝냈는지 손들이 멀어져갔다.
“정말 저의 축복자가 맞군요.”
“거짓인 줄 알았나?”
“솔직히 그랬습니다. 하지만 아닌 걸 확인했으니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마신은 ‘악’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악에서 태어나, 악을 먹고 자란 악의 화신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레모리가 전해주는 느낌은 분명히 달랐다.
“특이한 마신이로군.”
“저는 저의 ‘악’을 숨겨두고 있을 뿐이에요. 제 실체는 누구보다 악하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얘기할 건 보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전할 이야기가 있는 듯싶었다.
무영은 잠자코 들었다.
그러자 그레모리가 이어서 말했다.
“균열의 파편이란 물건을 아십니까?”
“들어본 적 있다.”
과거 마신들이 침략할 때 사용한 물건이 그것이었다.
느닷없이 하늘에 균열이 생기며 대도시와 푸른사원을 공격했던 일은 아직도 머리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때 사용한 물건이 바로 균열의 파편이었다.
“부디 균열의 파편을 찾아주세요. 지금 그대가 들고 있는 ‘비탄’이 길을 알려줄 거예요.”
“비탄이?”
“예. 그리고 이 공간이라면 거리가 떨어져있어도 파편을 제게 보낼 수 있습니다. 세 개의 파편을 찾아준다면 그대를 제 마왕으로 인정할게요. 직접 권능을 내려드리지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앞의 손들도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그것을 그레모리도 깨달았는지 다급히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대가 인류를 지킬 생각이라면, 부디 저를 도와주시길. 바알의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게 놔둘 순······.”
뚝!
곧 정적이 찾아들었다.
전원을 끊어버린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
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전해 들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나보군.’
그레모리의 말을 곱씹으며 상황을 그려봤다.
휘하 마왕군단을 움직이면 무엇이든 찾고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처음 보는 무영에게 ‘부탁’하며 일을 진행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레모리가 궁지에 몰려있음을 뜻하였다.
‘마신들이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예상이 맞았다.’
무영은 확신했다.
마신들은 현재 그들만의 사정 때문에 쉽사리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개, 혹은 몇 개의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앞으로 몇 년은 이어질 것이고, 몇 년 안에 결판이 난다.
그리고 그레모리가 포함 된 파벌은 패배한다.
‘대혼돈이 일어나는 원인이 될 테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의 틈바구니에 들어가 시간을 끌거나 정적을 제거할.
그러기 위해선 그 균열의 파편이라는 물건을 반드시 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레모리의 파벌이 쉽게 패배하게 둬선 안 된다.
이러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무영이었다.
뾰롱. 뾰로롱.
무영은 아름과 요람의 정령을 살살 간질였다.
단순한 고대의 정령이 아니라, 그레모리는 ‘태고의 정령’이란 표현을 썼다.
동시에 놀라며 무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덕분에 대화를 부드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레모리는 무영이 원래 인간이었던 것도 한 번에 알아냈다.
인간임을 알았는데도 마왕의 자격을 갖춘 걸 인정한 것이다.
가장 큰 고비가 그 부분이었는데 잘 넘어갔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만 한다.’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는 달려 나갈 차례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남은 시간은 길어야 9년.
그 안에 마신들의 판도자체를 바꾸거나 깨버려야 했다.
휘이이잉.
머지않아 바람소리와 함께 심상세계가 닫히며 무영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레모리가 감았던 눈을 떴다.
사슴과 같이 아름다운 눈썹이 잘게 떨리며 올라갔다.
그 광경을 수많은 악마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닿는 건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금기다.
‘파편을 흡수한 자들을 상대하는 일. 분명 잔혹한 시련이 되겠지요.’
확인한 바로는 무영의 실력이 만족할 수준에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무영이 품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그레모리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 존재들이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왕과 비슷하거나 혹은 마왕보다 위에 있는 ‘격’이 몇 개나 느껴진 탓이다.
즉, 무한한 성장가능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무영. 나의 축복자여.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그레모리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하지만 소리 없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신에게 기도하며 소망하지만, 정작 신들은 누구에게 원하며 갈구한단 말인가.
그 애처로운 모습에 주변 모든 악마들의 가슴이 뛰었다.
반드시 지켜야할 분이라고.
수백, 수천만의 악마 모두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레모리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
전쟁은 대승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이면엔 수많은 시체가 남았다.
“품의 나무 근처에 안치하는 걸 허락하마.”
오가르가 말했다.
품의 나무 근처에 묻히는 건 진정한 전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다.
그 특혜를 이번 전쟁에 참여한 모두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대족장이 묻혔고, 그 뒤를 다른 이들이 따랐다.
“무영. 왕이란 무엇이냐?”
늦은 저녁.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오가르가 불현 듯 말을 걸었다.
무영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가르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이.
“나는 불타르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대족장께선 항상 더욱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고 내게 가르치셨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가르는 충분히 그런 자질을 지녔다.
왕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왕이 되고 나서 생각해봐도 충분하다.
오가르가 무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곤 말했다.
“나와 형제의 잔을 나누지 않겠느냐?”
형제의 잔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가르와 친분을 맺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가르가 크게 웃었다.
“하하! 좋다. 앞으로 무영 너와 나는 피보다 더욱 진한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형제란 무릇 서로를 도와야 함이지. 위치가 달라지더라도 이 연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혈육보다 가까웠던 대족장이 죽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더욱 감성적이었다.
오가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술통의 뚜껑을 열고 귤을 짜내듯 피를 쏟았다.
무영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제부터 우린 형제다.”
술통을 나누고 한번에 들이켰다.
그러자 오가르는 간에 기별도 안간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술통이라 해봤자 오가르의 덩치에 비하면 얼마 안 됐던 탓이다.
무영은 피식 웃었다.
새로운 인연. 형제라.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 31. 그레모리(完) > 끝
ⓒ
< 32. 지옥마(1) >
붉은 밤은 여전히 하늘 위를 석권하고 있었다.
핏빛과 같은 선명한 색. 그리고 그 향기마저 뿜어내는 듯했다.
무영은 드워프들로 말미암아 성을 재건하고, 다음 악마들을 기다렸다.
‘운이 좋았다.’
바스트로의 경우는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다짜고짜 무영을 공격하지 않아서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운이 좋을 수는 없었다.
“혼의 꼬리.”
다만, 무영은 바스트로를 퇴치하며 큰 성장을 이뤘다.
몇 개의 스킬과 본인의 능력치 자체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상급악마 하나, 둘 정도로는 무영을 어찌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바스트로의 권능이었던 분신술 비슷한 것.
그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혼의 꼬리는 무영과 똑같은 분신을 하나 만들어냈다.
바스트로처럼 여섯 체를 만들어 조정하진 못하지만 그 분신은 무영의 힘을 절반가량 담아내고 있었다.
‘B랭크로도 어림없군. 아니면 다른 부족한 게 있는 건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후 스킬에 대한 설명을 되새겨보았다.
명칭: 혼의 꼬리
등급: B
효과: 사용자와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낸다. 분신은 조건에 따라 사용자의 힘을 담아낼 수 있다.
* 하나의 분신만 소환 가능
* 사용자를 63% 흉내 냄
* 지속시간은 사용자의 지혜와 지능에 비례(현재 7,850초)
** S랭크에 도달 시 ‘혼의 꼬리’가 ‘혼의 재활’로 진화한다.
** 능력발휘에 대한 특수조건이 이뤄지지 않음
S랭크와 특수조건.
두 가지 모두 요원한 일이었다.
현재 무영이 가진 스킬 중 제일 랭크가 높은 건 ‘소드마스터’로 A등급이었다. A와 S의 간극은 고작 한 단계라 치부할 수 없었으니 특수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골몰하는 편이 빠를 듯싶었다.
“잡종이 따로 없군. 네놈에게선 참 여러 가지 냄새가 나는구나.”
기사계급의 악마 한 명이 이죽거렸다.
바스트로가 죽은 이후 7일에 한 번 꼴로 이처럼 악마가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상급 이하였지만, 간혹 이처럼 준남작이나 남작위에 해당하는 귀족악마가 홀로 돌아다녔다.
무영은 굳이 그런 악마들을 일일이 찾아가 사냥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욱 맛있어 보인다. 마치 우리들의 진미가 되고자 몸을 변형시킨 것 같군.”
악마가 입맛을 다셨다.
순혈보단 잡종이 더욱 맛에 좋은 법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모양새였다.
피이잉!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오며 악마가 땅을 박찼다.
그러나 무영은 팔짱을 낀 채 이 싸움을 분신에게 양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입고 있는 무장마저 같았지만 저 모든 성능의 합이 무영의 본신에 비하면 63%뿐이 되지 않는다.
‘평범한 스킬은 아니지.’
S랭크의 무구마저 그대로 가져올 수준이다. 성능에 차이와 지속시간이 있다지만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크릿 클래스의 주력스킬은 되어야 일으킬 수 있는 기적과도 같았다. 그만큼 권능의 스킬화가 평범함을 넘어섰다는 것이겠지만······.
“흐흐! 생쥐처럼 숨어만 있구나. 기다려라. 네 목덜미에 곧 내 이빨이 박힐 터이니!”
준남작. 기사로 분류되는 악마라서 그런지 머리는 좀 부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임은 발군이었다.
비탄을 든 분신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밀리지도 않았다.
63%라고 하더라도, 그 수준이 거의 바스트로와 싸우기 전 무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무영은 분신을 조정하며 상태창 시계를 돌려보았다.
칭호->
어둠과 심연(모든 능력치+10)
전승효과->
아홉 개의 전승효과가 있습니다.
직업효과->
데스로드(Lord class, 죽음의 지배자)
킹슬레이어(Lord class, 왕 살해자)
능력치->
힘 372(229+143) 민첩 393(215+178)
체력 350(191+159) 지능 357(223+134)
지혜 328(224+104) 투기 291(152+139)
마법저항 429(90+339) 망혼력 259(120+139)
악성향 389(300+89)
종합레벨 : 355
특이사항 : 투기에 눈을 떴습니다. 3차 각성을 완료했습니다. 삼화취정, 오기조원을 이뤄 순수를 깨달았습니다. 악성향이 매우 높습니다.
[전후비교]
힘 305 민첩 242 체력 276 지능 266 지혜 247
투기 212 마법저항 300 망혼력 200
->
힘 372 민첩 393 체력 350 지능 357 지혜 328
투기 291 마법저항 429 망혼력 259 악성향 389
칭호의 자잘한 변화가 있었지만, 능력치 부분은 ‘변혁’이라 부를 수준으로 차이가 컸다. 그중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게 민첩과 마법저항 부분이었다.
검일을 소환하며 민첩을 잃었대도, 오히려 그게 전화위복이 된 듯이 더욱 많은 민첩 부분의 능력치를 끌어 모은 것이다. 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12궁도의 장비였다.
또한 종합레벨부분이 눈에 띄었다.
어느 기준을 넘으면 레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순수능력치와 보조능력치 등을 모두 더한 값.
‘최상급 괴물의 기준이 대략 300이지.’
355면 최상급 5단계의 분류 중 2단계 정도는 된다.
이는 지옥마와 악령포식자인 타칸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인류 10강은 아니어도 지금의 무영이면 인류 100강은 된다.
그야말로 10강의 다리부분까진 따라왔다는 뜻.
이 수치가 고작 1년만에 이뤄진 걸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미친 속도였다.
어느 집단에 들어가도 중진의 역을할 맡을 것이고, 중형 이상의 집단에선 주인행세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최상위 100명 안에 포함되었다는 건 그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수치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결을 보고, 가속을 사용하면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게 무영이었다.
그리고 종합레벨 500정도를 초월종의 기준으로 보는데, 암흑룡 바르사도 그 수준엔 한참 부족했다. 기껏해야 최상급 3.5단계 즈음.
어쨌거나, 무영은 잡념을 지웠다.
분신에게 변경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분신의 성장여부. 일단 싸움은 아니다.’
벌써 몇 차례나 분신으로만 싸움에 임했다.
그러나 분신의 상태는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고작 이따위 분신으론 시간 때우기밖에 안 되느니!”
‘성장에 기여하는 다른 특수조건이 있는 모양이군.’
“장난은 여기까지다! 크하하하! 공포에 떨어라!”
‘그러고 보니 바스트로의 분신은 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
“네놈의 내장을 뜯어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구나!”
“시끄럽다.”
“······!”
눈 깜빡할 사이였다.
어느덧 악마의 지척까지 다가간 무영이 발차기를 날렸다.
뻥-!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악마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한참이나 날아간 뒤에야 악마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블링크?”
악마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가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무영의 머리 위엔 세 개의 뿔이 솟아있었다.
그렇다. 단순히 내적인 변화만 생긴 게 아니다.
두 개에서 세 개로 뿔이 늘어나고, 느려진 세계를 더욱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3차 각성을 이룸과 동시에 배수 또한 늘어났다.
그 속도, 8배속.
대신 지속시간은 30초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400에 가까운 민첩을 8배로 돌리는 것이다. 단순계산으로 하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적어도 30초는 ‘초월종’에 근접하거나 도리어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악마의 날개마저 돋아났다.
악성향의 영향일까.
이제는 도깨비도, 악마라 부르기도 모호한 모습이었다.
준남작의 악마 따위가 반응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순간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인 블링크라고 착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약간 부담이 오는군.”
다시금 악마의 근처로 이동한 무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빨라진 대신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체력을 더 올려야겠어.’
체력은 몸의 내구와도 관련이 깊다. 지금 상태에서 30초 이상 무리하게 사용했다간 전신이 갈갈히 찢겨나갈 터.
빠앙-!
다시 한 번 악마가 땅을 굴렀다.
단칼에 끝낼 수도 있지만 몸의 한계치를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함이다.
쿨럭!
피를 토하며 일어난 악마가 당황하여 말했다.
“마, 마법을 쓰는 기색은 전혀 없었거늘!”
그러나 괜히 기사가 아니라는 듯 금방 냉정해지며 양 손을 모았다.
손에서 푸른색의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독의 안개였다.
땅이 녹고 주변공기가 순식간에 오염되었다.
감히 극독이라 칭할 만하다.
“묘한 수를 사용해도 소용없다. 이 독무는 닿는 모든 걸 녹이지! 블링크를 잘못 사용했다간 독무에 그대로······.”
파아아앙!
무영이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었다.
단지 그것뿐임에도 공기가 거세게 튕겼다.
태풍과도 같이 바람이 불며 독의 안개를 날려버렸다.
쌍둥이 망토의 효과로 독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지만 시야가 거슬렸던 탓이다.
악마가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네, 네놈이 마왕급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하, 하지만 너와 같은 마왕이 있단 말은!”
쩌저저적!
얼었다.
악마의 전신이 순식간에 냉동되었다.
무영이 손이 악마의 목을 틀어쥐었고 그 순간 전투는 끝난 것과 진배없었다.
팅!
떼구르르.
이윽고 재가 되어 흩날리는 악마의 중심에서 녹색 구슬이 떨어졌다.
무영은 고민 없이 그 구슬을 삼켰다.
<‘독의 결정화’를 삼켰습니다.>
<체력이 1 향상됩니다.>
<악성향이 2 증가합니다.>
<‘독무’ 스킬이 각인되었습니다.>
<‘독무’스킬이 사용자의 축복에 의해 'B‘랭크로 격상됩니다.>
결정화를 먹을수록 급이 낮은 것은 능력치 향상이 더욱 적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분신을 지웠다.
‘다른 조건을 찾아봐야겠군.’
혼의 꼬리에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으리라.
거의 최종점이라 할 수 있는 공작 바스트로의 권능을 보지 않았던가.
무영은 그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할 일이 더 있었다.
‘그 전에 지옥마와 대결을 펼친다.’
슬슬 시기가 됐다.
지옥마가 호숫가를 배회했다.
그 옆에 도도하게 유니콘이 얼굴이 치켜세우고 있었다.
본래는 공작 바스트로가 다루던 유니콘이다. 하지만 유니콘은 바스트로에 의해 정신조작을 당하고 있었고, 바스트로가 쓰러진 즉시 원래의 도도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지옥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은 것이다.
히히히히힝!
지옥마는 날개를 활짝 펼치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유니콘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둘은 전혀 반대 성향이 있었고, 유니콘은 정신조작의 휴유증으로 악마와 관계 된 모든 걸 경계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지 못해서다.
힘이 얼추 회복되면 떠날 것을 알기에, 지옥마도 더욱 필사적이었다.
히히히히힝!
지옥마는 평생을 킹슬레이어의 밑에 있었다.
당연히 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우렁차게 목청을 울리며 등을 비비거나 몰래 꼬리를 쳤다.
“우히가 보기에는요. 저런 걸 보고 꼴값이라고 하는 거 같아요.”
그때 옆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등장했다.
무영. 그리고 요정 우히!
“꼴값을 떠는군.”
무영이 지원사격을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니콘이 겁을 먹었다.
바스트로가 어찌 죽었는지 두 눈으로 지켜본 탓이다. 하물며 무영에겐 악의 냄새가 강렬하게 났다.
지옥마가 앞을 막았다.
딴에는 유니콘을 지키려는 행동이었지만, 무영은 그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위압적이라 하지만 지옥마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
“마지막 부탁을 사용하겠다. 싸워서 패배하는 쪽이 승리하는 쪽에 복종하는 것.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지옥마가 전신의 털을 곧추세웠다.
이놈이?
이런 느낌으로 가소롭다는 듯 무영을 쳐다봤다.
히이이잉!
승낙의 표시다.
유니콘 앞에서 더욱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지옥마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 32. 지옥마(1) > 끝
ⓒ
< 32. 지옥마(完) >
무영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지옥마와의 싸움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킹슬레이어가 무영에게 내린 선물이었고, 그것을 마음에 안 들어한 건 선물인 지옥마 쪽이었으므로.
하여 세 번의 부탁만 들어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를 보건대 약속을 하면 지키긴 할 것이다. 다른 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건 무영의 몫.
복종을 시키려거든 이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잉!
지옥마가 투레질을 했다.
이 싸움의 의미가 유니콘에게 잘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듯 가볍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
방심. 혹은 오만.
이번 싸움에 걸린 무거움을 지옥마는 잘 모르고 있었다.
우히조차 은근히 감지한 걸 모르니 ‘꼴값’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고.
스릉!
무영은 비탄을 꺼냈다.
공명음을 들으며 무영이 준비를 끝마쳤다.
우선······.
뿔 한 개가 솟아났다.
무영은 8배속 이내의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고, 뿔 하나당 두 배의 배수를 갖는다.
뿔이 하나만 돋을시 2배의 시간이 감속되었다.
대신 유지시간이 훨씬 길다. 뿔을 하나만 세울 경우 5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스스슥!
히힝!
어림없다는 듯 지옥마의 날개에서 검은 구가 생성되었다.
지이이이익!
스아아아악!
검은 구가 날아들며 무영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그 영역 자체를 좀먹어버리는 공격.
가히 작은 블랙홀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순식간에 주변 지대에 엉망이 되었다. 괴물이 입을 벌려 베어 먹은 모양새로 어지러워졌다.
무영의 뿔이 두 개로 늘어났다.
더욱 빠르게 폭발지대를 벗어났다.
조금씩 스치긴 했으나, 400이 넘는 마력저항 덕에 별반 타격을 입진 않았다.
마력저항 400이면 저 공격을 정통으로 맞지 않는 이상 거의 무효화시키는 수준이다. B랭크 이하의 스킬을 무시하는 ‘양자리 허리띠’의 효과도 있고.
요컨대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지옥마와 상극의 신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검은 구를, 비탄으로 정확히 이등분 시켰다.
속도와 힘, 저항력 따위가 더해지자 저 블랙홀과 같은 공격도 그냥 베어버릴 수 있었다. 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
“자신감이 넘쳤던 것치곤 별 게 아니로군.”
화르르르륵!
지옥마의 전신에 지옥불이 타올랐다.
분노하지만, 그만큼 당황했단 방증이다.
원래 매일 보는 상대가 성장하는 걸 옆에 있으면 잘 느끼지 못하는 법.
지옥마가 처음 무영을 보았을 땐 자신에 비하면 취약하기 그지없었고, 성장한들 자신보다 밑이라며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영은 피식 웃었다.
‘역시 강해.’
지옥마와 달리, 무영은 처음부터 놈을 예의주시했다.
언젠가는 싸우게 될 상대라고 여겨서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단순 무력수치로 본다면 지옥마는 최상급 2단계를 살짝 웃도는 수준이지만 그 활용도를 살피면 단계를 나누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하지만 약점이 있지.’
흥분할수록 강한 불을 뿜어낸다는 것.
그 불은 지옥마의 생명의 원천.
저 불만 제압해도 지옥마를 제압하는 것과 같았다.
쩌저적!
비탄에 얼음결정이 맺혔다.
이내 비탄의 위로 무수히 많은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돌풍의 잔혹함, 독무, 혼의 꼬리.’
강렬한 바람이 불어 얼음송곳이 분출됨과 동시에, 주변으로 독의 안개가 일어났다.
그러자 지옥마도 정면대결을 받아주겠다는 듯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잉!
지옥불은 모든 걸 태운다.
얼음 따위가 접근하는 걸 지켜볼 리가 없다.
영점폭발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터지지조차 못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인 무영의 머리에 뿔이 하나 더 솟았다.
이로써 세 개.
‘여덟 배.’
느려진다. 홀로 동떨어진 세계에 남겨진 느낌. 그러나 이제는 익숙하다.
허공에 발이 뜬 순간, 무영은 저돌적으로 달렸다. 공기의 저항이 느껴질 정도로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만물에 결이 있다고 했다.
불은 그 성질이 워낙 급하고 강렬해서 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덟 배로 느려진 세상 속에선 결을 볼 수 있었다.
‘불에도 결이 있을 줄이야.’
4배속까진 몰랐다. 뿔이 세 개가 되고 8배속의 시간을 감속하며 느끼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공기나 이 거대한 마계 전체를 가르는 ‘결’이 있을지 모른다. 수백 배의 시간을 감속하는 수준으론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킹슬레이어는 무영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남기고 갔다.
지옥마의 바로 근접.
먼저 ‘혼의 꼬리’로 생성 된 분신이 무영의 뒤에서 뛰어올랐다.
교묘하게 시야를 가린 탓에 지옥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분신. 당연히 기운도 비슷할 수밖에 없으니 시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선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분신은 전신에 얼음결정을 머금고 있었다.
영점폭발!
분신 자체가 영점이 되어 그대로 지옥마 근처로 다가갔다.
콰아앙!
폭발로 인해 불꽃이 흔들렸다.
그 사이에서 무영의 눈이 빠르게 불길을 꿰뚫었다.
‘보였다.’
결.
지옥불에도 결이 있었다.
다른 불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영점폭발로 흔들린 사이 그 결을 무영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지옥마가 전신에 다시금 불길을 솟아 올리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스르르륵.
한 치의 오차 없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지옥마와 무영이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둘은 자리에 우뚝 섰다.
툭!
하지만 먼저 쓰러진 건 지옥마다.
무영은 몸을 돌려, 지옥마를 바라보다가 뿔을 지웠다.
지옥마의 불길은 완전히 사그라져 있었다.
‘지옥마에겐 생명의 원천과 같지.’
조절할 수 없었다. 그럴 여유를 가지기엔 지옥마가 너무 강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도 않았다.
무영은 시선을 돌렸다.
부르르르!
무영의 시선을 받은 유니콘이 몸을 떨었다.
“치료해 줄 수 있겠나?”
유니콘은 빛계열 중 최고로 치는 마수다.
괴물이란 표현보단 성수(聖獸)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다.
성자의 힘을 가진 배승민도 있지만, 그래도 유니콘에 비하면 부족하다.
허나 유니콘은 몸만 떨뿐 움직이지 않았다.
“우히.”
“우히히. 낭군님. 우히에게만 맡기세요~”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듯 우히가 유니콘에게 쪼르르 날아갔다.
그리곤 몇 마디 대화를 하자, 유니콘이 비장미를 띠며 움직이는 게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이윽고 유니콘은 정확히 지옥마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부딪쳤다.
그러자 유니콘의 뿔이 선하게 빛나며 지옥마의 불길을 살려내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대략 10분여가 흐르고 불길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히히힝?
지옥마가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바로 지척에 있는 유니콘을 보곤 펄쩍 뛰었다.
유니콘은 다시 몸을 돌렸으나, 전처럼 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까망아. 하양이가 널 살렸어. 앞으로 잘해줘야 돼. 알겠지?”
우히가 은근슬쩍 조언하자 지옥마의 눈이 번뜩였다.
한 마디로 기회가 아예 없진 않다는 뜻.
다시금 유니콘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마. 약속은 지키리라 믿는다.”
지옥마가 무영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감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무영이 아니다.
전투보다, 유니콘의 환심을 샀다는 게 놈에겐 더욱 중요한 듯싶었다.
“우웩······.”
그 모습을 보고 우히가 속이 메스껍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옥마는 약속을 지켰다.
그런 부분에 있어선 퍽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머지않아 악마의 긴 밤이 끝났고 그와 동시에 성의 복구도 완료되었다.
<성이 더욱 견고하게 복원되었습니다.>
<영주랭크가 상승합니다. A-> A+>
<영주민들의 전체적인 만족도가 상승합니다.>
<충성도 A+, 영주에게 복종합니다. 영주를 위해서라면 불길 속에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조화도 A+, 전투를 통해 동지애를 깨우쳤습니다. 종족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성장도 A+, 그들은 내외적인 성장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만족도 A, 보금자리를 찾아 안정되어 있습니다.>
<영주민수 17,336. 땅의 크기에 비해 영주민의 숫자가 매우 적습니다. 영주민을 늘리려면 출산을 장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련 된 시설 등을 지어 그들의 편의를 봐주십시오. 혹은 다른 땅을 정복해 영주민을 늘리는 것도 방
법입니다.>
출산장려라.
확실히 숫자가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시설만 받쳐 준다면 빠르게 숫자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무영은 관련 된 시설을 짓고 인원을 배치했다.
조금 더 복지에 힘을 쓰게 된 것이다.
“영주께서 우리를 위해 힘써주신다!”
“아아······ 감사합니다!”
“과연 움이시다. 움께선 누구보다 더한 지혜를 갖추셨지!”
“아움! 아훔!”
별 것도 아닌 일이다.
그런데 모두가 감동하며 더욱 무영을 우상화했다.
그저 출산율을 늘리고 영지의 힘을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거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 작은 발걸음이 그들에겐 큰 영향을 끼친다.’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무영은 회귀하기 전을 떠올렸다.
웡 청린은 무영의 자유의지를 없애고 그저 지배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억압은 결국 깨어지게 되어있다.
무영은 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웡 청린.’
살수림의 살주여.
‘조금만 더. 너의 목을 꺾어버릴 날이 멀지 않았다.’
꽈아아악!
무영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살수림에서 겪은 일을 잊을 리가 없다. 달려 나가기 바빴기에 최대한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웡 청린의 목을 당장에라도 손에 쥐고 싶지만, 확실한 놈의 몰락을 위해선 숨을 한 차례 들이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 숨을 들이키는 과정.
‘악마의 긴 밤이 끝났으니 움직여야겠지.’
무영은 바로 다음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오리스의 신좌는 그냥 장식품이었지만, 하멜의 룬 반지만 찾으면 디아블로스를 얻을 수 있다.’
하멜룬의 룬 반지!
미치광이 군주의 반지와 오리스의 신좌, 남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 세 개를 구하면 S랭크의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정확한 등급은 모르지만 그 이상일 수도 있는 하늘을 가르고 땅을 부숴버릴 무기.
그 위용은 충분히 전율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하멜의 룬 반지는 마신의 영역에 없다.’
무영은 턱을 쓸었다.
굳이 마지막에 하멜의 룬 반지를 구하려는 이유다.
마신의 영역에도 없고, 그렇다고 시련으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목적지는 마신의 영역이 아닌 장소.
‘태양길드.’
가장 거대한 아홉길드 중 하나이며 알렉산드로 퀸타르트가 주인으로 있는 곳.
그곳에 침입하여 반지를 구해야만 한다.
누가 착용하고 있을 지는 모른다. 항상 주인이 바뀌어왔으니까.
내부의 분열 탓이다.
태양길드는 가장 격동적인 길드이고 언제나 불화가 끊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길드를 집권한 알렉산드로가 대단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 부분을 잘 파고들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무영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니,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 32. 지옥마(完) > 끝
ⓒ
< 33. 태양길드(1) >
대도시.
푸른사원과 연결 된 모든 생존자들의 시작지점.
사람들은 푸른사원에서 한 달을 버티고 이곳에서 적성을 검사받는다.
이후 낙오되거나, 각기 다른 집단에 흡수되거나, 혹은 죽는 등, 서로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
그것이 대도시였다.
“저 미친놈. 오늘도 시작이로군.”
“저놈이 용병이야 뭐야? 왜 여기 와서 저래?”
“쯧쯧, 휘광길드는 뭐하나 몰라? 저 휘광표식이 아깝다. 아주 먹칠을 하는 꼴인데······.”
한 남자가 대도시의 구석, 땅굴처럼 지하로 파인 굴 속에 용병들이 모여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출현하자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혀를 찼다.
가벼운 플레이트 아머와 부츠 등을 신은 남자는 김태환이었다.
어깨에 휘광의 표식을 달고 있었는데 김태환은 등장한 즉시 표지판 하나와 의자 하나를 가져와선 용병들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용병시장.
일을 구하지 못한 용병들이 직접 일감을 찾고자 뛰어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태환은 팔짱을 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표지판에 적힌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상태창 시계를 착용하고 있으면 언어는 모두 자동으로 번역이 되기에 이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용 자체는 누구도 흠 잡을 게 없다.
그래서 실제로 처음엔 김태환에게 도움을 구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은 김태환이 거절했고, 응했던 일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허당!
마계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기에 김태환은 경험이 일천했다.
고작 1년.
마계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단순히 힘만 세다고 모든 일을 해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김태환은 의욕적이었다.
적어도 모든 일을 허투루 해결하려 들진 않았으니까.
하여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의뢰가 들어오곤 하였으니.
반대로 용병들은 자신들의 일을 빼앗아가는 김태환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휘광길드는 가장 거대한 아홉길드 중 하나.
그곳에 들어간 신입이 뭐가 안타까워서 용병시장에 나타난단 말인가.
아마도 휘광길드 내에서도 별난 놈으로 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내부에서 내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다. 그럼 철저히 아래에서부터 성장해나가야지.’
김태환은 오늘도 그런 다짐을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휘광길드는 그 규모처럼 인재가 많았다.
김태환 정도면 충분히 눈에 띄는 신입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기존의 기득권들이 모든 걸 주름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보조를 해 주는 게 전부.
그 외에는 야생이다. 홀로 커야 한다.
김태환은 철저히 밑에서부터 올라갈 생각이었다.
“저놈은 또 뭐야?”
“완전무장을 했네. 저러다가 숨 막혀 죽지.”
“보나마나 뜨내기겠지. 이 땅굴에서 겉멋 부리려다 죽는다, 아이야.”
용병들의 비웃음소리가 돌연 주변을 가득 채웠다.
끼익, 끼익, 거리는 귓가를 거슬리는 소리가 그 사이에 있었다.
김태환도 슬쩍 눈을 떴다.
동시에 불가촉천민, 가장 음습하고 더러운 용병시장······ ‘땅굴’이라 불리는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완전무장이란 말이 정말 어울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합 된 장비들.
관찰계열 스킬을 동원해도 제대로 된 신원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상태나 무구들의 정보를 숨기는 법보를 사용한 것이리라.
하지만 준비하고자 하면 그다지 구하는 게 어렵지 않은 법보였다. 공식적으로는 구하기가 힘들지만, 이곳 땅굴의 용병들은 비공식적인 루트를 많이 알았다.
하여간, 땅굴에 저 정도 무장을 하고 들어온 용병은 없었다.
툭!
남자는 조용히 벽에 기댔다.
주변 용병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저 검은······?’
그러다가 김태환의 시선이 남자의 검에 다다랐다.
왠지 익숙한 검이다. 저 굴곡이나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아······!”
한참이나 고민한 뒤에야 김태환은 깨달을 수 있었다.
비탄. 비탄이다.
무영의 검이었다.
과거 푸른사원에서 김태환은 무영과 함께했고, 무영은 다윗의 별을 찾아 그곳의 시련을 돌파해서 비탄을 얻은 바가 있었다.
김태환 역시 그곳에서 척결의 방패를 얻었고.
‘조금 다르군.’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전체 윤곽은 비슷하지만, 세세한 부분들이 달랐다.
김태환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고 특히 무영과 관련 된 것들은 쉽게 잊기 어려운 종류였다. 착각할 리는 없었다.
‘저래선 오래 못 버틸 테지.’
이내 김태환은 신경을 돌렸다.
이곳, 땅굴은 진정한 야생이다. 눈에 띄면 모두가 합공한다. 김태환이 일부러 가벼운 차림을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살아남으려거든 적당한 ‘보호색’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땅굴을 생리를 아예 모르는 듯싶었다.
가장 눈에 잘 띄니 의뢰는 많이 들어오겠지만, 땅굴에서 다른 용병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순 없었다.
욕심을 부리면 죽을 것이고.
결국 혼자 제풀에 떨어져 나가든가 용병들이 물어뜯어서 떨어질 것이다. 어찌되었든 좋은 꼴을 보긴 어렵다.
“발렛 길드에서 검술과 방패술 사범으로 세 명 요청했는데. 김태환 네가 필수라고 한다. 같이 가 볼 테냐?”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남자 한 명이 김태환에게 말했다.
김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발렛 길드의 주인되는 사람의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 두 명 모두 슬슬 검술을 배울 나이가 되긴 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참에 동료 용병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김태환은 허당이란 소리를 들으며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사람들은 착실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부의 변혁을 위해선 ‘자기사람’이 필요했고, 말하자면 이곳은 김태환의 날개가 되어줄 사람들을 찾는 장소와 같았다.
땅굴을 나서기 직전 김태환은 다시 전신무장을 한 남자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반나절.
김태환이 발렛 길드에서 사범의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남자는 여전히 땅굴의 벽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이 묘했다.
몇몇 용병들이 남자에게 근접하지 않으려는 게 느껴졌다.
묘한 정적. 그리고 긴장감.
땅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이봐. 무슨 일 있었나?”
김태환이 땅굴에 계속 있었을 용병에게 물었다.
그러자 용병이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저 새끼. 사람 새끼가 아니야.”
용병.
그중 땅굴의 용병이라면 악바리로도 유명하다.
사람이 아니다란 말은 서로에게 칭찬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용병이 말한 ‘사람 새끼가 아니다’란 말은 그와는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작 반나절이다.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인식이 바뀌어 있었다.
궁금증이 일수밖에 없었고, 용병은 그저 침만 꿀꺽 삼켜댔다.
“시체술사.”
“시체술사?”
“그래. 저 새끼, 시체를 다룬다.”
아아. 용병들이 바짝 굳어버린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시체술사는 극명하게 안 좋은 쪽으로 인식이 치우쳐져 있었다. 오대세가는 모두 무율, 야수, 전진, 군림, 그리고 사령세가로 나뉘는데, 시체술사들이 주를 이루는 곳은 마지막의 사령세가뿐이었다.
그리고 사령세가의 사람들은 악랄하기로 위명이 높다.
시체를 다루며 상급의 시체조달을 위해선 도덕적 관념조차 그냥 무시해버리는 곳.
워낙 위세가 대단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뿐이다.
이 역시 마계의 썩은 고름 중 하나였다.
“그럼 사령세가의 사람인가?”
“그렇겠지. 씨발, 왜 변방에 자리 잡은 놈들이 요즘 하나 둘 기어 나오는 거야?”
사령세가는 대도시에 위치하지 않은 집단이다.
이곳에서 말을 타고 50일은 더 가야 하는 장소에 마을을 세우고 그곳에서만 살아가는 폐쇄적인 곳이었다.
한데 요즘 들어 시체술사들이 하나, 둘 세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 같이 실력자들.
저 남자도 그런 경우라는 뜻이다.
땅굴의 용병들조차 꺼려하는 원인으론 충분했다.
‘그니까······ 한 명이 죽었군.’
김태환은 주변 정황을 모두 살피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시비가 붙었고, 싸움이 일어난 와중 한 명이 죽었다.
그리고 죽은 이가 시체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남자의 주변을 어슬렁대는 생기가 없는 자가 바로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동료의식이 얇다. 복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죽어도 누구 하나 추궁할 이가 없는 자들.
그게 땅굴의 용병이었으므로.
하물며 시체술사인 걸 알았으니 몸을 사리기 바쁠 것이다.
“시기가 뒤숭숭해서 그런지. 에잉, 오늘 일은 접으련다.”
용병이 자리를 떴다.
김태환은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턱을 쓸었다.
시체술사라.
‘엮여서 좋을 게 없다.’
사령세가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태환 본인이 하고자 하는 대의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최대한 엮이지 말자고, 그리 다짐하였다.
다음날.
한 남자가 땅굴을 찾아왔다.
태양길드의 표식이 어깨에 새겨진 젊은이였다.
“태양길드 관할의 던전에서 새로운 시련이 발생했다. 참여하는 이에겐 C랭크의 법보를 두 장씩 주마.”
“무슨 시련입니까?”
용병 하나가 묻자 남자는 떨떠름하단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잘은 모른다. 위험한 일은 아니다. 기껏해야 레벨이 낮은 던전에서 일어난 시련이니. 대충 설명하자면 시련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탐색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시련의 탐색!
굉장히 복불복의 일이었다.
하지만 수준이 낮은 레벨에서 발생한 시련이라면 남자의 말마따나 별 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C랭크 법보 두 장이면 적어도 세 달치 식량은 구할 수 있는 재화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용병들의 입장에선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인원제한이 있습니까?”
“없다.”
그걸로 끝이었다.
땅굴의 모든 용병들이 참가했다.
“너는 휘광길드 소속이 아니냐?”
그러다가 태양길드의 남자가 김태환에게 물었다.
김태환은 슬쩍 미소만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흠, 휘광길드에 특이한 녀석이 하나 있다더니 그게 네놈이가보군. 네가 참여한다면 특별히 B랭크 법보 두 장을 챙겨주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주십시오.”
“그래······? 뭐, 나로선 나쁘지 않지.”
김태환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후 남자를 따라 모든 땅굴의 용병들이 자리를 옮겼다.
던전은 컸다.
태양길드가 관리하는 던전.
던전레벨은 1~9까지 있는데, 이곳은 그중 3레벨에 해당하는 곳이다.
대충 오크 정도의 괴물들이 출현한다고 보면 쉽다.
“시련은 한 번에 다섯 명씩만 들어갈 수 있다. 차례대로 들어가라.”
던전의 중심부.
태양길드의 병사들이 지키는 와중, 거대한 빛의 물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용병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다섯 명씩 짝을 이뤄 그 빛의 물결로 발을 들였다.
“재수 옴붙었군.”
“하필이면 시체술사랑 팀이라니.”
김태환의 바로 옆에서 불만 가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엮이지 않는 게 좋은데······.’
김태환도 내심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엮이지 않으리라 한 다짐이 고작 며칠만에 깨진 것이다.
< 33. 태양길드(1) > 끝
ⓒ
< 33. 태양길드(完) >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돌아올 때 필요한 법보는 지급 안 되는 겁니까?”
“어차피 레벨이 낮은 던전의 시련이다. 돌아갈 방법이야 안에도 많을 터. 그래도 원한다면 원래 지급해야할 법보 하나를 빼고 주겠다.”
어느 용병이 묻자, 현재 이곳을 총괄하는 관리자가 답했다.
보통 이런 시련을 탐색할 땐 안전을 위해 위치가 저장 된 법보를 한 장씩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존 보상과 바꿔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에이, 이런 시련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3레벨 던전의 시련이면 뭐 뻔하지.”
당연히 바꾸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시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김태환을 비롯한 5인이 빛을 넘자 그와 동시에 세상이 바뀌었다.
<시련, ‘살점 사냥개의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한 번에 최대 5인까지 넘어올 수 있습니다.>
<살점 사냥개들을 사냥하며 시련의 끝에 도달하십시오.>
“내용은 별 게 없네?”
“그나저나 살점 사냥개는 뭐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
유사한 이름을 가진 괴물은 몇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살점 사냥개란 이름을 가진 괴물은 없었다.
“내가 전위에 서지.”
그때 김태환이 나섰다.
마계에서 생활한 년차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는 무려 휘광길드에 속해있었다.
또한 땅굴에서 1년간 생활하며 어느 정도 실력을 알렸다.
이곳에서 전위를 맡을 수준은 충분히 되었다.
그를 아는지라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
생존.
미지의 장소에서 생존이란 단어만큼 민감한 것은 용병에게 없었으므로.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용병들의 위치를 적절하게 배치한 뒤, 김태환이 전신에 갑주를 착용한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알아서 가장 후미를 맡았다.
“괜찮겠소?”
후미는 전위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장소다. 아니, 오히려 전위보다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은신형의 괴물들은 대부분이 뒤를 노리며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하지만 이 정도면 진짜 벙어리가 아닌가 의심이 될 수준이다.
“문제가 없다면 출발하지.”
그러나 정말 사령세가의 사람이라면 굳이 김태환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5인이 진열을 이뤄 미지의 시련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살점 사냥개의 외견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의 살들이 울긋불긋 튀어나와 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짜 맞춘 듯 각각의 부위에 꿰맨 자국이 있었다.
‘키메라에 가깝군.’
투우웅!
김태환이 든 방패가 크게 떨렸다.
살점 사냥개 한 마리, 한 마리는 별 것이 없지만 몰려다니는 숫자가 기본 백 단위였다.
“닝기리! 이 개새끼들이 뒈질라고!”
“크아악! 내 팔!”
용병들은 거친 입담과 함께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 막긴 어려운 법.
간간히 살점 사냥개에게 공격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내가 막겠다. 모두 뒤로!”
쿵!
김태환의 방패가 땅에 박혔다.
유니크 클래스, 척결의 수호자!
척결의 방패로 말미암아 얻게 된 그 힘을 지금 발휘할 때가 되었다.
좌아아아앙!
방패의 선을 따라 무형의 기운이 일직선으로 퍼졌다. 마치 땅을 가르듯이.
그러자 살점 사냥개들도 그 무형의 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쿵! 쿵!
살점 사냥개들이 몸을 던졌다.
하지만 벽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
이에, 사냥개들이 눈치를 보다가 물러났다.
‘지능이 있나?’
그 모습을 보고 김태환이 의외라는 눈초리를 던졌다.
이내 사냥개의 시체만을 남긴 채 텅 빈 공터에 다섯 명이 남았다.
“끄으으······.”
“부상을 당했군. 우선 이걸로 버텨라.”
압박붕대를 꺼낸 김태환이 빨간 물약과 함께 용병의 팔을 감쌌다.
“지, 집어치워. 그 물약 값 절대로 내어줄 생각 없으니.”
하지만 용병이 거부했다.
용병의 세계에선 빌린다는 개념이 희박하다.
주면 그 배에 달하는 물건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리고 물약은 일반의 용병들이 구하긴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
“다시 돌려달라고 안 한다. 팔 잘리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저, 정말이냐?”
“내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텐데?”
“끄응······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해.”
용병이 포기하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살점 사냥개들이 물러갔대도 안전한 건 아니었다.
“수색은 이만하면 충분한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법보를 받아올 걸 그랬군.”
낭패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각보다 시련의 강도가 쎄다.
하지만 당장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죽으나 사나 일단 시련을 더 탐색해 볼 수밖에.
두두두두두!
마침 멀리서 무수히 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미친! 동료들을 끌고 왔구만!”
“씨발!”
그 숫자가 족히 오육백은 될듯했다.
반면 이곳에 모인 이들은 고작 다섯!
“모두 뒤로! 출발지점으로 돌아간다!”
김태환이 부득불 외쳤다.
이윽고 몸을 돌려 뒤로 달리기 시작할 찰나.
스릉.
유일하게 한 남자만이 정면으로 걸어갔다.
검을 뽑자 전신에서 불길이 솟았다.
화르륵!
이내 남자의 몸 주변으로 강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길이 더욱 확산되었고, 그 불길은 순식간에 살점 사냥개들을 잡아먹었다.
촤아악!
뿐만이 아니다.
남자가 검을 한차례 휘두르자, 수십 개의 얼음송곳들이 허공에 생성됐다.
쾅! 콰콰쾅!
얼음송곳들이 바닥을 때리자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끼깅! 깨개갱!
살점 사냥개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압도.
그야말로 상대가 안 된다.
“······.”
그 모습을,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후 전위에 서는 순서가 바뀌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모든 길을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이며 시련을 돌파했다.
‘대체 누구지?’
당연히 모두가 가진 의문이다.
주요 능력치가 못해도 300은 되는 듯싶었다.
그만한 무력이면 거대 길드에서도 정예로 취급받는다.
‘사령세가······.’
사령세가는 길드는 아니지만, 가장 큰 오대세가에 포함되어 있다.
오대세가의 정예라면 이만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우습진 않다.
쿵!
쩌적!
결국 시련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었던 구슬모양의 ‘핵’을 부수자 시련이 종료되었다.
<시련, ‘살점 사냥개의 방’을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대단한 업적! 시련을 해결한 5인에게 무작위 B급 법보 한 장이 주어집니다.>
“B급!”
“미친, 정말 B급이라고?”
용병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B급 법보에다 적당히 쓸 만한 것만 걸리면 외곽에 작은 집을 살 수도 있을 터였다. B급 중에서도 활용도가 좋은 거면 더 큰 집을 수할 수 있을 테고.
보통 아랫급 다섯 개가 있어야 윗급 하나로 취급해주니, C급 법보 다섯 장을 받은 것과 진배없었다.
이후 싱글벙글한 채 시련을 벗어나자 관리자가 의외라는 눈빛을 던졌다.
“호오, 시련 자체를 깨버린 건가?”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지.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겠지. 흠······ 안에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관리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 꽤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왜 일까?
관리자는 태양길드 내에서도 제법 직급이 있어보였다.
헌데 이런 시련 하나를 묻자고 직접 용병을 구하며 그 이야기까지 들으려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유흥거리는 아닐 것이었다.
‘어찌한다.’
설명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저 사령세가의 남자를 밝혀야한다.
사령세가의 인물에다가 그 힘이 남다른 걸 알게 되면 관리자의 태도가 돌변할 수 있었다.
허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제가 설명해드립지요. 헤헤.”
그 순간 용병 하나가 나섰다.
“그래? 한 번 해봐라.”
“그러니까요. 살점 사냥개의 방이라는 시련이었는데 말입니다. 그곳에서 김태환 이 작자가 엄청난 활약을 한 겁니다. 자세히 얘기해드리자면······.”
용병은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어 남자의 정체를 가렸다.
그 의도를 김태환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아.’
남자와 계속해서 팀플레이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남자는 힘만 세고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처럼 비쳐졌을 지도 모르겠다.
B급의 법보를 얻었으니, 이 남자를 데리고 더 이득을 취하겠다. 이 말이었다.
‘나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게 있으니.’
김태환은 묵인해주었다.
자신 역시, 남자의 정체에 관해 더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 그래서 이렇게 무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모두 김태환 이 자의 도움 덕분이지요. 핫하!”
“대단하군.”
관리자의 눈이 김태환에게 닿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운이라.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에게 따로 일을 더 맡길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라면?”
“요즘 이와 비슷한 일들이 대도시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네. 우리 태양길드는 이 문제를 바로잡을 생각이야. 아마 이 부분에 있어선 휘광길드의 의견도 일치할 걸세.”
“알겠습니다. 기꺼이 맡지요.”
김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한 일이라면, 그 중심에서 움직이며 실력은 인정받고 싶었다.
태양길드가 직접 나설 정도이니 필히 별 거 아닌 일은 아닐 터.
직접 관여할 가치는 있었다.
어지간한 시련은 남자 혼자서도 돌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일이 엄청나게 쉬워졌으며, 함께한 용병들은 거의 금방석에 앉았다.
“이건 정말 미친 일이야. 이번 일이 잘 되면 은퇴해도 되겠어.”
“그러니까. 중심부에 작은 가게를 낼 수도 있겠는데?”
“저 흑남이 완전 복덩이지.”
용병들이 흑남이라 부르는 전신갑주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들이 처리한 시련이 벌써 다섯 개를 넘겼다.
불과 한 달 만에 이뤄진 일이다.
그동안 그들은 막대한 보상을 받고, 그 보상을 어찌 사용할 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수록 경계도 커졌다.
그들의 보상을 노리고 공격해온 이리들이 아예 없진 않았던 것이다.
그들 서로도 너무 가까이 하진 않으려는 기색이 있었다.
‘이 일. 평범하지 않아. 태양길드가 전력을 기울여도 손이 부족할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김태환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벌써 다섯 개의 시련을 돌파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탐탁지 않았다.
일단 시련 모두가 키메라 종류의 괴물들이 즐비했다는 점.
‘핵’을 부숴야 시련이 끝났다는 점이 같았다.
시련상자처럼,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시련을 만든 듯한······.
그런 착각이 일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일단 여자부터 구해야겠군.”
“난 뜨거운 물에 몸이나 좀 담그고 싶다.”
이번 일은 대도시 외곽에서 벌어졌다.
그를 해결하고 대도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아간 뒤의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쫙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 너넨 뭐냐?”
김태환이 나서서 말했다.
정통복장을 하고, 짐승의 뼈 투구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그 숫자가 정확히 열.
“너희는 너무 나댔다. 죽음의 신이 노했다.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나, 흉비쉬의 이름 아래에.”
어수룩한 말투.
그들의 대표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작은 단검을 들었다.
이어 단검으로 자신의 팔목을 그었다. 팔목엔 수없는 자상이 나 있었다.
촤악!
피가 뿜어지자, 그것을 바닥에 뿌렸다.
쿠우웅!
잠시 후 바닥의 아래에서 그 피를 머금으며 다섯 기의 괴물들이 솟아났다.
“강시······! 사령세가!”
다섯 기의 괴물은 모두 강시였다.
그것도 매우 어두운 색을 띄는.
김태환은 즉시 저들이 사령세가의 정예들임을 알아봤다.
‘이번 일과 관계가 있구나!’
직감이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태양길드가 전병력을 움직이고 있는 일에 사령세가가 관계되어 있음을!
“흑강시다. 위대한 그분의 탄생. 밑거름이 될 추종자들이지.”
남자, 흉비쉬는 자신했다.
흑강시 다섯 기라면 저들을 상대하고도 남는다.
그걸 김태환도 알고 있었다.
흑강시를 직접 상대한 적은 없지만, 사령세가를 말할 때 들리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사령세가의 흑강시를 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설령 그게 누가 됐을지라도.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다.
“다들 무기를 뽑아!”
김태환이 급하게 외쳤다.
*
툭.
실이 끊겼다.
“무영님. 왜 그러시나요?”
무영은 고개를 돌렸다.
기품 있는 소녀. 하얀 원색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성의 위에 앉아, 차를 마시는 와중이었다.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과묵하시군요. 하기야, 저 같은 거랑 대화를 나누긴 싫으시겠지요······.”
소녀가 시무룩해졌다.
툭.
무영은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저랑 같이 있어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정말 괜찮으세요? 지금 길드는 완전 비상사태거든요. 알렉산드로님이 실종되셔서 말이죠.”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웃었다.
이곳은 태양길드의 본성.
소녀는 알렉산드로의 일곱 번째 딸이었다.
아무런 권력도 힘도 없는, 하지만 만약의 일이 생기면 방패막이로 써먹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녀.
“고마워요. 만약의 일이 벌어지면, 그대만큼은 지켜줄게요. 제 결혼이 무사히 성사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소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영이 손을 뗐다.
소녀가 약간 아쉬워하는 기색을 비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성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분신의 기척이 끊겼고, 드디어 끄나풀이 등장했다.’
당장은 소녀보다 다른 일이 더욱 신경쓰였다.
분신이 터졌다. 그리고 분신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세세하게 들어왔다.
‘사령세가.’
무영의 입가가 씰룩였다.
이번 일을 방해하는 자들.
하멜의 룬 반지를 얻고 그 이상의 득을 취하기 위해 풀어놓은 분신이,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 33. 태양길드(完) > 끝
ⓒ
< 34. 히아신스(1) >
늦은 밤.
무영은 성 난간에 걸터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무영이 태양길드의 본성에 있는가.
이 일을 설명하려면 대략 40일 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먼저, 무영은 하멜의 룬 반지를 얻고자 즉시 마신의 영역을 벗어나 대도시로 들어왔다.
신분을 위조하여 태양길드에 잠입, 이후 알렉산드로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서 대도시 내에 이상 현상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태양길드와 아르페지오 길드의 결탁.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었지. 또한 이 일로 인해 알렉산드로 퀸타르트의 자식들이 대거 죽는다.’
아르페지오 길드 역시 가장 거대한 아홉길드 중 하나.
태양길드는 정략결혼을 빌미로 그들과 결탁을 하려했다.
하지만 성사는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알렉산드로 퀸타르트의, 정략혼이 예정되어있던 자식들이 모두 죽기 때문이다.
‘정략혼은 공식적으로 표면에 알려진 일일 뿐이다.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드로의 행방불명이 걸린다.
그만한 이가 갑자기 모습을 감출 리는 없고, 누군가의 암습을 받았대도 그게 통할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숨겨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당장은 뜬구름잡기였다.
단순 예측을 할 수밖에 없는 게, 무영은 이 시기에 웡 청린에게 납치당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문서나 상태창 시계의 히스토리로 엿본 내용만 적당히 기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무영의 행동에 도움을 준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암살자. 아타락시아.’
뱀을 다루는 암살자.
마신의 영역을 벗어나려는 찰나 놈이 습격해왔으나 무영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암살자를 격파했다.
정확히 자신을 노렸다는 점에서 의문을 느끼고 배후를 캐봤다.
생시로 만든 뒤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것이다.
‘알렉산드로는 가족들을 미끼로 던지고 누군가가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다. 길드마스터의 부재를 알리며 길드가 취약해진 순간 나타날 누군가를.’
모든 이야기와 정보를 종합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알렉산드로가 행방불명 된 건 분명한 고의다.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태양길드는 현재 각종 이변을 처리하느라 전병력이 동원되고 있는 상황.
적대적인 세력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무엇을 얻으려는 거지?’
무려 가장 거대한 아홉길드 중 수석이라는 태양길드의 수장이 직접 움직인 일.
알렉산드로의 욕심이 얼마나 거대한지 무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작전을 동원해가며 얻을 물건이라.
무영으로서도 굉장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하멜의 룬 반지는 알렉산드로가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별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고자 무영은 아르페지오 길드에 정략혼이 예정 된 일곱 번째 딸 ‘히아신스’의 수석경호원 일을 맡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사령세가가 배후에 있다는 건 확실하다. 흉비쉬. 까다로운 놈이 출현했군.’
흉비쉬는 무영도 익히 아는 놈이었다.
흑강시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본신의 무력과 지력도 뛰어나 여간 처리하기 까다로운 상대다.
과거 무영과 한차례 부딪힌 적이 있었다.
무영이 최강의 살수가 되기 전의 일이었지만, 놈과의 싸움으로 꽤 많은 진전을 이뤘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상대였다.
극도로 조심성이 많은 놈.
분신을 풀어놓은 게 정답이었다.
“배승민.”
스르륵.
어둠과 동화되어 나타난 배승민이 뒤에 섰다.
무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타칸과 함께 죽음의 기운을 쫓아라. 강시를 다루는 놈들을 말이다. 지금 대도시에서 너희를 막을 자는 몇 없을 터.”
“쫓기만 합니까?”
“찾아내어, 죽여라. 그리고 모든 걸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스으윽.
배승민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이 진흙판에 무영도 슬슬 참전을 할 작정이었다.
경호원으로 있기는 하지만 적들이 언제 쳐들어올지가 확실하지 않다. 그 전에 무영 나름대로 사령세가를 공격하며 정보를 얻어낼 셈이었다.
어차피 지금 대도시는 혼란 그 자체다.
태양길드에 들어오고 나서 더욱 확실해졌다.
타칸과 배승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지극히 적었고, 어둠속에서 활동한다면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하멜의 룬 반지를 당장 얻을 필요는 없지.’
무영은 알렉산드로의 일곱 번 째 딸인 히아신스를 떠올렸다.
그 작은 소녀가 하멜의 룬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은 그것을 굳이 뺏을 필요가 없다.
하멜의 룬 반지는, 사용자가 죽어야만 이전이 되는 탓이다.
히아신스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침을 흘리며 멍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자 하녀 두 명이 보였다.
“아침식사 시간입니다. 준비하시지요.”
하녀들은 히아신스의 잠옷을 벗기고, 그릇에 떠온 물로 씻긴 뒤 하얀 원피스를 입혔다.
“아침밥은 안 먹으면 안 돼?”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알렉산드로님께서 유일하게 가족들에게 바라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알렉산드로님은······ 알았어.”
한숨을 푹 내쉰 히아신스가 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알렉산드로님.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는 비애다.
모두가 철면피, 냉혈한이라고 욕하지만 가족에겐 나름 따듯했다.
그래서 가족식사는 언제나 웃음이 넘쳤지만, 그 모든 게 가면이었음을 히아신스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알렉산드로가 있기에 유지된 평화.
그가 없는 지금은 가족 모두가 이권을 노리는 이리가 되었다.
서로 물어뜯기 바쁘며 화목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끼이익.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무영님! 미안해요. 기다리고 계셨나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히아신스가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만의 청초한 느낌이 묻어나는 좋은 웃음이었다.
솔직히 히아시스는 무영에 대해 거의 모른다.
그저 무영이 과거 ‘위명의 기사들’이라 불렸던, 지금은 전설처럼 여겨지는 기사단의 단원이었으며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세상을 유랑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안다.
물론 무영이 그 모든 사실을 위조했다는 사실 역시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소녀의 눈에 ‘위명의 기사단 단원’이라는 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전설.
30년도 훨씬 전에 여덟 마왕을 죽인 기록의 보유자들.
무영은 그에 걸맞은 검술 실력과 무거운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백마탄 왕자님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기사가 다른 이들도 아닌 자신을 택했다.
그 자부심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아닙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에스코트 부탁드려요.”
히아신스가 살짝 허리를 낮추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툭 치면 부러질 듯이 가늘었다.
히아신스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무영은 오른손을 살짝 마주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태양길드, 알렉산드로의 가족이라 칭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열다섯이 둥근 원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서 식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본래 경호원은 이 장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원칙상 맞지만, 알렉산드로가 실종된 뒤부터 한 명당 한 명씩의 경호원 출입이 가능해졌다.
물론 바깥에는 백 명이 넘는 이들이 대기 중이다.
유사시에 급히 들어와 일을 처리하는 게 명분이라지만, 사실은 유세이며 기싸움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냉전이 따로 없군.’
분위기는 완전한 얼음장이었다.
먹는 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이 정도면 인지가 안 될 수준이다.
당연히 히아신스는 바짝 얼어있었다.
툭.
그녀가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자, 바로 다른 이들이 도끼눈을 하며 노려봤다.
그중 제법 나이를 먹은 안경을 쓴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히아신스. 여자아이가 칠칠치 못하게 그게 뭐니? 걱정이다. 아르페지오 길드에 가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우리들이 창피해진다는 걸 알고 있겠지?”
“미안해요, 언니.”
히아신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히아신스는 막내였고, 그만큼 알렉산드로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가 사라지자 그 반동이 그대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누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하필이면 상대가 그 망나니 아닙니까? 당연히 심란하겠지요. 성도착증이 있어서 여자를 몇 명이나 죽였다는 그놈. 푸흐흐.”
한 남자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동시에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수록 히아신스의 고개는 더욱 낮아질 뿐이었다.
히아신스의 결혼상대는 어지간한 이라면 모두가 아는 망나니였다. 벌써 다섯 번의 결혼을 했고, 상대 여인이 죽어 ‘인간쓰레기’라고도 불리는 남자.
히아신스는 그런 남자에게 팔려가는 것이다.
명목은 태양길드와 아르페지오 길드의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좀 더 몸가짐에 조심하거라.”
“예······.”
히아신스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가장 서열이 낮고, 가장 질이 나쁜 곳으로 팔려가는 입장이기에.
본론은 따로 있었다.
“알렉산드로님의 자리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놔둘 순 없어요.”
“그 자리는 당연히 내가 맡는 게 정상이겠지. 나는 알렉산드로님을 따라 수십 년간 행정 처리를 해왔다. 길드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이는 없어.”
“웃기는군. 지금 길드는 위험한 상태다. ‘화룡기사단’의 단장인 내가 임시로나마 길드를 이끄는 게 정상이 아니겠나?”
모두의 목청이 금세 커졌다.
답이 나올 리 없고 그저 싸우기만 한다.
이들을 보면, 길드의 상태를 알기 싫어도 알 수 있었다.
‘개판이군.’
가장 거대한 길드이고 수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곳도 내부는 썩었다.
비단 태양길드만 그런 게 아니다.
다른 곳도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진 않으리라.
무영은 접시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히아신스를 바라봤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히아신스는 바로 바깥으로 향했다.
꽃과 잔디가 무성한 성의 외곽에서 종이와 붓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실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아! 잠깐만 그대로 서 계세요. 지금 구도가 굉장히 좋아요.”
히아신스가 그리던 걸 멈추고 다른 종이를 꺼냈다.
이후 붓을 놀리며 무영과 주변관경을 그려냈다.
당장은 할 일도 없는지라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 그렸어요. 어때요?”
무영은 슬쩍 다가가 히아신스가 그린 그림을 살폈다.
해바라기와 그 안에 서있는 무영의 모습은 정말 그림과 같았다.
“괜찮군요.”
“헤헤. 다행이네요. 아······ 이 그림, 제가 가져도 되나요?”
“히아신스님이 그리셨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싸!”
히아신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광량이가 떠오르는 행동이었지만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일이다.
“팔자도 좋군.”
그때 한 남자가 열댓 명의 경호원을 대동한 채 자리에 나타났다.
식사시간 무렵 망나니를 언급하며 히아신스를 비웃은 남자였다.
배가 툭 튀어나왔고 나이는 서른 중반쯤.
알렉산드로의 다섯째 자식이며 이름이 ‘멘디니’였던가.
“메, 멘디니 오라버니.”
히아신스가 급속도로 굳었다.
멘디니가 히아신스를 바라보는 눈빛엔 항상 정욕과 같은 게 여려있었다.
그것을 히아신스라고 모를 리 없었기에 본능적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이후 멘디니가 다가오자 무영은 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무영을 보고 멘디니가 피식 웃었다.
“아아, 네가 그 위명의 기사인가? 겉모습은 그럴싸하군.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다만······.”
멘디니가 무영을 밀치고 히아신스의 그림을 바라봤다.
“이딴 거나 그리고 있었던 거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하! 이제 태양길드를 완전히 벗어난다. 뭐 그런 거냐?”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안 그래도 너의 행동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이들이 많아. 언제까지 애처럼 굴 거냐? 따라와라. 이번에 내가 어른으로서 보여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훈련시켜주마.”
멘디니가 히아신스의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팔을 붙잡았다.
백주대낮.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직접적이다.
히아신스가 바짝 굳었다.
전신에 털이 곤두섰다. 벌레가 몸을 기는 그런 기분.
“손을 놔라.”
때마침 무영이 멘디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샤아앙!
창!
그럼과 동시에 열댓 명의 경호원들이 무기를 들고 무영을 겨눴다.
“손······ 뭐라고? 잘 안들리는데, 다시 말해줄 수 있나?”
멘디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하여, 무영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손, 놔라.”
< 34. 히아신스(1) > 끝
ⓒ
< 34. 히아신스(2) >
사자가 울 때 저주파가 흘러나와 사냥감을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기운이 생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지금 무영의 모습이 그러했다.
멘디니는 알렉산드로의 식구로서 어렸을 때부터 좋은 것만 먹고 자랐지만 그러다보니 수라장을 거쳐 온 무영과는 완전 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온실안의 화초.
손에 굳은살이라곤 없고, 몸집은 비대하다.
그간 얼마나 수련을 게을리 해왔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이런 녀석이 그 알렉산드로의 자식이란 게 믿기지 않지만 무영은 멘디니가 굉장히 겁이 많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살의 떨림, 눈가의 움직임이나 긴장할 때 흘러나오는 특유의 냄새만으로도 무영은 어느 정도 사람을 재단할 수 있었다.
그런 감정의 표현을 숨기는 훈련을 따로 받지 않는 이상에야······.
‘한심하군.’
무영은 내심 혀를 찼다.
알렉산드로의 식솔이다. 그러한 훈련을 받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정신적 방어기재 역시 훌륭하게 쌓아놨을 것이다.
헌데 멘디니는 무영의 강압적인 말 한 마디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한심하고, 더 나아가 실망스럽다.
호랑이의 자식이 개조차 되지 못하다니.
욕심 많은 돼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덜덜덜!
무영의 기세를 잠시 맛본 것만으로 멘디니는 식은땀을 줄창 흘려댔다.
멘디니의 시선에서 무영은 염라대왕마냥 부각됐다.
“끄으으윽!”
무영의 손이 멘디니의 어깨를 점차 짓눌렀다.
자연스럽게 히아신스로부터 손을 놓자 무영 역시 멘디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무, 무엇들 하는 거냐! 이놈을 죽여!”
비웃음은 사라졌다.
멘디니는 잔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열댓 명의 호위들이 순식간에 무영을 감쌌다.
“이, 이러지 마세요. 멘디니 오라버니.”
“개 같은 년! 그 사이에 저놈이랑 붙어먹은 모양이지? 너희 연놈 다 무사하진 못할 줄 알아라!”
멘디니가 엉덩이로 바닥을 끌며 재빨리 뒤로 물러나더니, 호위들의 뒤에 숨어 이처럼 외쳤다.
히아신스가 몸을 가냘프게 떨었다.
이와 같은 모욕적인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멘디니 오라버니. 대체 왜······.”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히아신스의 머리 위로 무영이 한 차례 손을 올렸다.
히아신스가 지금 무너져선 안 된다.
무영의 목적을 위해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히아신스는 너무 어리다.
그래서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어리다고 무시하고 깔보지 못하게.
알렉산드로가 모습을 감춘 이때, 이리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영은 작게 속삭였다.
“그림처럼 아름답지도 않지.”
세상은, 마계는, 오물로 가득 찼다.
누가 더 많은 오물을 뒤집어쓰느냐의 차이일 뿐.
모두가 살아가는 건 결코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걸 알아야만 했다.
단순한 회피는 언젠가 참극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스릉!
경호를 맡던 열 명의 호위들이 검을 들었다.
하지만 비탄은 울지 않았다.
‘본색을 보이는 것조차 아깝다 이거냐?’
무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비탄이 깨어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나설 싸움이 아니라는 듯.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마신의 영역에서 괴물의 피를 탐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
인간들의 무력수준이 한참 낮으니 그럴 수밖에.
기껏해야 주요능력치 250안팎 정도가 될 것이었다.
무영은 비탄을 뽑지도 않았다.
화르륵!
용 형상의 불길이 무영의 등 뒤로 떠올랐다.
쿠와아아앙!
용이 크게 울부짖자 주변에서 달려들던 이들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은 멈춰있다고 봐주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려 순식간에 다섯 명을 먹어치웠다.
털썩!
타는 과정조차 없다. 바로 숯이 되어 바닥에 몸을 눕혔다.
“용기사······?”
모두가 경악했다.
특히 멘디니의 표정이 볼만했다.
위명의 기사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 실력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던 탓이다.
히아신스의 호위로 지원한 사람자체가 적었고 그들 모두의 실력이 일천했기에 무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정말 위명의 기사란 말인가!’
차례차례. 한 명씩 불에 타서 사라진다.
무영의 움직임은 눈으로 읽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전설 속 위명의 기사들이 저와 같았을까.
수십, 수백만의 적을 뚫고 마왕의 목을 그었던 자들······.
이윽고 모든 호위가 바스러졌다. 멘디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과정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흐으으윽!”
이내 정신을 차린 멘디니의 바지가 축축해졌다.
겁을 먹고 실금한 것이다.
털썩!
무영이 다가가자, 엉거주춤 쓰러져선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날 죽이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무영님.”
동시에 히아신스가 무영의 옷깃을 잡았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멘디니를 걱정하는 건가?
하면,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싶었다.
멘디니의 말마따나 일이 커지면 무영이 감당하기 어려워지니, 순전히 무영의 안위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너를 만진 한쪽 손만 자르도록 하지.”
“예?”
스릉!
서걱!
일련의 동작이 보이지도 않았다.
비탄이 눈 깜빡할 사이에 뛰쳐나와 멘디니의 오른손을 앗아가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끄아아아아악! 내 손! 내 손!!”
멘디니가 피가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무영의 얼굴은 한 점 흐트러지질 않았다.
히아신스는 잠시 넋이 빠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계에서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대도, 시체를 보는 건 예삿일이기에.
“위명의 기사인 내가 섬기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다. 태양길드도, 다른 누군가도 아닌. 그러니 더욱 당당해져도 된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오로지 한 사람.
그 말이 주는 달콤함은 히아신스의 정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히아신스가 무영의 눈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 무언의 다짐이라도 한 듯이.
멘디니가 한쪽 팔을 잃은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당연히 히아신스를 추궁하고자 많은 이들이 몰려왔지만, 그럴 때마다 히아신스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멘디니 오라버니가 저를 추행하려고 했어요. 그는 제 기사로써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멘디니가 그럴 리 없다! 너는 지금 저 기사를 지켜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둘째 언니. 거짓말이 아니에요.”
“녀석은 네가 그림에 관심이 생겨서 다가간 게 전부라고 했어. 그런데 손을 잘라? 네가 그렇게 독한 아이인 줄은 몰랐구나.”
그 상황을 보고 살아남은 건 멘디니와 히아신스, 그리고 무영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쪽의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고, 그들에게 더욱 신뢰를 주는 건 안타깝게도 멘디니 쪽이었다.
“저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계속 거짓이라고 우겨서 어쩔 셈이죠? 무영님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라는 건가요? 이 많은 병사들로 저를 압박하면서요?”
수백의 병사들이 방 안과 밖에 배치되어 있었다.
허나 히아신스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진즉에 굽혔을 아이다.
둘째 언니라고 불린 여인도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모두 태양길드의 대들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인 주제에 그런 대들보 하나를 없애려고 한 거야. 목숨을 내놓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니?”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다른 수가 없군요. 이런 때를 대비해서 ‘검의 재판’이란 제도를 만들어놓은 거 아닌가요?”
“너······?”
여인이 눈을 크게 떴다.
검의 재판.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기존의 규칙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진실공방을 위해 만든 제도다.
그야말로 강한자가 옳다는 다소 이기적인 제도.
하지만 검은 진실만 말한다는 점에서 적당히 수긍이 가기도 하였다.
그걸 다른 이도 아닌 히아신스가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무영은 히아신스의 뒤에서 태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현명하군.’
히아신스는 어리고, 여리지만, 마냥 유순한 소녀는 아니었다.
무영과 자신을 지키려거든 이 방법밖에 없음을 직감적으로 깨우친 것이다.
숙일 게 아니라, 치고 나가야만 살 수 있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 했건만 스스로 깨달아줘서 다행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알아요. 서로의 인장을 걸고 벌이는 서로간의 재판이죠.”
태양길드의 자녀들은 모두 인장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 인장이야말로 그들의 힘이며 전부다.
검의 재판이란, 모든 걸 걸고서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이었다.
“저는 무영님을 저의 대리로 내세우겠어요. 제 상대는 언니가 되어주실 건가요? 아니면 지금 병상에 있는 멘디니 오라버님이?”
“너······ 원래 이런 아이였니?”
“제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건 언니들과 오라버님들이에요.”
히아신스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이에 기가 질린 여인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네가 바란다면, 알겠다. 검의 재판을 하자. 그 위명의 기사인지 뭔지를 믿는 모양이다만, 우리 태양길드엔 그보다 강한 사람들이 넘쳐난단다.”
후회해도 늦었다는 듯 히아신스를 한 차례 노려보곤 발을 옮겼다.
모든 병사들이 여인을 따라갔고, 이내 텅 빈 방 안에서 히아신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게 잘된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군요.”
“모두 잘 풀릴 거다.”
무영은 확신했다.
알렉산드로가 없는 지금.
히아신스로 말미암아 태양길드의 더욱 중심으로 침투할 예정이었다.
‘뿌리를 박고, 양분을 흡수한다.’
알렉산드로나 그 대리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들이 이곳엔 많았다.
철통같이 보안이 되어 있어서 무영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히아신스가 인장을 모아서 더 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런 장소도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비록 히아신스가 다른 길드와 혼약이 약속되어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의 일에 불과했으니까.
더불어서, 히아신스가 권한을 잡게 되면 그런 약속 따윈 그냥 무마시켜 버릴 수 있었다.
태양길드는 그런 힘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숨겨진 수많은 보물과 정보가 산을 이룬다고 전해진다.
무영조차 회귀 전에도 이곳을 제대로 털어본 적은 없었다.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흥분이 되는 일이었다.
잠시 후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히아신스가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말을 놨죠?”
“불편한가?”
“음······ 아뇨, 좋네요. 이게 좋아요.”
뭐가 좋은진 모르겠지만 히아신스가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둘이 있을 땐 히아라고 부르세요. 아주 친한 사람한테만 허락한 제 별명이에요. 한 번 해보세요. 히아.”
“나중에 부르지.”
“나중 말고 지금이요. 히아!”
“히아.”
동시에 히아신스의 볼이 붉어졌다.
“자, 잘했어요.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어색한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무영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침묵 속에서 신뢰가 싹을 텄다.
멘디니가 대리인으로 내세운 자는 붉은 수염을 가진 노련한 전사였다.
바스티우.
인류에서 가장 강한 300명 안에는 충분히 들 강자라고 전해지는 화염의 힘을 다루는 강자.
하지만 무영의 불길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스티우의 붉은 수염이 무영의 불에 타올랐다.
털썩!
이어 바스티우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투기장의 대전장소를 바라봤다.
이변.
천재지변에 가까운 이변이 일어났다.
아무리 무영이 강하대도 바스티우는 태양길드 내에서도 초강자로 분류되는 전사거늘!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던 멘디니가 거품을 몰고 졸도했다.
태양길드의 전통.
검의 재판에서 졌다.
재판에 건 것은 인장.
인장은 힘이며, 권력이며, 모든 것이다.
그걸 빼앗겼으니 멘디니의 미래가 불 보듯 뻔했다.
< 34. 히아신스(2) > 끝
ⓒ
< 34. 히아신스(3) >
태양 모양의 배지.
고작 엄지만한 작은 물건 하나지만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100여 가지의 영구지속스킬과 수많은 권한을, 이 작은 배지가 모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도라 불린 도둑이나 유명한 복제의 장인들이 인장을 복제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실화다.
복제는 결코 불가하며 태양길드 내에서도 15개가 전부이니 그 희소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이기셨군요······.”
재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히아신스는 붕 뜬 표정이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과 몽롱하게 풀린 눈은 아직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솔직히, 상대가 그 ‘바스티우’라는 말을 듣곤 포기하고 있었다.
태양길드 내에서도 스무 손가락 내에는 꼽히는 남자.
그는 살육을 좋아해서 싸운 상대를 무조건 죽인다. 하지만 엉덩이가 무겁다. 웬만한 유혹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을 이를 멘디니가 대리로 내세운 것이다.
아마도 다른 형제자매들이 도움을 줬을 테지.
이에 ‘마지막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웬걸.
“속고만 살았나?”
“바스티우님이라고요! 일당백, 혼자 던전 하나를 초토화 시킨 일이나 ‘아이엠’길드를 격파한 걸로 유명한······ 어떻게 이기리라 생각하겠나요.”
“너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네 손에 있는 건 의외로 많아.”
자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이점들이 있는지 깨닫게 된다면 히아신스도 놀랄 것이다. 단지 지금은 그 사용법을 모를 뿐.
히아신스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작고 청초한 소녀는 여전히 얼이 나가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어째서 무영님과 같은 분이 제 곁에 있기를 자처했는지.”
“사람을 구한 건 그쪽이지 않나?”
엄밀히 말해서 먼저 사람을 구한 건 히아신스 쪽이었다.
호위를 구하는 종이를 대도시에 뿌린 게 히아신스의 관계자였으니.
하지만 히아신스의 입지가 워낙 애매하고, 그걸 대도시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지라 섣불리 경호를 맡겠다며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히아신스에 대한 소문을 보자면 대충 이렇다.
아르페지오 길드로 팔려가는 비운의 소녀.
권력다툼의 희생자.
신데렐라······ 괴롭힘을 당해서 이러한 별명마저 붙은 모양이었다.
사람이란 뭐든 싸움이 일어나면 희생양을 찾기 마련. 그리고 거기서 막내이자 힘이 가장 없는 히아신스가 선택됐을 따름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도 그 사실은 안다.
괜히 호위로 등록했다간 새우등만 터질 거라는 걸.
호위가 되겠다며 나선 사람도 한몫 챙기려거나 히아신스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쭉정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우연히 무영이 얻어걸렸다.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세상 경험이 적다. 여태껏 긴 시간 수련을 해왔지.”
적당히 무영은 자신에 대해 양념을 쳤다.
히아신스도 마지못해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바스티우님을 이길 정도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되겠죠.”
무영에 대한 조사는 진즉에 끝났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솟아난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초야에 묻혀 수련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현재의 히아신스는 무영이 물을 불이라고 해도 최대한 믿으려고 할 것이었다.
무영은 느긋하게 말했다.
“세상을 경험하기에 이곳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은 자신할 수 있어요. 제 옆만큼 장관인 곳은 없다고.”
무영이 앉은 장소는 특등석이다.
세상경험? 태양길드에 있다 보면 별의별 경험을 다 하게 될 것이었다.
무영은 입가를 살짝 들어올렸다. 처음 봤을 땐 그냥 허약한 소녀였는데, 마음먹기에 따라서 제법 다부진 인상도 주는 것이 퍽 신기한 것이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히아신스가 한숨을 내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이건 어쩌죠?”
태양 모양의 인장.
‘검의 재판’에서 승리하고 그 인장을 얻었다.
인장의 소유권은 이미 히아신스에게 귀속되어 버렸다.
“네 것이다. 응당 누려야할 특권이지.”
“두 개면 B급 보물창도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어요. 말 그대로 B랭크 무구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이죠. 최대 세 개까지 손을 대도 괜찮을 거예요.”
“필요 없다.”
히아신스는 나름 호의로 말했지만, B랭크 무구 정도면 굳이 욕심낼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받지 않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뭐라도 주고 싶게끔 안달이 나게 만드는 편이 낫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내려 한 행동이지만 무영이 받아주지 않자, 히아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걸 제가 쓸 일이 있을까요?”
“인장은 힘 그 자체다.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저는 곧 외인이 되는 걸요.”
“아르페지오 길드에 가고 싶은가?”
“설마요! 저도 그런 막돼먹은 사람에게 팔려가긴 싫어요. 그러기엔 제가 아깝다고 생각해요.”
히아신스가 급구 부정했다.
무영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인장을 더 모아라. 네 의사를 밝혀도 누구하나 겉으로 반대하지 못할 힘을 소유하면 되는 것이다.”
인장을 모아라.
히아신스에겐 매우 잔인한 말이었다.
결국 형제자매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하라는 뜻이었으니까.
“인장을······.”
두 개의 인장.
히아신스가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무영님. 정말 괜찮을까요? 무영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너무 거대하고 많아요.”
“단언하지.”
무영이 무겁게 말했다.
단언. 확신. 이런 표현은 잘 안 쓰지만, 지금은 제법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이어서 무영은 히아신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곤 한자 한자 천천히 입에 담았다.
“이곳에서 나를 이길 자는 없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렸군.”
거대한 회장 안.
태양길드의 실무들이 모여앉아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가짜 위명의 기사를 끌어내야 합니다.”
한 남자가 말했다.
현재 대화의 중심주제는 당연히 바스티우를 이긴 남자에 관해서였다.
하지만 명분이 없었다.
남자, 무영은 태양길드 소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다.
히아신스 개인의 호위로써 고용된 것이다.
“무슨 명목으로?”
그걸 모두가 안다.
히아신스를 압박해서 무영을 끌어내리는 계획도 실패했다.
도리어 당당하게 받아치는 모습을 보며, 다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히아신스는 놈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다시 검의 재판을 열까요? 멘디니의 복수라는 명분아래에?”
“멘디니. 그 반푼이는 좀 심했지.”
“딱히 놈을 위해 나서고 싶진 않군.”
멘디니의 주가는 이미 끝장났다. 누구도 멘디니를 더 이상 옹호하지 않았다.
이미 반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더 이상 이용할 가치도 없는 녀석을 명분삼아 검의 재판을 연다? 그처럼 창피한 일도 없을 것이다.
“형제님들. 제가 처리하지요.”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바닥을 내려다보던 남성이 말했다.
“이드랜저. 네가?”
“이런 일에 형제님들의 손을 굳이 더럽힐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소사가 있을 때, 표면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항상 이 남성이 나서곤 했다.
사실 은연중 모두가 그가 나서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눈에 신뢰어린 눈빛이 새겨졌다.
이드랜저가 이윽고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살수림에 의뢰를 넣겠습니다.”
“······!”
“살수림······.”
모두가 웅성거렸다. 모두가 놀랐다.
살수림. 그 세 글자가 가지는 힘은,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안다.
하지만 함부로 언급해선 안 된다. 살수림은 태양길드와 다른 거대 길드들의 치부. 그들이 이권의 독차지를 위해 만들고 유지하는 단체가 바로 살수림인 것이다.
지금은 아예 독립하여 의뢰를 골라받고 있다지만······.
헌데 이드랜저가 살수림을 언급한 것이다.
“바스티우를 처리할 정도의 강자입니다. 어지간한 암수는 먹히지 않겠지요. 오히려 반발만 일으킬 뿐. 그러니 그 전에 조용히 처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강수를 두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다.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이드랜저가 계속해서 말했다.
“형제님들은 조용히, 침묵만 해주시면 됩니다.”
한 명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드랜저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침묵은 곧 긍정임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복면을 쓴 살수가 태양길드의 성머리에 올라앉았다.
그 숫자가 족히 스물.
발에 닿아도 소리가 하나 없다. 심장 뛰는 소리와 숨소리마저 스스로 조절하고 있었다.
가히 일류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들이 벽을 타고 내려와 무영이 기거하는 방에 발을 들였다.
촤촥!
안을 살피고 들어가는 순간, 두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벽이나 어둠 속에서 뱀들이 튀어나와 살수들의 목을 쥐어뜯었다.
“반가운 손님들이로군······.”
어느덧 살수들의 속에 섞인 한 남자가 말했다.
살수들이 급히 당황하여 멀어졌지만, 남자가 한 발 더 빨랐다.
남자가 살수 한 명을 손에 쥐자 살수의 전신이 흐믈흐믈 녹아내렸다.
남자는 아타락시아였다.
본래는 무율세가의 가주인 무율진의 명령만을 받는 살수로, 마신의 영역에서 무영을 습격하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무영의 암습에 실패하고 패배하여 그대로 언데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나 아타락시아는 무영조차 놀랄 수준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몸 하나하나가 오로지 암살만을 위해 단련된 것이다.
극독을 몸에 품고, 수많은 뱀을 다루며 적을 통째로 씹어버린다.
아타락시아를 상대하려거든 일류의 살수 스무 명이 아니라 특급살수, 혹은 10번 대의 대살수들이 직접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툭!
파아악!
어둠속의 공방.
순식간에 일류의 살수 스무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타락시아가 다시금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선물은 잘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아타락시아.”
그리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남자, 무영이 말했다.
무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예.”
“이드랜저. 놈을 죽여라.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스스슥.
아타락시아가 모습을 감췄다.
저들의 회합을 무영이 모를 리 없었다.
무영은 이미 성 곳곳에 자신의 힘을 심어놓았다. 저들은 전혀 예상조차 못하고 있겠지만, 성에 들어온 건 무영만이 아니란 소리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암살에 성공했다고 보고 한참 방심하고 있을 터.
노린다면 지금이 적기다.
암살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 방비가 더욱 두터워질 것이었다.
‘살수림을 동원했군.’
무영은 살수들이 입은 옷가지 따위를 바라보았다.
빠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살수림······ 무영과는 정말 뗄 수 없는 묘한 관계로 묶여있는 것 같았다.
이드랜저가 죽었다.
“이, 이게 대체······.”
“허!”
머리가 잘렸다.
이후 입구에 설치 된 장대 위에 걸렸다.
이른 아침이 되자 모두가 경악하며 재빨리 사건을 은폐했다.
하지만 이드랜저의 죽음은 대도시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멘디니의 패배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이것은 무영이 그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관계자들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무영을 추궁하려면 살수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엮인다. 살수림이 드러나면 그들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반면 관계되지 않았던 이들은 이 사건이 조명되길 바랐다.
“태양길드 안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라니. 이 일은 나와 화룡기사단이 전권을 맡고 조사하겠다.”
그중 한 명이 태양길드 제1 기사단인 화룡기사단의 단장 ‘레논’이었다.
태양길드 내에서는 청렴결백의 증명처럼 여겨지는 남자.
역시 태양의 인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
레논과 그 기사단이 전권을 맡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 34. 히아신스(3) > 끝
ⓒ
< 34. 히아신스(4) >
이드랜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레논은 기회를 잡았다.
화룡기사단은 태양길드의 모범이요 가장 큰 기둥 중 하나였다.
허나 청렴결백? 관대한 전사······ 모두 개소리다. 무영은 놈을 잘 알고 있었다.
‘욕심 많은 호랑이.’
호랑이는 맞다.
알렉산드로가 대호라면, 레논은 그냥 평범한 호랑이 중 하나다. 작은 사냥감을 잡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고 틈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니.
다만, 욕심이 많을 뿐이다.
겉으로는 칭송받길 원하면서 속내는 시커멓기 그지없는 놈.
지금쯤이면 이드랜저의 죽음을 빌미로 전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을 터였다.
오히려 레논에겐 무영의 행동이 천운으로 다가왔을 테지.
누군가가 행동을 사린다면, 누군가는 더 치고나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갈 것이냐.’
무영의 귀와 눈은, 그들은 모르겠지만 이미 태양길드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저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덕분에 레논의 향방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영도 레논의 행동이 어디까지 닿을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드랜저의 죽음에 동조한 사람을 찾아라! 먼지 한 톨까지 샅샅이 뒤져!”
“레논!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모두가 경쟁자다.
어제 아군이었다고 오늘도 아군이란 법은 없었다.
레논은 형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부에서 우리의 사람이 죽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번 일은 묻을 순 없다. 뭐 하느냐!”
물 만난 물고기.
이런 일이 터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레논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한 번 기세를 탔으니 멈추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의 방향이 부 길드 마스터에게도 닿았다.
‘압둘론.’
알렉산드로를의 뒤를 이은 2인자.
하지만 압둘론은 이미 손과 발이 모두 잘려나갔다.
그 하나의 권력보다, 알렉산드로의 형제자매의 힘이 더욱 뛰어났던 탓이다.
압둘론의 측근들은 알렉산드로가 행방불명이 된 즉시 좌천을 당하거나 멀리 유배되었다.
말하자면 현재 압둘론은 살아있는 송장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징성은 존재했다.
부 길드 마스터라는 직위.
압둘론 덕에 태양길드가 꿈쩍 않고 있는 것이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을진대.
어차피 손발 모두 잘라냈으니 더 이상은 불가침으로 남겨둬도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레논은 끝내 한 발 더 나갔다.
레논이 화룡기사단과 함께 압둘론의 서재와 집 등을 침범했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부 길드 마스터의 상징성마저 무시한 처사.
그야말로 건들면 죽이겠단 의사를 철저하게 비쳤다.
무소불위.
당장은 레논을 막을 이가 없어보였다.
알렉산드로가 사라진지 어언 45일.
앞으로 45일 동안 알렉산드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대회의를 통해 차기 길드마스터를 정하게 된다.
레논은 순식간에 차기 길드마스터 후보 1위로 오르게 된 것이다.
*
촤촹!
표창이 날아들었다.
무영은 급히 몸을 날려 비탄을 휘둘렀다.
히아신스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굳었지만, 무영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졌다.
레논의 행보를 눈여겨보는 것만 해도 하루가 부족한데 제3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하물며 그들의 정체가 더욱 신경 쓰였다.
‘닌자들?’
다섯으로 이뤄진 닌자들이 이른 대낮에 성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닌자들은 워낙 기상천외한 방법을 많이 써서 무영도 쉽게 감지해낼 수 없었다.
그래도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눈치챘다.
하여 그들의 공격도 막아낸 것이다.
닌자는 일본에서 넘어온 이들이 만든 조직.
조직의 이름조차가 ‘닌자’였으며 그곳을 움직이는 여자를 무영은 알고 있었다.
오오츠키 유카!
눈앞에 선 다섯 명의 기도나 움직임은 영락없는 닌자가 맞았다.
하지만 닌자들이 대관절 왜 히아신스를 노리고 습격을 해온단 말인가?
닌자는 분명 살수림과는 성향이 달랐다.
애당초 의뢰를 받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어쩌면 태양길드의 내분에 오오츠키 유카가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스슥.
다섯 닌자는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그대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영의 민첩함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우친 것이다.
“기다려라.”
놈들을 그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무영은 짧게 한 마디를 남긴 후 닌자들을 쫓았다.
히아신스는 떨리는 가슴을 천천히 부여잡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습격하리란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실제로 닥치니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히아. 강해져야 해.’
스스로를 다그쳤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에 자신을 불러주었던 이름을 되뇌며.
고작 이 정도로 떨릴 순 없다고.
그때였다.
사아악.
닌자 한 명이 땅에서 솟구치듯 나타났다.
마치 돌과 융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둔술을 익힌 닌자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대의를 위해 죽어줘야겠다.”
무영이 없는 틈을 노렸다.
히아신스가 이를 꽉 깨물며 치마를 들치고, 다리에 묶어둔 단검을 꺼내들었다.
비록 전투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히아신스도 태양길드의 사람이다. 어느 수준 이상의 무술을 갈고 닦았다. ‘유망주’는 아니었지만, 싸우는 방법조차 모르진 않았다.
‘살아야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닌자에겐 닿지 않았다.
어느덧 닌자가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위장이 아니었다. 정말 땅과 융화되어 이동하고 있었다.
히아신스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바로 밑에서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는 것마저 파악하고 막아낼 순 없었다.
“······! 놔!”
급히 발을 차냈지만, 손은 그대로 히아신스를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땅이 늪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끌려가면 돌 속에서 죽으리란 걸 히아신스도 알았다.
알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신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무영님.’
그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푹!
히아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나 더 이상 발이 빨리는 느낌이 없었다.
이에 의아함을 느끼고 눈을 뜨자, 한 사람이 히아신스의 앞에 서있었다.
“아······! 무영님!”
무영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답하지 않았다.
닌자의 머리 위에 검을 꽂고, 그대로 비탄을 털어낸 뒤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히아신스를 위한 배려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 그녀만의 호위무사.
이 상황에서 가슴이 아릿하지 않으면 소녀가 아니다.
애써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히아신스가 물었다.
“다, 다른 닌자들은요?”
“······.”
무영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생각할 게 많으신가 보다.’
히아신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닌자들을 잡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그냥 왔을 수도 있다.
그게 못내 감동스러웠다.
“고마워요. 그, 그런데 저 좀 빼주실래요?”
절반 정도 발이 빠졌다. 그대로 빠져나가기가 힘든 상황.
하지만 무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생각이 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해를 할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이쯤은 제가 해볼게요.”
히아신스가 끙끙대며 발과의 사투를 시작했다.
무영은 계속해서 닌자들을 쫓았다.
‘혼의 꼬리.’
분신 하나를 히아신스에게 보내놓는 철두철미함마저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닌자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았다.
닌자들은 신속하게 흩어졌고, 무영이 따라잡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과거 무영이 누구였는지 알았다면 이런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자결하거나 그대로 무영에게 죽었겠지.
하지만 저들은 무영의 과거를 모른다.
하여, 무영은 보다 쉽게 닌자들의 종착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레논······.’
놀랍게도 그 종착점에는 레논이 있었다.
어느 사이에 닌자들과 결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닌자들과 한통속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실패했다고?”
“방해꾼이 있었습니다. 우회해서 히아신스만을 죽이려 했지만 이미 눈치를 챘는지 돌아왔더군요. 동료와 신호가 끊겼습니다.”
“보나마나 무영, 그놈이겠지.”
레논이 턱을 쓸다가 이어서 말했다.
“알렉산드로의 행방은 알아보았느냐?”
“아직······.”
“젠장. 설마 우리들이 파놓은 덫을 알아보고 미리 도망친 건 아니겠지.”
“레논님. 더 이상의 발언은.”
“안다. 그러나 이곳에 누가 들어오겠느냐? 나, 레논이 지키는 이 방에 말이다.”
“······ 압둘론은 어쩌시겠습니까?”
“그 늙은 너구리는 죽일 수 없다. 분명히 수족을 전부 잘라냈는데도 묘한 자신감이 있단 말이지. 아직 꺼내지 않은 패가 더 있는 듯하다. 그것도 한 번 알아보아라.”
“알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유카와 너희들의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
닌자들이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방을 벗어났다.
아무도 모르게 성 내로 어찌 들어왔는지, 그 부분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며 레논이 닌자들과 결탁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레논도 신중하다는 뜻이었다.
‘닌자. 레논. 압둘론. 사령세가. 그리고 알렉산드로.’
모든 일이 교묘하게 맞춰진 채 돌아가는 듯했다.
무영의 기억이 맞는다면 알렉산드로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안 나타나는 걸 보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미래가 조금은 바뀐 것 같았다.
‘조금 더 감시를 강화해야겠군.’
감시의 범위를 넓혀야겠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기세를 탔다.
레논을 보며 무영은 생각했다.
행동은 무영이 하고, 이득은 레논이 전부 챙기고 있는 형상.
“받아라.”
무영은 히아신스에게 인장을 넘겼다.
더는 시간을 끌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방에서 한숨을 내쉬던 히아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웬 인장이에요?”
“이드랜저의 것이다. 레논이 그의 방을 조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았다.”
히아신스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발각되었다간 큰 일이 날 거예요.”
“지금 걸린다면 그렇겠지. 허나 이드랜저는 그 인장을 너에게 양도했다.”
“양도 했다고요?”
“자필로 써진 편지가 있더군.”
무영이 폼에서 편지 한 장을 건넸다.
히아신스는 받은 즉시 편지를 뜯고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럴수록 몸의 떨림이 커졌다.
“정말 이드랜저 오라버니의 자필이군요. 거기에 도장까지······ 하지만 이해가 안 돼요. 어째서 이드랜저 오라버니가 인장을 저에게 양도했을까요?”
갑자기 나타난 닌자부터 모든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오스란 단어가 이처럼 어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살짝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히아신스가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어깨만 으쓱해보일 따름이었다.
아타락시아에게 시켜서 이드랜저를 조종했단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유용하군.’
아타락시아가 다루는 뱀은 종류가 많았다.
일반 독부터 환각을 보게 만드는 독, 마음을 움직이는 독 등 숫자를 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드랜저를 다루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그걸 히아신스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사람은 죽기 전에 각성하기도 하지. 네가 보아온 형제자매들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같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일 아니겠나?”
알렉산드로가 사라진 뒤, 히아신스의 형제자매들은 바뀌었다.
원래의 성격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만.
이런 비유를 들자 히아신스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하지만 제가 이 인장을 갖고 있는 걸 레논 오라버니가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인장은 힘이지. 두 개는 불안하지만, 몇 개의 인장을 더 모으면 아무리 그라도 무시할 순 없을 거다.”
레논이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이유다.
인장들이 모일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검의 재판을 계속 열어라.”
“검의······ 재판을요? 명분이 없어요.”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다.”
히아신스가 물음표를 그리며 무영을 바라봤다.
그래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히아신스 나름대로 이미 마음을 세운 듯싶었다.
게다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레논의 독주를 막을 수 없다.
닌자들과 결탁한 사실도 알았으니, 이제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가 없다.
하루아침에 판도가 바껴도 지금 상황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무영은 입가를 씰룩이며 다음 행로를 떠올렸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다.’
무영에게 있어선 그다지 어렵지만도 않은 일이었다.
< 34. 히아신스(4) > 끝
ⓒ
< 34. 히아신스(完) >
높은 위치에 오랫동안 있었던 사람일수록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기 마련이다. 하여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무영은 검의 재판이 계속해서 열리길 바랐고, 그를 위해 한 가지 수를 냈다.
바로 ‘소문’이다.
“들었어? 알렉산드로님의 행방불명에 이드랜저 도련님이 관여하고 있었대.”
“이드랜저 도련님이? 난 레논님이라고 들었는데?”
“아만다님께선 살수림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세상에! 그 천벌 받을 곳이랑 말이야?”
악의적인 소문.
하지만 과연 ‘악의’만 있는 걸까?
모두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들이다. 100% 다 들어맞진 않지만 속으론 뜨끔할 그러한 소문.
가뜩이나 태양길드는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소문은 날개 돋친 듯 뻗어나갔다.
당연히 당사자들은 한사코 부정했다.
“사실무근입니다. 제가 무슨 이유로 살수림과 내통하겠습니까?”
“헛소문을 퍼트린 자를 찾아내 엄벌하겠소!”
히아신스를 제외한 모두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소문은 적대 세력에 명분만 내어주는 꼴이었다.
아무리 태양길드가 최강의 조직이래도 그곳을 노리는 곳이 없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물어뜯는 곳이 천지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히아신스가 움직였다.
히아신스는 유일하게 ‘청렴결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소녀였다.
모든 더러운 소문과 일에서 히아신스만은 결백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다른 이들은 쉬쉬해도 히아신스만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였다.
“얼마 전, 저를 공격한 암살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살수림의 살수들이었죠. 둘째 언니, 그렇게 저를 죽이고 싶었나요?”
히아신스가 역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둘째 언니라고 불린 여인의 표정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그건 네 오해다. 누군가가 잘못된 소문을 퍼트린 거라는 거, 너도 잘 알잖니?”
“과연 소문일까요? 그럼 이 증거들은 뭐죠? 저를 공격한 암살자의 품에서 찾은 물건이에요.”
반지였다.
그것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고가의 희귀품이었다.
그곳에 새겨진 문양, 드워프의 솜씨가 가미 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
이 반지의 소유자가 여인이라는 건 형제자매들 모두가 안다.
“저, 저게 어떻게?”
“이래도 발뺌하실 건가요?”
“나는 아니야! 왜 그 반지를 네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내가 살수림과 내통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사실 저 증거물은 무영이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여인이 살수림과 통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태양길드의 간부층이라면 살수림과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있다고 봐야한다.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여인이 살수림을 통해 히아신스를 죽이려고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영을 죽이려 한 것이지만, 무영이 죽으면 히아신스가 죽는 것과 같다.
히아신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둘째 언니. 검의 재판을 신청하겠습니다. 시시비비는 그곳에서 가리지요.”
“너······ 미쳤니? 네가 그러고도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애!”
“일주일 뒤 봬요.”
히아신스는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의와 욕설을 애써 무시하며 발길을 옮겼다.
덜덜덜!
여인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히아신스의 어깨가 떨려왔다.
무영은 조심히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했다.”
“그냥, 조금 오한이 드는 것뿐이에요. 겁을 먹은 게 아니에요.”
“안다.”
굳센 모습이 가면일지라도 지금은 써야할 때였다.
재판이 열리고 무영의 상대로 지목된 이는 ‘역전의 투사 루카스’였다.
창을 들고, 투척을 즐겨하지만 근접에서도 약하지 않은 노병.
서열 300위권 내부터는 ‘현자의 공방’에서 ‘가장 강한 300인’이란 책을 매년 내고, 공식적으로 그 순위를 매겨서 책정을 하게 되는데, 역전의 투사 루카스는 정확히 277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현자라고 칭해지는 이들이 머리를 짜내어 결정한 순위다.
그 순위는 매년 한 번씩 갱신되지만 루카스는 오랜 시간 동안 300위권 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일전에 상대한 바스티우보다 한급은 높은 상대.
이번 역시 모두가 루카스의 승리를 점쳤다.
퍼어억!
쿵!
······ 지금 날아가는 게 무영이 아니라 루카스라는 게 유감일 따름이었다.
무영은 벽에 박힌 루카스가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승리의 표시.
하지만 대전장은 여전히 썰렁했다.
277위에 랭크 된 ‘진짜 강자’마저 처리한 것이다.
정말 위명의 기사란 말인가?
역전의 투사라고 불리는 루카스가 선전을 하긴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졌다.
모두가 안다. 오히려 중반지점까진 루카스가 유리했단 걸.
‘가속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정도가 한계로군.’
무영도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지금껏 결을 읽거나 시간의 가속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 무력으로 바스티우와 루카스를 이겼다.
“이, 이건 거짓말이야! 있을 수 없는 일!”
여인이 울부짖었다.
승패의 결과를 믿고 싶지 않을 테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저 여인은 모든 걸 잃었다.
히아신스는 얌전히 전율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도발적으로 노려보는 것.
‘다음 사냥감은 너다’라는 인식을 주는 것!
그것이 히아신스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머지 형제자매들의 표정도 덩달아 뭐 씹은 것 마냥 변했다.
게 중에는 무영의 상처를 보고 바로 다음도전을 해오는 자도 있을 터였다.
‘다 잡아먹어주마.’
무영은 내심 웃었다.
태양길드. 알렉산드로가 버티고 있는 이곳은 철옹성이었다.
무영이 끼어든다고 흔들릴 일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태양길드는, 속빈강정과 같았다.
스스스슥!
적강시 한구가 바스러진다.
배승민이 손을 뻗자 검은 고리가 뛰쳐나가 주변의 적강시를 묶었다.
적강시는 흑강시보다 한 단계 낮은 급으로서, 그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아크리치인 배승민을 어찌할 순 없었다.
“너흰 누구냐? 누군데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거지?”
강시술사의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하지만 답을 해줄 리 만무.
“죽은 다음에 알아보려무나.”
타칸이 죽음을 선고했다.
강시술사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 찰나의 시간에, 전신이 난도질을 당했다. 수십, 수백갈레로 몸이 찢어지며 그대로 조각난 것이다.
모든 적을 소탕한 뒤 그 광경을 보고 배승민이 입을 열었다.
“검술이 진일보했군.”
“흥. 이 정도로는 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듣기로 너는 원래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다고 들었다. 왜 떠나지 않는 거지?”
타칸이 검을 집어넣고는, 배승민을 위협하며 노려봤다.
“처음에는 떠나려고 했다. 무영. 그놈은 나보다 한참 약했고, 단지 내 약점을 쥐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순식간에 추월당했다. 하물며 놈은 기상천외한 기술마저 익혔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전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
타칸은 이를 갈았다.
무영 자체가 타칸의 약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시간을 다루는 기술과 결을 보는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미련 없이 떠났겠지만, 두 기술만은 무슨 짓을 해도 가져오는 게 불가능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검술실력이 오르긴 하였다.
“전사의 비애로군.”
배승민이 짧게 함축했다.
그는 전사가 아니었으므로 타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다.
“그보다 서두르자. 표식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을 봐야한다.”
타칸이 부질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강시술사의 몸을 뒤졌다.
놈들의 몸에는 각기 다른 표식이 있었고 그것을 해석하면 다음 예정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 전체를 훑을 순 없었다.
사령세가는 철저히 점조직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이어 강시술사의 몸에 난 표식을 확인한 배승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은······ 하늘도서관이로군.”
여섯 개.
모은 인장의 숫자다.
과반수는 아니지만, 인장 여섯 개는 모든 의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숫자이자 힘이었다.
무영이 한계라고 생각하며 검의 재판을 열었던 이들이 한 결 같이 패배한 탓이다.
이쯤 되자 그들도 이상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영도 마지막엔 ‘4배 가속’을 사용했고 남은 이들도 무영의 힘이 여태까지 보았던 게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 뒤론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하여간 인장이 여섯 개가 있으면 ‘숨겨진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가능했다.
“원래 이곳은 길드마스터에게만 허락 된 장소에요. 특수정보기관에서 모은 정보를 다 이곳으로 내리죠.”
히아신스가 긴장하며 말했다.
길드의 지하.
수많은 보안을 해제하고, 인증을 받고 나서야 겨우 도착한 장소.
무영의 눈앞으로 수많은 문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수많은 파이프와 같은 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보안을 요하는 문서들이 옮겨지는 중이었다.
‘여기다.’
무영이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했던 장소가 이곳이다.
모든 정보가 총망라 되어있는 곳!
무영은 과거로 돌아왔으나, 그 기억은 완벽하지 않았다.
지금 시기에 무영이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수림에 납치되어 십여 년이 지나고 처음 나왔을 정도였다.
대혼돈이 시작되기 직전부터의 정보가 전부였고, 나머진 고작 상태창 시계의 히스토리로 확인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로의 행방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양길드의 정보기관은 샐 수 없이 많다. 모두가 개별적이고 중립적이며 각기 다른 권한을 갖는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길드 마스터인 알렉산드로밖에 없었다.
“무영님. 그리고 부디 이걸······ 받아주세요.”
히아신스가 조심스럽게 귀걸이 한 쪽을 건넸다.
무영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태양길드에 있었나.’
귀걸이에 집중하자 관련된 정보가 떠올랐다.
명칭: 정복자의 귀걸이
등급: A++
내구: 55,000
분류: 장착형
효과: 정복자의 필수품
* 순수 지능과 지혜의 합이 400이상이면 착용가능
* 정복한 영토의 숫자, 혹은 수준이 높을수록 재생력이 증대된다.(+177%)
* 지능+20
* 지혜+20
** 약자멸시 반지와 함께 착용 시 ‘마법저항+50’과 함께 ‘황야’ 스킬 사용가능
“A급 창구를 돌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무영님이 착용하고 계신 반지가 약자멸시 맞죠? 아, 오해는 마세요. 저는 정보를 그림으로 볼 수 있어요.”
히아신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자멸시의 반지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그림으로 확인했고, 그게 무영이 착용한 것과 같았기에 가져왔단 뜻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우연은 아닐 것이다.
태양길드가 소유한 창구는 하나 같이 압도적으로 크다.
A급 창구라고 다르진 않다. 모든 A랭크 무구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만한 판정을 받으면 모두 창구 안에 들여놓기 때문이다.
몇날며칠 밤을 새어가며 무영에게 도움이 될 무구를 찾았으리라.
눈 밑의 거뭇거뭇한 그늘이 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맙다.”
스스로 찾고자 했으면 시간을 한참이나 잡아먹었을 터였다
귀걸이를 착용하자, 몸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약자멸시’와 ‘정복자의 귀걸이’를 착용했습니다.>
<세트효과가 발동됩니다.>
<‘황야’는 랭크가 없는 고유결계용 스킬입니다.>
고유결계!
무영에게 맞춰지는 특수한 결계를 뜻함이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모든 상황마저 뒤집을 수 있는 힘이 ‘고유결계’에는 있었다.
뜻밖의 소득.
무영은 히아신스의 머리에 한 차례 손을 올린 뒤, 계속해서 문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도록 종이의 산을 뒤졌다.
‘허.’
그리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찾게 될 줄은 몰랐군.’
무영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타칸과 배승민이 하늘도서관에 올랐다.
모두의 이목을 피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이는 배승민과 타칸의 예상을 한참 웃돌기에 충분했다.
“아수라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네놈들은 아수라의 부하렸다?”
디디딩.
비파를 튕기며 나타난 남자가 있었다.
터번을 눌러쓰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겨댔다.
“보아하니 너희들이 우리 대업을 방해한 놈들이구나. 허허.”
얼굴은 젊었지만 목소리나 톤은 늙은이가 따로 없었다.
남자가 비파를 튕기자 주변 환경이 바뀌며 결계가 생성되었다.
“고유결계······.”
배승민이 당했다는 듯 말했다.
설마 이처럼 빠르게 결계를 발동시킬 줄은 배승민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너, 뭐냐?”
타칸이 물었다.
이 요상한 기운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타칸조차도 처음 느끼는 기운이었다.
주변의 세계가 점차 남자의 색깔로 물들어갔다.
그러자 비파를 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팔부신중 마후라가의 후신인 ‘월하’라고 한다.”
< 34. 히아신스(完) > 끝
ⓒ
< 35. 천마신교(1) >
무영은 조금 더 창구를 살펴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알렉산드로. 어째서 네가 몸을 숨겼는지 이제야 알았다.’
사령세가와 태양길드가 얽힌 이야기다.
하지만 무영의 기억 속 정보와 조금은 다른 노선을 타고 있었다.
이 사건, 그러니까 사령세가가 침투하여 일을 벌이는 건 본래 실패로 끝난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역풍을 맞고 조용히 마무리된다. 모든 세가와 길드가 힘을 합쳐 몰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힘을 합치지 못했다.
사전에 처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령세가가 대도시의 중심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다.
‘나비효과도 이런 나비효과가 없군.’
아홉길드 중 태양길드가 중심이라면, 오대세가는 무율세가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헌데 무율세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고대의 정령, ‘뒤섞인 공포’의 건으로 상당히 위축되어있는 상태였다.
무율세가가 힘을 싣지 못하자 나머지 세가들도 눈치를 봤다. 사령세가를 굳이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분열된 힘은 파고들기 좋다.
알렉산드로는 그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것이다.
그 능구렁이 같은 자가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숨길 리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태양길드의 지보인 태양의 거울을 가지고 움직이는 중이다. 사령세가의 궁극적인 목표를 저지하고, 그 힘을 온전히 빼앗기 위해서.’
한 마디로 독식을 하고자 자취를 감췄다는 뜻이다.
그가 그래야 할 정도의 일이 무엇이 있을까?
대도시의 왕으로 군림하는 그조차 군침이 돌게 만든 물건을 사령세가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이제는 무영도 알았다.
스릉.
무영의 손이 비탄에 닿았다.
태양길드가 문제가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팔부신중 마후라가의 전승자.’
놈이 마지막 배후다.
사령세가도 결국엔 놈이 조종하는 말일 뿐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했지.’
천마신교. 그런 집단은 마계에 없다.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 듯 나타났다.
대혼돈이 일어난 뒤의 일이다.
거대한 성을 세우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신성도시 뮬라란마저 뛰어넘었다.
이에 이단심판관이 이천의 병력을 끌고 천마신교를 찾아가 피살된 사건이 벌어지며 ‘신성전쟁’이라 망명된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허나 결판은 쉽게 나지 않았다.
5만의 성기사들과 10만의 사제들, 성자와 성녀 모두가 합세했음에도 말이다.
신생의 교단이라 하기엔 천마신교가 지나치게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강함의 밑바탕이 되어준 건······.
‘놈은 악마를 사육한다.’
악마다.
교주, 월하는 악마를 다루는 법을 안다.
한때는 마왕이 아니냔 소문마저 돌았지만 놈의 절반은 인간이다.
악마와 피를 섞은, 또한 초월체였다.
신성도시 뮬라란이 결국 승리하긴 하였으나 덕분에 마왕과 마신들의 침범이 이뤄질 때 그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한다.
지금 놓치면 앞으로 10년은 찾을 수 없고, 대혼돈 이후 인류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큰 공조를 할 것이었다.
무영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천마신교의 교주 월하가 노리는 건 하나다.
‘천마.’
하늘의 마.
악의 원류.
팔부신중을 모두 모으면 부처가 소환된다고 하였던가?
부처가 소환되어서 인류를 구제할 거라고. 그런 기밀정보가 있었다.
천마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하늘에서 진정한 마가 내려와 인류를 구제한다.
하지만 그 구제의 방식이 ‘살육’으로 점칠 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놈은 지금 대도시를 제물로 그걸 소환하려 하고 있다.’
온갖 던전에 시련을 만든 건 연습이다.
놈은 지금 대도시에 ‘천마의 시련’을 새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새겨지면, 무영도 결과를 확언할 순 없지만 대도시가 사라지는 수준의 재앙이 일어날 터였다.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알렉산드로는 이 일을 못 막는다.’
월하는 초월자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알렉산드로가 10강에 든다고 하더라도 월하를 이길 순 없다.
태양의 거울로 일발역전을 노려볼 순 있겠지만, 무영이 기억하는 월하는, 빈틈이 없다.
암살불가판정의 대상이었다.
물론 알렉산드로의 의도는 알겠다.
자신이 태양길드를 비우면 사령세가가 더욱 설칠 것이고 그 배후인 월하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거기까진 맞았지만 알렉산드로의 오판은 상대의 강함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영이야 기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알 방법이 없기도 했다.
‘내가······ 막아야겠군.’
지금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 사람이 무영밖에 없었다.
허나 이대로 나뒀다간 무영까지 휩쓸린다.
그런 일은 사절이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월하를 죽이고 아수라와의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가 얻으려한 진짜가 무엇인지 확인한 뒤 그것을 가로챈다.
무영은 이 두 가지만 하면 족했다.
결계는 누군가의 침입을 막는 용도다.
그리고 고유결계는 세상의 침입을 막는다.
자신만의 색깔로 공간을 채워 넣으며 상대방을 질식사시키는 것이다.
“대단하구나. 아수라의 부하라는 게 아까울 정도야.”
월하는 느긋했다.
반면 배승민과 타칸은 만신창이였다.
전신이 그을리고 뼈마디가 나갔다. 그나마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건 지나온 시간 동안 둘의 실력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 늘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저 괴물······ 월하를 죽이기엔.
“누가 더 아깝냐?”
타칸이 검을 제대로 쥐었다.
이 결계 안엔 악마들이 득실댄다.
새까만 박쥐 떼처럼 수만은 될 듯싶었다.
이 고유결계 안에서 월하가 사육하는 악마들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덕분에 월하의 털끝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리치쪽이 더 아깝군.”
“크흐흐! 네놈의 눈이 삐었구나! 악령포식자 타칸님을 얕잡아보다간 큰코다칠 것이다.”
“너희 둘 모두 그냥 죽이긴 아깝다. 내 의식을 받고 휘하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의식?”
“천마님의 은총이다. 모든 시름과 걱정을 잊게 되지. 진정한 무릉도원으로 초대되는 일. 더한 행복을 선사하마.”
사이비가 따로 없다.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너무 다르다.
아마도 저 의식이란 건, 세뇌를 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 따위에게 세뇌될 것 같으냐?”
악령포식자, 타칸.
그는 수많은 악령을 포식한 악령의 왕이고 공포다.
비록 현세로 오며 힘이 많이 떨어졌지만 자신의 의지마저 죽진 않았다.
질 것 같으니 등을 돌린다?
그야 타칸은 무영에게 그다지 지킬 게 없었다.
놈은 그저 부려먹을 뿐이었으므로.
하지만, 무영은 아수라의 전승자다.
아수라. 모든 괴물의 왕.
악령의 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정한 군주!
그 전승자이니 일말의 의리 정도는 지킬 필요가 있었다.
“리치. 너도 저 뼈다귀와 같은 생각인가?”
“······.”
배승민은 답하지 않았다.
이 결계의 구조를 파악하고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뒤섞인 공포로 활동하고, 배승민은 놈의 영혼을 뒤집어썼다.
뒤섞인 공포는 고대의 정령이다. 세계수를 흡수해 반신의 경지에 이른 적도 있는 괴물이었다. 당연히 그 영혼에 새겨진 삼라만상은 평범한 인지를 초월해 있었다.
다만, 뇌에 무리가 가서 어지간하면 쓰지 않을 뿐.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둘은 불가.’
결계의 허점을 읽어내고 구조를 파악했다.
허점이,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빠져나갈 순 없었다.
배승민이 타칸을 바라봤다.
눈빛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타칸은 배승민의 의도를 이해했다.
“아쉽군.”
월하가 입맛을 다시며 악마들을 부렸다.
타칸이 배승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전해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퍽 재밌었노라고.”
아수라도에선 경험하지 못한 일들.
모험과 짜릿함이 있었다. 무영의 행보로 말미암아 전율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가끔 시샘도 났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무영에게 말이다.
짧게나마 현세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죽은 자들 사이에 있는 것보단 산 자들 사이에 있는 게 더 재미있다.
‘내가 왜 악령의 왕이라 불렸는지 깨닫게 해주마.’
예전, 검골 삼형제에게 나가떨어진 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만큼 강해졌다. 그들 모두의 기술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다시 검일과 싸워도 좋은 승부를 이룰 수 있을 듯하다.
‘무영. 놈과 겨뤄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쉽군.’
미련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이야기.
“알았다.”
배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타칸은 앞서나가며 길을 만들었다.
“덤벼라! 이 오합지졸들아!”
툭.
둘의 신호가 끊겼다.
배승민, 그리고 타칸.
‘당했다?’
무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둘을 처리할 자. 사령세가에서도 극히 드물다.
기껏해야 흉비쉬 정도다. 하지만 흉비쉬도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죽이긴 거의 불가할 터인데.
‘배승민과 타칸의 심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데드가 죽으면, 죽기 직전 경험한 이미지가 무영의 머릿속에 들어오게 되어있었다. 이는 데스로드의 권능 중 하나다.
하지만 아무런 심상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난데없이 둘과 이어진 선이 끊겨진 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권능을 상쇄할 수 있는 자.’
하물며 그게 데스로드의 권능이라면······,
초월종밖에 없다.
인간들 중에서 초월의 경지에 이른 자는 현재 없었다.
그러나 의심 가는 자는 한 명 있다.
‘월하.’
월하. 놈은 10년 뒤 등장할 때부터 초월자였다. 당연히 지금도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일 것이다.
빠드득!
무영은 이를 갈았다.
배승민과 타칸을 잃은 건 뼈아픈 실책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하늘도서관으로 향한 건 확실하다.’
그래도 어디로 향했는지 쯤은 알 수 있었다. 이어진 선이 그곳까지 놓여있었던 것이다.
허나 하늘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면, 무영 혼자 올라가긴 무리다.
“압둘론.”
그래서 무영은 태양길드로 돌아와, 히아신스와 함께 압둘론을 찾아갔다.
압둘론은 태양길드의 부 길드마스터.
그의 방은 지키는 자조차 없었다.
히아신스의 형제자매들에 의해 손과 팔이 전부 잘린 탓이다.
“너는 무영······ 그리고 히아신스님?”
압둘론이 하얀 가운을 입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영은 히아신스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지금 대도시는 큰 위험에 처했다. 사령세가의 침투는 너도 알고 있겠지.”
압둘론의 표정이 굳었다.
무영의 반말은 차차하고 어째서 사령세가의 일까지 아는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알고 왔다면, 거짓도 무용하다.
“알고 있다면?”
“사령세가의 본거지를 찾았다.”
“정말인가!”
“하늘도서관이다. 하지만 우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태양길드의 모든 병력을 움직여야 한다.”
“내겐 그럴 힘이 없다.”
“권한은 있겠지.”
“어디 명목뿐인 권한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아느냐?”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히아신스가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인장 여섯 개의 힘이라면 충분하겠지요.”
압둘론이 히아신스를 바라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아신스님. 과반이 넘어야 합니다. 최소 8개가 있어야 제 권한도, 명분도 힘을 얻습니다.”
“두 개가 부족하군요. 알았어요. 금방 모아드리죠.”
“히아신스님······? 어찌 말씀입니까.”
“깨달은 게 있어요. 절대 약한 척 하면 안 된다는 거. 지켜보세요.”
히아신스가 즉시 몸을 돌렸다.
두 개의 인장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히아신스의 변화를 보고, 무영도 내심 감탄했다.
‘성장하고있군.’
예의 나약한 소녀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역시 성장이라 할 수 있으리라.
< 35. 천마신교(1) > 끝
ⓒ
< 35. 천마신교(2) >
배승민이 눈을 떴다.
고유결계를 찢고 나온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신성력과 마력을 쥐어짜내, 한동안 의식이 끊겼던 것이다.
‘코어가 많이 상했군.’
배승민은 자신의 몸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리치의 특성으로 인하여 배승민의 몸은 불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몸의 심장부에 박힌 ‘코어’가 고장이 나면 천하의 배승민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코어가 상해서 몸의 상처가 제대로 회복되질 않고 있었다.
문제는 코어는 자연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둠이나 빛 성향의 무언가를 잡아먹거나, 혹은 주인인 무영의 곁으로 돌아가야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긴?’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황무지였다.
‘튕겼다.’
결계를 빠져나올 때 강한 반발력에 의하여 튕겨져 나간 듯싶었다.
대도시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다소 먼 거리였다.
또한 묘하게 시간의 괴리가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알 수 없었다.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야 한다.’
천마신교의 교주, 팔부신중 마후라가의 전승자.
그는 강하다.
모든 것을 초월한 힘을 지녔다.
거기다가 고유결계 안에서 악마들도 사육하고 있었다.
이대로 무영이 붙는다면······ 승률은 0%.
하지만 배승민은 보았다. 놈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았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한자리수라도 승률이 오를 터다.
“뭔가가 날아온다 싶었더니, 리치였어?”
“정말 리치 맞아? 사람처럼 생겼는데.”
“내 말이 틀린 거 봤어요? 어쨌거나 준비합시다. 힘이 많이 약해진 거 같은데. 리치의 코어는 엄청나게 짭짤하거든.”
지척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숫자는 여섯.
공수가 적당히 균형을 이룬 팀이었다.
푹!
가장 먼저 날아온 화살이 배승민의 어깨에 박혔다.
“익스플로젼!”
화르륵!
화살의 터지며 살점이 파였다. 뼈가 드러났고 배승민이 휘청였다.
“봐요. 엄청 약해졌다니깐.”
“그래도 리치야. 신중하게 사냥해야지.”
“아, 답답하긴. 그러다가 다른 놈들 오면 어떡하려고요? 날아오는 걸 우리만 본 것도 아닐 텐데. 죽이는 사람이 절반 먹는 룰인 건 여전하죠?”
젊은 청년이 신나게 휘파람을 부르며 다가왔다.
배승민을 죽이고 그 코어를 취하려는 속셈.
‘지금 가진 마력잔량으론 하위급 마법 한 번이 한계다.’
무엇을 사용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주변에 터지는 화염지뢰를 매설한다. 온전히 도망갈 확률 3%.
안개를 불러들여 방황하게 만든다. ······ 5%
무영에게 받은 손, 천공왕의 왼팔에 내재된 스킬을 사용한다. 9%!
배승민이 판단컨대 10%를 넘기는 방법이 없었다.
“하핫! 이게 웬 행운이야!”
어느덧 지척으로 다가온 청년이 배승민의 목에 검을 겨루고 휘두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만.”
방패를 등에 인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청년이 인상을 팍 구겼다.
“넌 또 뭐야? 꺼져. 이미 우리가 침 발랐으니까.”
욕을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배승민을 바라봤다.
동시에 남자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승민이 아저씨······.”
배승민이 남자를 바라봤다.
익숙한데, 기억이 없다.
언데드가 될 때 모든 기억을 계승하지 못한 탓이다.
최근 몇 년의 기억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남자, 김태환이 방패를 꺼내들었다.
“얌전히 이 자리를 떠난다면 건들지 않으마. 하지만 계속해서 저 남자를 겁박하겠다면, 나도 실력행사를 할 수밖에.”
“지랄. 똥 폼 잡고 자빠졌네.”
청년이 혀를 차며 그대로 검을 그으려는 찰나.
투우웅!
방패가 날아들어 청년의 몸을 때렸다.
“커헉!”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그대로 기절했다.
쉬이잉!
툭!
화살이 날아오자 김태환이 화살을 잡아서, 부러트렸다.
이후 방패가 자동으로 김태환의 손으로 돌아왔고······ 전투가 시작됐다.
배승민은 그 장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방패술의 대가. 방패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물론 무영이나 타칸에 비교하면 한참은 부족하지만, 저 남자를 보면 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감정. 그런 건 거의 거세되었을진대.
‘누구지?’
심정이 매우 복잡하다.
순식간에 다섯을 해치운 뒤 김태환이 배승민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후. 어쩌다가 이런 일을.”
“넌, 누구냐?”
“잊으셨어요? 저 태환이에요. 김태환.”
김태환?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배승민이 답하지 않자 김태환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저씨가 딸을 찾으러 간다고 하신 게 벌써 1년입니다. 그러니까 1년 만에 만난 거죠. 진전은 있으셨어요?”
“1년 전에······ 날 만났다고? 딸을 찾으러 간다고?”
배승민의 목소리가 천천히 떨렸다.
배승민은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다.
소망과 권능으로 인해 태어난 언데드.
중요한 걸 잊고 있었고, 그걸 떠올리는데 주력해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단서를 잡은 것이다.
반면 김태환은 배승민이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저씨, 설마 기억이? 아니, 잠깐. 몸도······.”
배승민의 상처를 살피던 김태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피가, 붉지 않았다.
피가 새까맣다. 뿐만 아니라 은근한 악취마저 나는 듯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급히 손을 대보자 피부 또한 얼음처럼 차가웠다.
‘인간이 아니다.’
그제야 알았다. 배승민은 인간이 아니다.
언데드. 좀비와 같은 무언가다.
언뜻 때려눕힌 자들이 한 대화에서 ‘리치’라는 단어가 나온 걸 기억해냈다.
리치라니!
“어, 어쩌다가, 젠장! 누굽니까? 누가 아저씨를 언데드로 만든 겁니까!”
“자세히 말해라. 내가 누구고, 뭘 찾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평범한 언데드와 조금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보통의 언데드는 인간을 습격할지언정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되돌릴 방법 같은 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김태환은 생각했다.
“······ 일단 이곳을 벗어나죠.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김태환은 이를 악 물었다.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배승민은 배승민이다. 착하고, 딸 배수지를 애타게 찾는, 성실한 남자.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발각당하면 무조건 죽을 것이다.
당연히 대도시로도 갈 수 없다.
리치가 들어온 걸 수비대들이 모를 리 없으므로.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가뜩이나 사령세가의 일로 머리가 복잡하건만.
첩첩산중이란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하였다.
다행히 물약이 통했다.
언데드는 재생이란 개념이 희박하고, 물약엔 약간의 신성성분이 섞여있어서 보통은 반박을 일으키지만 웬일인지 배승민은 그 성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역시 평범한 언데드는 아니었다.
그 뒤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불과 1년 전의, 하지만 배승민의 기억엔 없는 이야기를.
“내게 딸이 있었단 말인가?”
“예. 배수지라고, 이제 열 살 정도 되는 아이였죠. 정말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저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작은 천사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배수지는 삭막한 환경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단순히 착하고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나이답지 않게 똑 부러져서 인기가 많았다.
“그럼 배수지. 내 딸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권왕이 납치해갔습니다. 아저씨는 놈을 찾는다고 대도시를 벗어났죠. 1년 전에요.”
“권왕. 권왕이······.”
배승민은 그 호칭을 계속해서 되씹었다.
다행스럽게도 김태환의 말을 어느 정도는 믿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대도 배승민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안다.
안에 내재된 정령의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딸, 배수지의 이야기를 더 해다오.”
그래서 조금은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김태환도 고개를 주억였다.
“우리가 푸른사원으로 소환되고 아저씨는 양팔을 모두 잃었습니다. 지금은 어째선지 팔 한 쪽이 있으시지만요. 하여튼 그 뒤 수지가 모든 일을 도맡아했죠. 무영님이 안 계셨으면 그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무영이 은근히 도와준 게 많다.
지극히 냉정하지만 간혹 보이는 일말의 따듯함은 모두를 아우르기에 충분했다.
“수지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늘도서관을 나왔을 때, 천 명이 넘는 수많은 인파가 수지 하나를 데려가려고 그렇게들 모였지요. 저는 기껏해야 두세 명이 전부였는데 말입니다. 하하!”
배승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다.
하지만 조금은 느슨해진 것 같았다.
배수지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 딸이 칭찬을 받자 정말 묘한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딸을 찾고 있었구나.’
무엇을 찾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있었다.
이젠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알았다.
‘배수지. 권왕에게 납치당한 내 딸.’
무영은 말해주지 않았다. 굳이 묻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찾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물어봐야 한다.
권왕이 누구고 어디에 있는지.
‘사지를 뜯고 가죽을 벗겨낼 것이다. 평생 죽지 못하는 저주를 걸어 고통 받게 해주마.’
이게 복수심이란 걸 배승민은 몰랐다.
하나, 둘 감정이 살아나고 있었다.
언데드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
이 역시 ‘진화’라 할 수 있으리라.
“다윗의 별 이야기도 빼놓을 순 없죠. 그때······.”
“네가 대도시로 가서 소식을 전해야겠다.”
“예?”
“무영님에게. 이 구슬을 전해다오.”
“······!”
부르르!
김태환이 전신을 떨었다.
무영. 무영이라니!
그 이름이 배승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는 무영 형님이 아니었단 말인가?’
얼마 전, 사령세가의 습격을 받았다.
그때 무영으로 의심되는 남자가 나서서 죽었고, 이내 먼지처럼 사라졌다.
김태환은 우여곡절 끝에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대도시 바깥에서 숨어 다니는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길드로 가라. 나는 뒤에 합류하겠다.”
배승민은 기억과 정보가 담긴 손톱만한 구슬을 김태환에게 넘겼다.
물론 만약을 위한 안배는 해놓았다.
김태환이 과거의 인연인 건 확실해보이지만, 만약을 위해 모든 마력을 쏟아 넣어 함정을 설치한 것이다.
만약 엉뚱한 곳으로 새거든 전신이 불타버릴 터였다.
“정말, 제가 기억하는 그 무영이 맞습니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라.”
배승민은 대도시로 들어갈 수 없었다.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무영과 연결 된 선도 월하의 고유결계를 빠져나오며 잠시 끊겼다.
당장 정보를 전할 수단이, 김태환밖에 없다는 뜻이다.
김태환은 배승민이 건넨 구슬을 바라보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군.’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것.’
인연의 고리가 여기까지 이어졌다.
사령세가의 일과, 지금 대도시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어쩌면 무영을 만나면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죽음을 다룰 수 있지. 승민이 아저씨가 리치가 된 것도 분명 연관이 있을 거다.’
김태환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대도시가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날이 선 느낌.
검을 들고, 주변을 의심하고 기색이었다.
풍비박살 난 건물도 몇 채나 보였다. 그런데도 수리를 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상하군.’
평소 대도시의 활기를 띈 광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길을 걷던 와중 김태환은 한 용병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땅굴에서 몇 번 본 용병이 길을 지나가자 김태환이 붙잡았다.
“이봐. 무슨 일 있었나?”
“오오, 김태환! 이 양반 살아 있었구만!”
“의뢰로 조금 바깥에 있었다.”
“그래? 어쩐지.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
용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오래도 아니다.
기껏해야 15일가량. 그 사이에 일이 난 것 같았다.
용병은 김태환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 안 그래도 난리야. 태양길드가 졌거든.”
“졌다고?”
김태환이 크게 말하자 용병이 화들짝 놀랐다.
급히 김태환의 입을 손가락으로 한 차례 가린 용병이 작게 말했다.
“쉿. 조용히 말해. 하여간 천마신교라는 곳이 나타났어. 하늘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있다더군. 태양길드가 대군을 이끌고 쳤는데, 패배했지. 지금 2차 진격을 위해 다른 곳에 협조를 청하고 있다던데. 일이 어떻게 될는지, 쯧쯧.”
태양길드가 졌다.
그것도 대도시 내부에서 패배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김태환도 제법 충격이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이런 건가?”
“그것도 있지만 사령세가 놈들이 대도시에 침투해 있다고. 지금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갑자기 집 하나가 박살나면서 강제로 시련이 시작되거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거든.”
“시련이······.”
시련. 다른 말로 미션이라고도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투쟁하는 것이다.
살면 보상을 얻지만, 죽으면 그대로 끝이다.
주변에 반파된 건물들은 그런 식으로 희생당한 듯싶었다.
“자네도 조심해. 괜히 수상쩍은 낌새 비추면 그대로 경비원들이 죽이려 들 테니까.”
“충고 고맙군.”
“어휴~ 덕분에 일은 많아졌는데 그만큼 죽어나가고 있는 게 문제지. 이러다가 대도시를 떠나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용병이 혀를 쯧쯧 차면서 길을 떠났다.
김태환은 표정을 굳혔다.
고작 2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긴 벌어진 모양이었다.
< 35. 천마신교(2) > 끝
ⓒ
< 35. 천마신교(3) >
‘무영 형님은 대체 어떻게 태양길드에 들어가신 거지?’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김태환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태양길드의 정문에 도착한 김태환은 잠시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무영이 어찌하여 태양길드에 속하게 된 것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형님의 실력이라면 태양길드도 탐낼 법 하지만······.’
그래. 무영은 강했다.
푸른사원 때부터 다른 이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천하의 태양길드라도 무영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붙잡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언제나 고독했다. 누군가와 어울려서 지내지 않았다. 일부러 거리를 둔 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으며 행동하려는 기색이 있었다.
그런 무영이 가장 거대한 집단이라는 태양길드에 들어갔다?
무영을 아는 이라면, 피식 웃고 말 것이다.
물론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믿기 힘들었다.
하늘도서관 안에서 죽은 줄 알았으니까.
얼마 전 만난 전신갑주의 남자도 무영이라 ‘의심’했을 뿐 굳이 더 확인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다. 무영의 죽음을 김태환은 어느 정도 확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다면, 무언가 노림수가 있어서 몰래 잠입해있는 거겠지.’
김태환은 내심 고개를 주억였다.
무영은 자신이 드러나는 걸 꺼려했다.
필시 다른 길드원들과 섞여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터.
막상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찾을지가 관건이었다.
“정지. 휘광길드의 길드원께서 무슨 용무이십니까?”
태양길드의 본성.
그 크기만 10여 층에 달하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 주변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은 당장 검을 휘두를 것 같이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김태환의 어깨에 그려진 휘광의 표식을 보곤 물은 것이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무영. 이라는 이름입니다. 어쩌면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안에 들어가서 찾을 수 있게······.”
“무영 총사령관 말씀입니까?”
김태환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태양길드에 그런 직책이 있었던가?
있더라도, 이름에서부터 대단함이 느껴졌다.
총사령관이란 군단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이란 뜻이다.
“총··· 사령관이요?”
“안 그래도 총사령관께서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약간의 의심은 있지만, 냉랭하던 분위기는 살짝 풀렸다.
무영을 아는 이는 태양길드 소속의 길드원들 뿐이 없으니 그를 찾아온 게 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판단한 것이었다.
반면 김태환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정말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무영이 맞는 걸까?
무영의 이미지는 항상 고독에 가까웠는데, 그 이미지와 완전히 상반되는 직책이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진급속도였다.
무영이 사라지고 고작 1년여.
처음부터 태양길드로 들어와 힘을 쌓았대도 1년 만에 총사령관이란 직책에 앉는 건, 단언하건대 불가능하다.
무영이 고작 1년 사이에 그만한 능력을 얻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푸른사원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그래도 기존의 강자들과 비교하면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김태환. 이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무영이라는 이름을 꺼내고 반응이 시원치 않다면 몰래 잠입하거나, 상대를 제압하는 것까지 생각했건만.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경비병 하나가 물러갔다.
하지만 쉽사리 들여보내 주지는 않았다.
‘철통같군.’
눈에 보이는 사람만 하더라도 스무 명이 넘는다.
성 하나를 지키고자 이 많은 사람들이 정찰을 돌고 있었다.
대략 30여분을 기다리자 성으로 들어갔던 경비병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들어오십시오. 총사령관께서 만나고자 하십니다.”
태양길드에 속한 길드원은 몇 명일까?
얼추 2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5년차 이상의 중견자이며 식객으로 머물러있는 손님들까지 합치면 2만 1천에서 2천 사이가 아닐는지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 밑에 일하는 식솔을 더하면 그 배의 배가 되고.
단일 집단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만큼 인원이 많은 것이다.
물론 가장 인원이 많은 건 역시나 신성도시 뮬라란이었다. 도시 자체가 성역이자 하나의 조직과 같았으니.
어쨌든, 그 많은 인원이 본성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성이 꽉 찬 느낌을 받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10층까지 순수하게 걸어서 안내를 한 경비병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김태환은 눈앞에 놓인 철제의 큰 문을 바라봤다.
올라오면서 압도되었다.
휘광길드도 비록 아홉길드에 들어가긴 하지만, 규모면에선 상대가 안 된다. 태양길드의 절반 정도도 될까 말까 싶다.
그렇다고 태양길드 길드원들의 실력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용담호혈.’
용이 사는 연못과 호랑이가 사는 동굴. 딱 그런 곳에 온 것 같다.
김태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이 너머에 있는 게 무영이 맞을까?
끼이이익.
반신반의 하면서 문을 밀었다.
곧 커다란 철제문이 뒤로 젖히며 방 내부의 풍경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로군.”
“······.”
방에 들어오자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에, 김태환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이 목소리를, 잊을 리 없지 않은가.
“무영··· 형님.”
부르르르!
전율이 일었다.
정말 무영이 맞았다.
도착하기 전까지도 ‘혹시?’싶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약간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였다.
더욱 놀라운 건 무영의 차림새다.
‘같다.’
무영은 흉비쉬에 의해 죽고 먼지처럼 사라졌던 그 남자와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커다란 문과 달리 방은 생각보다 작았고, 무영은 용의 문신이 그려진 의자에 앉아 책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지만, 이 역시 무영이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계셨던 겁니까?”
“들어온 건 최근이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은 것 같군.”
“총사령관은 대체 뭡니까? 태양길드에 그런 직책이 있었단 말은 처음 듣습니다.”
무영이 처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곤 김태환을 바라봤다.
“임시로 만든 자리다. 지금 설치는 놈들을 제거하려면 나만한 적합자가 없으니. 그 거창한 이름은 내가 만든 게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히아신스의 주장이었다.
누군가를 이끌라면 있어 보이는 이름이어야 한다며.
김태환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무엇을 했기에 태양길드가 선뜻 그만한 직책을 무영에게 맡긴 것인지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과연 그가 자신이 아는 무영이 맞는 건지도 아리송했다.
초강자가 드글대는 이곳에서 무영이 그만큼 부각대려면 못해도 인류 10강 수준의 강자여만 하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 하지만 그 전에 내게 건넬 게 있지 않나?”
“아······.”
무영은 김태환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 듯싶었다.
김태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품에서 손톱만한 검은구슬을 꺼냈다.
“승민이 아저씨가 이걸 형님에게 건네 달라 했습니다.”
“정보결정화로군.”
귀족 악마들이 죽으면 낮은 확률로 결정화가 된다. 그걸 보고 배승민이 나름대로 마법을 창조해낸 듯싶었다.
마력이 글자와 영상의 형태로 구슬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슬을 받아든 무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월하. 놈에 대한 정보다.’
배승민이 죽지 않은 건 알았다. 자세한 상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김태환이 나타나 중요한 정보가 담긴 구슬을 건넸다.
무영은 구슬을 눈으로 해체하며 더욱 집중했다.
하늘도서관에 자리 잡은 놈들을 공격했으나 이미 한 차례 패했다.
사령세가와 강시, 그리고 정체모를 놈들.
아마도 천마신교의 신도들일 터였다.
그리고 월하······.
놈들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온갖 함정을 꿰뚫고 맞대결 구도로 갔지만, 강력한 일곱 구의 강시와 월하에게 막혔다.
무영이 직접 나섰으나 마찬가지였다. 몸을 숨겼대도 다가갈 틈이 없었다.
수많은 악마들이 월하를 지켰다. 결과 암습에 실패한 것이다.
강자의 암습엔 시간이 걸린다지만, 만약 정상적으로 월하를 암살하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듯했다.
놈에게 약점이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배승민이 전해주는 정보는 뭔가 다를 터였다.
―월하. 이공간을 다루며 그 안에서 악마를 사역한다. 공간과 관련 된 힘을 사용하지만, 약점이 있다.
구슬 내면에 적힌 글귀들을 읽어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약점!
약점이 있었단 말인가!
―공간을 잡아두기 위한 이정표. 예컨대 법보와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공간과 악마들을 스킬로만 항시 붙잡아두고 사역하는 건 불가능. 특별한 장소에서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하단 의미다.
―땅에 묻힌 육망성.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그것을 파괴하면 월하도 힘을 잃을 것. 총합 여섯 개로 하늘도서관에 하나가 있으며, 나머지 다섯 개는 대도시에······.
꾸욱!
왼쪽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곤 책상 위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삐이이이이이익!
성 전체를 소음이 가득 채웠다.
“뭘 하신 겁니까?”
“경계를 강화하고, 긴급소집를 알리는 소리다. 따라와라.”
무영이 급히 발을 움직였다.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월하의 약점.
그것을 배승민이 알아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대도시에 숨겨진 육망성을 제거하라!
회의에서 무영이 내린 특명이었다.
즉시 수십 개의 별동대가 꾸려지고 대도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태환은 휘광길드의, 친교를 위한 사자로 대우하였다.
일이 잘 풀리면 김태환의 입지가 다져지고 휘광길드와의 연계도 가능하리라 보았다.
무영 역시 놀지만은 않았다.
늦은 저녁.
무영은 그림자가 되었다.
월하의 암습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이들도 무영의 손길을 피해갈 순 없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히아신스로 말미암아 정보기관을 움직여서 알아낸 놈의 행방.
흉비쉬.
드디어 그 꼬리를 잡았다.
워낙 신출귀몰한 놈이라 단체로 움직이면 미리 눈치 채고 도망간다. 놈의 실력은 사령세가에서도 수위에 들 정도다.
하여 무영이 홀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흉비쉬라면, 무영이 혼자 움직일 가치가 있었다.
흉비쉬는 부하들과 함께 건물 뒤편에서 눈을 감은 채 의식의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다. 바로 시련 만들기다.
스스슥.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무영이 움직였다.
어둠과 동화되고,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검격은 정확했다.
스팟!
달에 반사된 비탄의 빛이 사방을 수놓았다.
동시에 흉비쉬의 오른팔이 잘리고, 가슴 중심부까지 상처가 이어졌다.
‘얕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다.
허나 처음부터 100% 암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흉비쉬는 신체를 잘라내는 정도로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암살자?”
흉비쉬가 인상을 찡그렸다. 피가 철철 흐름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다.
“흉비쉬.”
“나를 아는가? 그렇다면 네가 죽을 것 역시 알겠구나.”
사령세가의 고수.
놈의 상반신이 갈라졌다.
동시에 신체 안에서 수많은 촉수가 쏟아지며 주변을 감쌌다.
이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부하들을 양분삼아 상처를 회복했다.
더불어 붉은 강시들도 여러 구가 출현하였다.
누가 봐도 무영이 밀리는 상황.
하지만 무영은 침착하게 법보를 꺼냈다.
“검이. 검삼. 킹 뮤턴트.”
법보에서 세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일대 다수의 상황이 아니다.
“언데드? 특이하군.”
흉비쉬의 눈이 흥미로 가득찼다.
그는 시체를 다루는 시체술사다. 그것도 엄청난 고수다. 무영의 언데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린 것이다.
“너도 곧 이 대열에 추가될 것이다.”
무영은 짧게 확언했다.
흉비쉬를 언데드로 만들면, 사령세가를 흔들 수 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 35. 천마신교(3) > 끝
ⓒ
< 35. 천마신교(完) - 05.15 15:38분 수정 >
촤악!
콰지직!
촉수는 모든 걸 빨아들였다.
마치 문어의 빨판처럼 닿는 모든 걸 흡착하고 그대로 파괴했다.
“씨발! 이게 뭐야!”
건물이 박살나자 그 안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저녁이라지만 이곳은 대도시의 안쪽이다.
소란이 생기면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다.
그래서인지 흉비쉬도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검이가 촉수를 잘라내곤 한 발자국 다가와서 물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강시들을 처리해라. 놈은 내가 맡는다.”
10구의 적강시. 그리고 4구의 흑강시.
강시들은 시체이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무영에게 공격이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방해는 되었다.
그걸 검이와 검삼, 뮤턴트가 처리하도록 맡겼다.
적강시는 기껏해야 상급, 그리고 흑강시는 최상급 1레벨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듯싶었다.
단순계산으론 약간 밀리는 느낌이지만, 검이와 검삼, 그리고 킹뮤턴트는 평범한 시체가 아니다.
죽은자들의 대결에서 무력의 수준이 같다고 싸움의 결과마저 같지는 않을 터.
하다못해 시간만 끌어줘도 충분하다.
‘흉비쉬. 오늘이야말로 결착을 내자.’
과거 무영이 막 살수로 활동할 무렵.
무영은 흉비쉬와의 인연이 있었다.
암살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암살대상을 지키는 놈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막 대상의 암살에 성공하자 흉비쉬가 미친 듯이 따라붙었다.
무영은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려고 몸을 날렸지만 흉비쉬가 끈덕지게 따라붙은 탓에 이틀 밤낮을 싸웠다.
결국 둘 다 만신창이가 되어 무승부를 이뤘지만, 당시에 내지 못한 승부를 이제 낼 때가 되었다.
“죽음의 세례를 받아라.”
흉비쉬가 주문을 되뇌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서 공간이 열리며 거대한 해골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해골의 공허한 눈이 무영을 바라봤다.
‘죽음.’
저 해골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계속해서 직시한 상대를 죽이는 힘!
사기성이 짙은 스킬. 하지만 분명히 한계도 있다.
‘육도. 아수라도.’
무영 또한 다른 세계의 입구를 열었다.
죽음이 튀어나왔다면 죽음으로 맞서면 되는 일.
―바깥의 공기는 오랜만이로구나!
반투명한 상태의 멀더던이 튀어나왔다.
멀더던은 황금의 왕관과 은빛 삼지창을 들고 있었는데 외관상의 변화도 있었다.
몸통은 개구리와 비슷하지만 머리는 해마처럼 변한 것이다.
과거 문헌에 나왔던 멀더던 왕의 모습을 점차 갖춰가고 있는 듯싶었다.
“죽음을 상대하라.”
―저 해골의 이름이 죽음이냐? 참으로 못생겼도다!
멀더던이 껄껄 웃으며 망령들을 불러 모았다.
그 숫자가 물경 삼천!
질보다 양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저 해골의 머리를 감싸는 데에는 넘칠 정도다.
순식간에 자신의 스킬이 무력화되자 흉비쉬가 인상을 찌푸렸다.
“묘한 놈이로군.”
흉비쉬가 무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히 경악과 경외심이 담겨있었다.
시체와 죽음을 동시에 다루는 자가 자신 말고 또 있다는 놀라움, 그리고 그 모든 게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그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스릉!
무영은 비탄을 들었다.
동시에 머리에서 하나의 뿔이 솟았다.
“이제는 강신술까지? 너를 죽여서 꼭 해부를 해봐야겠구나.”
감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흉비쉬는 순수한 의미에서 무영을 높게 샀다.
비록 암습을 가했지만, 무영이 보이는 기술은 평이를 넘어 경이에 가까웠으므로.
저 뿔의 정체가 신내림의 증거라는 것 또한 흉비쉬는 알아보았다.
‘무척 투박하고 강렬한 신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신내림을 받았다고 무적이 되진 않는다.
‘허나 내가 모시는 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촉수들이 더욱 빠르게 흉비쉬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이내 전신을 촉수가 둘둘 감더니, 그 사이에서 까만 눈 하나가 튀어나왔다.
푸우욱!
무영의 검이 닿았다. 하지만 얕다.
‘결이 계속 바뀌는군.’
촉수가 전신을 둘러버린 뒤 수많은 신체가 하나로 합쳐진 듯 결이 무수히 많고, 계속해서 바뀌었다.
무영의 입장에선 여간 까다로운 상대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모시는 신은 하늘의 주인! 하늘의 진정한 마(魔)이시니.”
쿠오오오오오!
해골이 울부짖었다. 멀더던을 비롯한 망령들이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다시 죽음이 무영을 바라볼 것이다.
흉비쉬가 말했다.
“잡신 따위의 축복과는 비교가 안 되느니라.”
“말이 많군.”
잡신. 아수라가 들으면 경을 칠 이야기다.
흉비쉬가 움직였다.
쾅!
비탄이 흉비쉬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러자 흉비쉬는 신체를 늘어트려 무영을 공격했다.
‘결에도 일정한 형태가 있다.’
무영은 정신을 집중했다. 흐르는 강의 물살처럼 정신을 고요하게 만들고 흉비쉬의 결이 만드는 형태에 주목한 것이다.
“보아라! 이것이 하늘의 주인께서 내게 내린 힘이다! 잡신의 내림과는 비교가 안 될 힘!”
퉁. 투웅. 투우우웅.
공격에 일정한 간격으로 끊김이 있다.
결이 바뀔 때 그 소리가 다르다.
무영이 아니라면 누구도 느끼지 못했을 차이.
‘지금.’
태세전환.
무영이 움직였다.
그러자 흉비쉬도 쉽게 무영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푹!
가슴의 중심부를 정확히 찔렀다.
“그래봤자 소용 없······.”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상처가 나봤자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여태껏 그래왔기에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하였다.
허나, 무영이 찌른 건 결의 시작부분이다.
세상 만물에는 결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부분을 공략하거든 아무리 단단하고 강한 것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쫘아아악!
무영의 검이 선을 그렸다.
‘재생이 안 돼?’
흉비쉬의 눈이 일순 공포로 물들었다.
재생이 멎었다. 몸도 움직이질 않는다. 갈고리에 찍힌 것처럼.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월하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마(魔) 자체를 제압했지 신체를 구속하진 못했다.
헌데 이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묘하다.
상식을 벗어났다.
“움 바르시오, 쿤 자르자······.”
흉비쉬가 저주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바로 ‘시련 만들기’다.
강제로 시련을 만들어서 자신의 몸을 떼어놓으려는 속셈.
무영의 눈 앞으로도 시련과 관련 된 글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괴마의 시련 Ⅰ’에 입장······.>
작은 홀.
아직 시련은 팽창하지 않았다.
무영은 결을 계속 내리치며, 품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작은 홀의 끝 부분으로 던져 넣었다.
‘만물에는 결이 있다.’
이 세상에도, 분명히 결이 있다.
킹슬레이어의 경지마저 뛰어넘는다면 분명히 그를 볼 수 있으리라.
시련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아직 완전히 생성되기 전. 결을 읽는게 훨씬 쉬웠다.
쩌적! 쩌저저적!
무영이 던진 단검이 시련의 결에 박혔다.
그러자 만들어지던 시련이 다시금 붕괴했다.
그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흉비쉬가 바라봤다.
“넌, 넌, 대체 누구란 말이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냐!”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경이마저 아니다. 불가해(不可解)!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신내림? 단순 이적만 보자면 신 그 자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흉비쉬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하늘의 마(魔)’, 천마의 종속자를 제거했습니다.>
<천마는 팔부신중은 아니지만 아수라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신입니다.>
<아수라가 매우 기뻐합니다.>
<아수라의 축복이 강화됩니다. 이제 ‘아수라의 사도’ 칭호가 망혼력을 ‘30’올려줍니다.>
아수라의 축복.
칭호의 강화라!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무영이 주목한 건 흉비쉬가 변하고 남은 찌꺼기다.
신내림의 증거로 까만 눈이 튀어나왔었는데, 그게 작은 보석처럼 땅바닥에 굴러다녔던 것이다.
조각을 손에 쥐고 바라보자 하늘의 눈이 발동되었다.
명칭: 불멸자의 조각
등급: 無
효과: 불멸자들의 왕이 갖고 있던 조각. 조각을 모으면 정수로 탈바꿈되고, 정수는 ‘불멸왕’의 힘을 부여하는 재료가 된다.
“······!”
불멸왕. 그 두 번째 실마리를 찾았다.
설마 흉비쉬가 갖고 있었을 줄이야.
‘월하 역시도 불멸자의 조각을 갖고 있을 테지.’
월하에게 느낀 기운과 흉비쉬의 기운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월하는 그보다 더욱 상위에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조각이거나 더 많은 조각을 갖고 있다는 뜻.
‘죽음의 예술.’
무영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뻗어나가 흉비쉬를 감쌌다.
<시체와 죽음을 다루는 자!>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죽음의 예술에 적합한 자입니다.>
<예술점수 91점!>
<‘죽음의 예술’의 랭크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B->A>
<A랭크로 격상한 ‘죽음의 예술’이 상대의 능력치를 그대로 복원합니다.>
이름: 흉비쉬
레벨: 435
성향: 다크 챔피언
힘 440 민첩 379
체력 500 지능 422
지혜 385 마법저항 330
죽음의 힘 410
+촉수(A), 강시술(A+) 죽음(A+), 마령화(A) 스킬 사용 가능
+죽음에 대한 이해(정신지배 면역)
+경이로운 방어력
+최대 20구의 강시를 다룰 수 있음
흉비쉬가 언데드로 변회되자 주변의 강시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흉비쉬에게 종속되어 천천히 무영에게 무릎을 꿇었다.
“어둠의 주인을 뵙습니다.”
멀쩡한 적강시는 다섯이었고, 흑강시는 셋이었다.
이것만으로도 크게 전력이 상승된 셈이다.
월하에겐 미치지 못하지만, 사령세가를 뒤흔들 정도는 된다.
‘월하. 놈에겐 파편이 있다.’
무영의 눈빛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월하는 불멸자의 조각뿐만 아니라 한 가지 파편을 더 소유하고 있었다.
‘균열의 파편.’
놈의 근처로 다가가자 비탄이 울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균열의 파편이 근처에 있음을 깨닫고 울어댔던 것이다.
그레모리는 무영에게 세 개의 파편을 찾아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천마신교의 교주인 월하에게 있었다.
월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의 원천을 건드리기 시작했군.’
대도시 전체에 놓인 여섯 개의 육망성.
그것은 월하의 힘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허나 태양길드는 그저 월하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그 육망성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 이미 늦었다.’
물론 월하의 힘을 약화시키는 용도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에 대해선 이미 대처가 늦었다.
이미 육망성은 필요한 만큼 기운을 빨아들였다.
시련을 만드는 것에 대한 준비도 끝났다. 벌써 수십 차례나 실험을 하며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갈 차례였다.
월하가 미소지었다.
그리고 양 손을 크게 뻗었다.
“천마시여!”
슈우우웅-!
붉은 별들이 하늘에서 내려앉기 시작했다.
별똥별처럼 보이는 무리지만 하나 같이 사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신의 영역에서조차 보기 힘든 광경.
허나 이 모두를 월하가 의도한 것이다.
그는 천마신교의 교주.
그리고 월하가 대도시에서 행하려는 건, 바로 그의 재림이었다.
곧 대도시를 여섯 방위로 감싼 육망성이 붉은 빛을 하늘 끝까지 발하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별들이 그 빛에 반응하여 아예 피와 같이 변했다.
세상이 그 빛에 감싸이는 듯싶었다.
월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숙원이 이뤄지는 것이다.
월하의 이마와 양쪽 손목에서 악마의 인장이 드러났다.
동시에.
<‘천마의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도시가 피에 잠겼다.
< 35. 천마신교(完) - 05.15 15:38분 수정 > 끝
ⓒ
< 36. 아수라장(1) >
파악된 사령세가의 병력은 대략 삼천여.
태양길드와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되는 숫자지만 하필이면 놈들이 거점으로 선점한 게 하늘도서관이다.
그 지리적 이점과 사이한 수법으로 태양길드와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한 바가 있었다.
‘다섯 개의 육망성을 파괴했다. 남은 건 하늘도서관에 있는 것뿐.’
무영이 시도한 방법은 간단했다.
흉비쉬로 말미암아, 사령세가로 잠입시켜 마지막 육망성의 위치를 알아내고 파괴하는 것.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흉비쉬는 훌륭하게 무영의 작전을 수행해보였다.
하지만······ 그게 시작일 줄이야.
<‘천마의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도시, ‘고대왕의 성’의 출입이 불가해집니다.>
<천마는 피를 갈구합니다. 모든 시련을 완료하세요.>
<시련에 성공하면 결과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시련에 실패하면 ‘천마’가 부활합니다.>
<제한시간 - 1,000시간>
<생존인원 - 875,449명>
붉은 혜성이 떨어졌다.
세상이 그와 같은 빛으로 가득차고, 동시에 피와 같이 붉은 물결이 사방에 들어찼다.
“천마의 시련?”
“천마가 뭐야?”
“이게 대체 무슨······.”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사람들도 당황했다.
태양길드의 정예라고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것은 모두가 인지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그런 생각을 받쳐줄 상황으로 곧 돌변했다.
쿵!
쿠우웅!
가장 먼저 변한 건 ‘집’이다.
모든 집이, 성이, 팔과 다리가 돋아나고 괴물화 되었다.
안쪽에 있던 사람들?
무영마저도 중요 인물들만 구해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집이라고 인식했던 것의 내부는 안락함의 표본이 되었다면, 지금은 괴물의 위장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걸 녹이고 부식시키는 강한 산이 흘러나와 주변을 둘러쌌기 때문이다.
<‘가령(家令)’이 등장했습니다.>
<가령은 움직이는 모든 걸 공격합니다.>
<가령을 쓰러트리고 정수 20개를 모으십시오.>
“무, 무영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히아신스는 당황했다.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였지만 눈만큼은 또랑또랑했다.
“긴급 상황이다. 인장을 챙겨서 탈출해야 한다.”
“아, 알겠어요. 잠시만.”
“시간이 없다.”
“꺄악!”
무영은 히아신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매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인장이 숨겨진 장소로 다가갔다.
이후 서랍 쪽에 마법처리가 되어 있는 걸 강제로 잘라낸 뒤 그곳에서 인장을 챙겨 성을 탈출했다.
성 역시 거대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태양길드의 길드원 대부분이 성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히아신스님!”
“총사령관님!”
그들이 빠른 보폭으로 무영에게 다가왔다.
물론 어느 정도 무영의 공로를 인정한 자들에 한정해서다. 무영을 따르는 이들은 태양길드 내에서도 소수였다.
스릉!
무영이 비탄을 들었다.
전신에서 새하얀 얼음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보고 히아신스가 미간을 좁혔다.
“무영님. 설마.”
“지금부터 성을 파괴하겠다.”
무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태양길드의 본성, 저 거대한 구조물을 없애야만 위험이 줄어든다. 그리고 어쩌면 ‘정수’라는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쾅! 콰앙!
그저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실제로 가령이라 불리는 저 괴물은 움직이는 모든 걸 공격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공격 안 받는 거 아닌가?”
“하긴. ‘움직이는’ 걸 공격한다고 했지. 이런 건 가만히 있어서 기회를 보다가 치는 게 정답인 경우가 많아.”
“우선 이 상황을 규명해야······.”
사람들은 저마다의 해답을 내놓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들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악’을 하는 게 먼저다.
분명히 틀리진 않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천마의 시련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
그래. 이건 무영도 안다.
과거 월하가 대혼돈 이후에 천마신교 교단을 세우고 신성도시 뮬라란과 전쟁을 일으킬 적에, 그가 직접 언급한 적이 있는 것이다.
천마의 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천마를 마주할 자격이 있다고.
당시엔 그게 정말 ‘시련’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정도로만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영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이 역시 맞다.
천마의 시련이라는 게 실존했다면, 왜 과거에는 행하지 못했는가.
반면 왜 지금은 그게 가능해졌는가.
무영이 모르는 차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면 외통수를 칠 수도 있을 터였다.
‘하늘도서관은······ 벽이 쳐졌군.’
하늘도서관을 중심으로 거대한 푸른색의 벽이 전개되어 있었다. 아마도 저곳에서 천마가 부활하는 듯싶었다.
너무 빛의 장벽이 거대해서, 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선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해치우자고 무영은 마음먹었다.
스읍!
파악!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무영이 땅을 박찼다.
그러자 성이 손을 움직이며 무영을 붙잡고자 했지만, 무영의 속도를 이 거대한 성이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파스스!
비탄이 다리를 베었다.
그러자 상처가 나며 그 부분이 얼어붙었다.
쿵! 쿵! 쿵!
무영이 얼어버린 성의 다리를 계속해서 걷어찼다.
그러자 성을 지탱하던 다리가 조각나며 이내 부서졌다.
끼에에에에엑!
나머지는 반복행위일 뿐이었다.
팔과 다리 모두를 제거하자, 놀랍게도 성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새로 생겨난 부분만 없애면 그만인 일이었던 것이다.
“싱겁군.”
무영이 비탄을 털었다.
그 모습을, 일만이 훌쩍 넘는 길드원들이 보았다.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무영이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듯.
이어 무영은 히아신스에게 시선을 줬다.
히아신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부랴부랴 인장을 꺼냈다.
“태양길드의 수호인장으로 명합니다. 주변의 괴물들을 제거하고 정수를······.”
“끄아악!”
“이, 이게 뭐야! 악!”
“땅 속에 무언가가 있다!”
불현 듯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검은 손이 지면에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땅속으로 납치해간 것이다.
손에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영은 저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망령들.’
<망령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망령은 혼자 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문구다.
이와 비슷한 시련을 무영은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아니, 이곳에 모인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하늘도서관.’
그곳에서 겪었던 시련 중에 이와 비슷한 게 있었다.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망령이라면, 오히려 잘 됐다.
“씨발! 스킬이 안 먹혀!”
“망령계열 괴물이라면 빛 계열 스킬이 먹혀야 정상인데?”
모두가 당황했다.
일반적인 망령이 아니다.
통하는 스킬이 무척 제한적이었다.
―침입자들······.
―침입자를 제거하자······.
그럴 수밖에.
망령들은 본래 이 성의 원주민들이다.
그니까 ‘고대왕의 성’에 깃든 혼령이라 보는 게 맞다.
저들은 뛰어난 전사이고, 인간들은 침입자에 불과했다. 침입자를 배척하는 건 마땅히 전사들이 해야 할 일.
수천, 수만 년간 갈고 닦아진 영혼을 일반적인 스킬로 제거할 순 없다.
저런 망자는 오로지 망자로만 상대할 수 있었다.
‘멀더던.’
무영의 등 뒤로 검은 원이 생겨났다.
아수라도가 열리며 수천의 망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스킬은, 아수라가 무영에게 건넨 것이다.
천마가 마귀들을 다룬다면, 아수라는 그러한 마귀들의 왕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 비슷한 계열의 신이니 직접적인 타격 역시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단한 악령들이로군. 매우 탐이 나는 도다.
멀더던은 군침을 흘렸다. 저들마저 자신의 군세에 편입시킬 셈이었다.
하여 무영은 짧게 말했다.
“마음껏 휘저어라.”
멀더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무영 또한 그럴 생각이었다.
아무리 가령을 잡아도 ‘정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이 발견 된 ‘보라색 가령’을 없애자 정수가 떨어졌다.
‘색깔이 있는 가령을 죽여야 하는군.’
말하자면 대장격의 괴물이다.
하지만 색깔이 있는 가령은 일반적인 가령에 비해 무척 날렵하고 강했다.
그 색깔 있는 가령을 잡는데 정예의 길드원 50여명이 죽었다.
멀더던으로 인해 망령의 위협에선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기다렸다는 듯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날개달린 여인들.
서큐버스와는 조금 다른, 형체 없는 귀신들의 출현 때문이었다.
<‘몽마’는 남녀 모두를 현혹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집단최면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침을 흘렸다. 여자들은 그대로 옷을 벗었고, 남자들은 엉덩이를 뒤로 뺐다.
마치 꿈을 꾸듯 눈을 감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에서 더 없을 황홀한 표정으로 쾌락을 만끽했다.
마법저항이 높은 이들은 버틸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몽마에게 현혹 당했다.
현혹당한 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기가 빨려, 급속도로 몸이 마르며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이들은 ‘흡혈귀’가 되었다.
“뭐,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끄아아악!”
<‘흡혈귀’는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피가 빨린 이들은 흡혈귀에게 정신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온갖 귀신들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그 귀신들이 바라는 건 한 가지.
바로 ‘분열’이다.
결국 귀신들이 노리는 건 뭉쳐있는 사람들이었다.
혼자 있을 경우 표적이 되는 일은 적었다.
그렇게 뭉치면 손해라는 인식을 주어 사람들이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래선 혼자 움직이는 게 낫겠군.”
“오히려 뭉치면 진행이 더뎌진다. 강자들을 따로 빼는 게 나아.”
태양길드조차 벌써 분열의 조짐이 생기기 시작할 정도였다. 다른 곳은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불현 듯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다.
<천마의 신도가 되시겠습니까?>
<가령, 망령, 몽마, 흡혈귀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천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마의 축복은 신체능력치를 강화시킵니다.>
<천마의 축복은 새로운 스킬을 부여합니다.>
천마의 신도가 되는 길!
천마의 신도가 되면 저 지긋지긋한 귀신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뿐만인가. 이 시련을 만든 주인의 축복마저 받는다. 그다지 손해볼 건 없었다.
무력. 강함은 마계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척도다.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세계.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데 마다할 리 있겠는가!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의 이득을 쫓는 이, 또는 허약한 이들은 이 길을 택했다.
신도가 되어도 무슨 일이 있겠느냔 안이한 생각도 있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일.
절차도 복잡할 게 없으니 금상첨화다.
그리고 신도의 길을 택하자 곧 기다란 글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천마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신도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죽이십시오.>
<제거한 상대에 따라 점수를 벌고, 천마에게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제한시간 이내에 최소 500점을 모으지 못하면 망령이 됩니다.>
<제거대상의 점수는 무력이 아닌 ‘영향력’'을 기준으로 책정됩니다.>
<1순위 제거대상(10,000점) - 히아신스>
<2순위 제거대상(7,000점) - 바하무드>
<3순위 제거대상(5,000점) - 무율진>
<4순위 제거대상(3,000점) - 오오츠키 유카>
······
<10순위 제거대상(500점) - 무영>
< 36. 아수라장(1) > 끝
ⓒ
< 36. 아수라장(完) >
10순위 제거대상에 오른 자신의 이름을 보고 무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력이 아닌 영향력에 따라, 그 순위가 달라지는 듯했다.
히아신스는 현재 태양길드 내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소녀다. 태양길드 자체가 대도시 최강의 집단이니 1순위로 오른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분란을 유도하는군.’
천마의 신도들이 늘어날수록 시련을 깨는 건 더욱 어려워진다.
지금은 그 숫자가 적지만, 계속해서 분열되고 겁에 질린 자들이 많아지면 결국 마음을 꺾는 자들이 숱하게 출현할 것이었다.
그러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휘광길드의 길드마스터 바하무드, 무율세가의 가주 무율진, 닌자집단의 여제 오오츠키 유카······.’
대도시에 있는 대표적인 집단으로는 태양길드와 휘광길드, 그리고 무율세가가 있었다.
하지만 닌자는 아니다.
대도시에 대거 흘러들어온 것 같은데, 시련으로 말미암아 정체가 까발려지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의 이름은 안 떠올랐다.’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오오츠키 유카의 이름이 제거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헌데도 알렉산드로 퀸타르트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모습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미래가 바뀌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무영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알렉산드로. 놈은 쉽게 죽지 않는다.
과거에도 끝의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나.
“무영! 네가 무영이냐! 크하하!”
망령들과 함께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크게 웃자 망령들이 뭉치며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힘이 넘친다! 천마의 축복은 정말 아름다워!”
남자는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신도가 되고 정신을 반쯤 놔버린 듯했다.
‘신도라······.’
신도가 되었다는 건, 결국 겁쟁이라는 뜻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딱 봐도 수상한 천마의 신도가 될 리 없다.
스릉!
무영은 비탄을 뽑았다.
그러자 무영의 주변으로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천마의 시련이 시작된 직후 나타난 빛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질척이고 있었다.
절대자의 영역!
남자가 무영의 영역에 발을 딛자 망령으로 만든 검이 크게 휘청거렸다.
“뭐, 뭐냐? 망령들이 겁을 먹다니?”
남자의 반쯤 풀린 눈이 커졌다.
망령들. 이미 죽은 사자(死者)의 무리다.
공포와 같은 감정이 있을 리 없고, 있어서도 안 되었다.
헌데······ 망령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무영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다는 듯이.
스으으.
무영의 움직임은 그림자와 같았다.
아무런 소리조차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다가가 단칼에 남자의 목을 베었다.
촤악!
“꺼어억!”
남자의 목이 꿀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낼 리 없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랐다. 손마디마다 짧게 토막 낸 뒤 최대한 남자가 고통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마지막으로 입을 찢어 입안이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장면에, 지켜보던 태양길드의 길드원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다.
“천마의 신도는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곧 무영의 등 뒤에서 멀더던을 비롯한 수천의 망령들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끼아아아아아악!
남자는 목줄이 잘렸음에도 기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후 망령들이 헤집고 지나가자, 남자의 전신엔 뼈밖에 남지 않았다.
이건 무영이 모두에게 하는 경고다.
천마의 신도가 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무영은 이 따위 장난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히아신스가 모은 인장은 총합 여덟 개.
사실상 태양길드의 길드마스터와 비슷한 영향력을 손에 넣은 셈이다.
하지만 그런 히아신스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히아신스는 너무 어려. 이러다간 저놈에게 태양길드가 넘어갈 것이다.”
화룡기사단의 단장, 레논.
턱수염을 길게 기른 그가 살벌한 눈빛으로 무영을 노려봤다.
놈은 너무 설친다.
“하지만 단장님. 총사령관의 무력은 10강과 비견해도 될 거라고······.”
“닥쳐라. 총사령관? 그저 운이 좋은 놈일 뿐이야. 10강이 왜 10강인 줄 안다면, 그딴 망언은 하지 못할 것이다.”
레논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본래라면 레논이 유사시 가장 높은 권한을 가져야 옳다.
지금은 전시였고, 화룡기사단은 태양길드 최강의 집단이었기에.
정예 500명의 힘은 정말 용도 잡을 수준이었다.
“이대로 이 시련이 끝나거든 알렉산드로님이 돌아와도 문제가 된다. 저놈을 쳐낼 명분이 없어. 히아신스가 원한다면 권력 또한 양분되어 버리겠지.”
분란. 분열. 좋지 않은 단어다.
그 결과는 결국 태양길드의 수축으로 나타날 터이니.
하지만 히아신스가 본래 여리다는 걸 레논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만, 무영이라는 강력한 방어막이 있기에 잠시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변하게 했다.
“어쩌시겠습니까?”
“놈이 죽으면, 히아신스도 제정신을 차리겠지.”
레논은 이를 갈았다.
그래. 모든 일의 원흉. 결국 무영이다.
무영만 없었다면 지금쯤 레논이 전병력을 지휘하여 시련을 깨고 있을 것이었다.
가장 강력한 차기 길드마스터의 후보로 오를 수도 있었던 일.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제대로 물을 흐려 놨다.
“그럼······?”
부단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검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레논이 그를 막아섰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 내겐 패가 남아있다.”
그 패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부단장이 만류했다.
“단장님. 그년은 함부로 믿어선 안 됩니다. 언제 뒤를 찌를지 모르는 년이지 않습니까.”
“그래봤자 여자다. 결국 남자 앞에선 순한 양이 되고 말지. 그리고 내가 가보를 갖고 있는 이상, 그년은 나를 따를 수밖에 없다.”
레논은 품을 뒤적이며 법보 한 장을 꺼냈다.
찌이익!
이어 법보를 찢자, 먹으로 그려진 검은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호출한 것이다.
닌자, 오오츠키 유카를.
사념을 담아 보냈으니 굳이 이야기를 더 나눌 필요는 없다.
이제 알아서 닌자가 무영을 제거할 것이다.
‘유카. 너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레논이 피식 웃었다.
진즉에 이럴 것을.
레논은 무영이 죽은 뒤 히아신스를 구슬릴 방법을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귀신들은 조금씩 진화했다.
예컨대 집들이 뭉쳐져 더욱 큰 가령으로 변하거나, 몽마가 실체화되어 사람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아마도 천마의 사도가 늘어나는 만큼 귀신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듯싶었다.
“레논은 정말 위험한 놈일세. 놈을 조심해야 할 거야.”
압둘론.
부 길드마스터인 이 남자가 불현 듯 무영에게 붙어선 말했다.
압둘론은 길드 내에서 팔다리를 모두 잘리고 반송장이 되었다. 하지만 왜인지 기세만큼은 죽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의 여유.’
무영은 그 기세와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힘, 혹은 비밀을 갖고 있는 자들이 이런 특유의 여유를 보인다.
“충고인가?”
“레논은 욕심이 너무 많지. 그래선 시련을 이길 수 없네.”
“천마의 시련을 알고 있다는 말투로군.”
“천마의 시련은 모르지만, 천마에 대해선 알고 있지.”
압둘론은 허허롭게 웃었다.
막 색깔이 있는 가령을 처치하고 정수를 얻은 뒤라는 걸 생각하면, 압둘론의 여유는 일반적인 말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무영이 답이 없자 압둘론이 혼잣말을 계속했다.
“천마는 신이라고 추앙받지만, 사실은 신이 아니야. 놈은 그저 거대한 악의 집합체일 뿐일세. 만약 신이라고 한다면······ 만들어진 신이랄까?”
만들어진 신?
월하는 천마신교를 세웠다. 그만큼 천마를 추앙하기 때문이다.
설명에도 ‘아수라와 반대되는 신’이라 나왔었고.
그래서 무영도 천마를 여러 신 중 하나로 믿었다.
헌데, 압둘론은 아니란다.
“무슨 의미지?”
“결국 믿음의 차이라는 것이야. 믿음 하나로 신이 되었으니, 그 믿음이 사라지면 결국 신도 존재할 수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견해였다.
말인 즉, 천마를 믿는 모든 자들을 제거하면 천마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겁을 주고 신도를 모으는 이유.’
단순한 분열 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가짜 신은 진짜 신이 되고자 자신을 믿는 자들을 늘리고 있었다.
압둘론의 말이 사실일 때의 경우지만······.
그리고 그 중심엔 월하가 있다. 만약 월하가 허상의 신마저 만들어 낸 것이라면, 모든 것의 열쇠는 놈이 쥐고 있는 셈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전음(傳音)이라는 스킬이었다. 멀리서 바람을 통해 소리를 전하는 수법.
아타락시아가 보낸 목소리였다.
―50여명의 닌자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인님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닌자?
‘레논이로군.’
놈이 유카와 관계가 있다는 걸 무영도 들었다.
언젠가는 레논이 사달을 낼 줄 알았는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빠르다.
무영이 전두지휘하며 병사들을 이끄는 게 그리도 보기 싫었나 보다.
‘다 죽여라.’
하지만 닌자들이라면, 특히 ‘유카’마저 자리하고 있다면, 아타락시아 혼자로는 무리다.
내심 고개를 저으며 죽이라는 명령 뒤에 하나 더 덧붙였다.
‘아니, 함께 가지.’
무영은 전투 도중 혼의 꼬리로 분신을 만들어 길드에 체류시켰다.
이후 아타락시아와 함께 닌자들을 사냥코자 자리를 옮겼다.
닌자와 살수.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실용적인가는 오랜 시간 화자된 이야기다.
특히 웡 청린은, 닌자에 대한 연구를 노골적일 정도로 심하게 했다.
서로가 같은 그물에서 논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 결과 닌자에 대한 대처법 등을 웡 청린이 모두 개발해냈다.
그들의 기묘하기 짝이 없는 기술 모두를 파훼하고 찢어발길 수 있게끔 연마하고, 그러한 기교 모두를 살수들에게 주입시켰다.
무영은 제일의 살수로서 모든 걸 이어받았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이라도 그 기교는 여전히 살아있다.
촤아악!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몸이 잘린다. 피가 솟구친다.
“습······!”
닌자는 말조차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이 꿰뚫렸다.
속전속결.
순식간에 오십에 달하는 닌자 중 절반이 죽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닌자들도 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닌자와 살수의 싸움.
요컨대, 누가 먼저 공격하느냐의 차이가 가장 크다.
그들은 무영이 이 시점에서 공격해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작은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아타락시아와 무영은 누구보다 완벽한 살수로 변해있었다.
어둠과 동화되어 닌자들의 명줄을 끊었다.
‘유카는 안 보이는군.’
오오츠키 유카와 강력한 닌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영의 암습을 위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실망이다.
유카라면 무영의 진면목을 어느 정도 알아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레논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진면목을 봤다면, 자신이 직접 오거나 그에 준하는 대닌자들을 보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예 무영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저 레논의 부탁, 혹은 명령이기에 구색을 맞추고자 움직인 것 같았다.
‘몸은 성하게 하라. 놈들을 언데드로 만들 것이다.’
―명령을 따릅니다.
전음이 흘러나왔다.
무율세가는 여러모로 무영에게 이점을 많이 주었다.
검골 삼형제와 아타락시아 만으로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또한, 닌자들은 최대한 몸성히 죽일 필요가 있었다.
무영은 스산하게 미소 지었다.
습격한 닌자들을 언데드로 만들고, 레논에게 그대로 선물할 셈이었다.
뿌린대로 거두게끔!
< 36. 아수라장(完) > 끝
ⓒ
< 37. 악령군주(1) >
모든 천마의 신도들에게 히아신스는 제거해야할 대상 1위다. 알렉산드처럼 강한 것도 아니면서 영향력만 높으니 그들에겐 정말 알맞은 사냥감이었다.
그것을 태양길드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당연히 히아신스를 중심으로 인원이 편성되었고, 그 덕에 다른 곳들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히아신스. 너 하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고 있다. 지금이라도 인원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레논이 아픈 부분을 콕 집어서 말했다.
하지만 히아신스도 딱히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태양길드, 그리고 그들 형제자매에게 인장의 힘은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인장의 인력에 영향을 받도록 정신과 육체가 반쯤 개조되는 탓이다.
히아신스는 가장 많은 인장을 가지고 있고, 태양길드의 길드원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히아신스를 지키는 방향으로 진을 짠 것이었다.
레논도 그것을 알지만, 굳이 집어서 말한 건 히아신스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히아신스는 슬쩍 눈을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히아신스에게 있어서 지금은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사람이었다. 그만 곁에 있으면 무서울 게 무엇이 있으랴.
“좋아요. 가령을 사냥하고 정수를 모으는데 집중하죠. 천마의 사도들도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요.”
히아신스는 대열을 바꿨다.
너무나 손쉽게 허락하자 레논의 표정이 굳었다.
‘이것 봐라?’
예전이라면, 몰아붙이는 순간 하얗게 질리며 굳었어야 한다.
머리를 푹 숙인 채 입을 꾹 닫아야 정상이다.
헌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
마냥 어렸던 소녀가 레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이.
‘이대로는 안 된다.’
역시 옆에 있는 놈이 문제다.
무영. 저놈이 옆에 있으니 히아신스가 변하고 있다.
이대로 히아신스가 권력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면 태양길드가 사지분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해.’
살심이 솟구치는 걸 억지로 막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무영은 사라졌어야 옳다.
허나 닌자들이 움직이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유카는 대체 뭘 하는 거지?’
오오츠키 유카.
닌자들의 주인이며, 여제라고 불리는 여인.
서른 중반대의 농염한 미모와 몸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눈앞에 당도한 남자를 살짝 당황하며 바라봤다.
한없이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마치 감정이 없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누구죠?”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제가 먼저 말을 걸다니.
하물며 이곳은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몇 겹의 안전장치와 무수히 많은 위장으로, 닌자들이 아니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곳에 닌자가 아닌 남자가 나타났다.
유유자적.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하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닌자들이 있었다.
닌자들?
아니······.
‘언데드.’
유카는 정정했다. 과거엔 닌자였으나 지금은 언데드가 되어버린 군상이다.
남자의 눈이 유카에게 처음으로 향했다.
그러자 유카는 한차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죽음을 몰고 다닌다.
남자는 사신이었다. 어쩌면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이만한 사내, 본적이 없다. 대적할 수 있다면 살수림의 웡 청린 정도일까.
누군가를 재단하고 진면목을 보는 눈에 있어서 유카는 스스로가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러니 이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무영.”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영. 무영.
‘들어본 적 없어.’
아무리 되뇌어도 기억에 없다.
저런 특이한 이름이라면 기억이 날 법 한데도.
말인 즉, 무영은 외부적인 활동을 여태껏 하나도 안 했다는 뜻이다.
아니라면 저만한 강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으므로.
“원하는 게 뭐죠? 전쟁?”
유카의 주변으로는 500이 넘는 닌자들이 숨어있다.
하물며 유카 역시 가장 뛰어난 닌자 중 하나다.
제아무리 무영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호랑이 굴이었다.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건드리면 그 순간 잡아먹힐 것만 같은······.
툭!
무영이 바닥에 표창 한 자루를 던졌다.
그것을 본 유카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 이걸 어떻게?”
“개입하지 마라. 오오츠키 유카.”
무영이 조용히 말했다.
‘닌자도’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진 표창.
표창은 초대 닌자왕이라 불린 자의 유품이었다.
이 표창이 있으면 닌자들은 그 상대를 공격할 수 없다. 태양길드의 인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본래는 레논에게 있어서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건만.
“이걸 전하러 온 건가요? 그렇다면 멍청하군요. 닌자도를 갖고 있으면 저희가 어쩌지 못한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직접 훔쳐서 주인에게 가져다줄 정도면 이미 알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굳이 전하러 왔다면 정말 순해빠진 거다.
하지만 무영은 순함과는 거리가 먼 듯싶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웡 청린에게 복수하고 싶나?”
“······!”
유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웡 청린. 그 이름을 무영이 어찌 안단 말인가!
살수림을 다스리는 수장의 이름을 아는 자는 마계에서도 손에 꼽는다.
유카는 그중 하나였다. 다만, 좋은 의미로 알고 있지는 않았다.
복수!
초대 닌자왕을 죽인 남자에 대한 열렬한 복수심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역시 웡 청린과 자신만 알고 있어야할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죠?”
스스로 말을 했을 리는 없다.
관계자. 웡 청린의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유카카 슬며시 발을 한 발자국 뺐다. 발을 위로 드는 순간, 500명의 닌자가 무영을 한 번에 공격할 터.
“닌자왕 본인에게 직접.”
“그게 무슨 헛소리······.”
“신성도시 뮬라란. 그곳 지하에 갇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그곳에 가뒀지.”
유카의 미간이 좁혀졌다.
닌자왕은 웡 청린에게 죽었다. 유카 본인이 직접 보았다.
헌데 아니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회귀하기 전 뮬라란의 지하감옥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정신착란과, 웡 청린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던 남자.
그곳에서 그를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암살을 위해 위장 잠입하여 일부로 지하감옥에 갇혔는데 같은 옥을 쓰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웡 청린에 대한 복수는 너만 바라는 게 아니다.”
오오츠키 유카는 이성적인 닌자였다.
계산이 빠르고 모험을 하지 않는다.
다만, 적이 되면 귀찮다.
서로의 목표가 비슷한데 굳이 적대할 이유도 없었다.
유카가 무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복수심의 진위가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폭력적인 그것이 남자의 이성에 의해 간신히 터지지 않고 있었다.
무영은 아타락시아가 사용하던 수법, 전음으로 한 가지 단어를 유카에게 더 보냈다.
―후앙.
“······!”
후앙. 닌자왕이 어렸을 적 유카를 부를 때 되뇌던 애칭이다.
오로지 그만 알고 있는 사실을 남자가 안다.
‘선대가 정말 살아있단 말인가!’
유카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남자, 무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당장 뮬라란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 시련을 완료해야만 했다.
뚜벅!
무영은 더 이상의 답을 들어지 않아도 된다는 듯 무심하게 떠나갔다.
여제라 불리던 천하의 유카조차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유카는 굳이 무영이 거래를 내밀지 않아도 알아서 시련을 완료하고자 움직일 것이었다.
사도가 되진 않는다. 여제의 자존심은 강하고 다른 신을 섬길 리도 없었다.
사령세가, 혹은 월하의 방해쯤은 될 수 있으리라.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녀는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무영의 힘을 간략하게나마 보았다. 느꼈다.
하물며 무영만이 아는 사실도 그녀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휘하의 닌자 50명을 죽였대도 마찬가지다.
유카는 이성적이고 계산이 빠른 여자다.
무영을 적대하는 것보다 놔두는 게 자신에게 훨씬 득이 되리란 걸 알 터.
어쨌건, 선전포고는 끝났다.
닌자도를 돌려줬으니 더 이상 닌자들이 방해하진 않을 것이었다.
“화룡기사단과 레논을 쳐라.”
스스슥.
오십여 명의 닌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보며 무영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웡 청린에 대한 복수는 온전히 내가 할 것이다.’
원했다면, 살짝 사실을 왜곡해 유카에게 웡 청린을 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웡 청린이 만들어놓은 기지들을 무영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것만큼은, 이 복수만은 양보 못한다.
화룡기사단도, 레논도 사람이다.
볼일을 보고, 먹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인간.
정예라 불리는 이들조차 하루종일 긴장감을 고조시켜놓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방심이 목숨을 앗아갔다.
닌자들은 무영의 지시에 따라 작은 부분부터 화룡기사단을 집아삼켰다.
누군가에게 습격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두 시간 뒤에나 알게 되었다
“일곱 명이 죽고 두 명은 실종됐습니다.”
쾅!
“그게 말이 된단 말이냐!”
레논이 땅을 박차며 이를 갈았다.
‘유카 그년이!’
그리고 습격한 대상이 닌자라는 것도 알았다.
설마 유카가 뒤통수를 칠 줄이야!
혹시 몰라서 닌자도를 찾았다.
있긴 있으나, 그게 위조품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 물건을 훔쳐가? 감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나를 따라와라. 지금부터 닌자들을 토벌하겠다!”
빠드득!
유카. 그년이 있을 장소가 어딘지 레논은 이미 파악해 놨다.
레논의 성격상,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카도 레논이 곧 쳐들어올 것임을 알았다. 그녀라고 미리 정보망을 펼쳐놓지 않았겠는가?
레논은 텅 비어버린 지하만 보게 되었다.
이어 뒤를 돌아서 돌아가려는 찰나, 레논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철컹!
철컹!
수백의 강시들이 나타났다.
적강시와 흑강시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데스나이트가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손짓하자 강시들이 레논과 화룡기사단을 순식간에 감쌌다.
“사도가 아닌 자들. 죽음으로 답하라.”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레논이 급히 막아섰지만 열 합을 버티지 못했다.
‘강하다!’
정교한 검술. 빠른 경신술까지.
천마의 힘으로 강화되어 힘 대결에서도 밀린다.
레논조차 겨우 막아내는 게 전부였다.
“끄아아악!”
“다, 단장님!”
그러는 사이 화룡기사단은 철저하게 분해되고 있었다.
숫자도 밀리지만 강화된 강시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단원들이 단장을 불렀지만, 레논은 답하지 못했다.
촤악!
레논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의 눈엔 경악만이 가득했다.
이처럼 허무하게 목숨을 내어줄 줄이야.
하지만 레논을 죽인 데스나이트는 무감정하기만 하였다.
마치 벌레를 죽인 것처럼. 당연하게만 여겼다.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늘에 맹세할 따름이었다.
두 공허한 눈에 보랏빛이 맴돌며 수많은 악령이 악귀가 되어 달라붙었다.
하늘에서 천마의 빛이 내려왔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타칸이 흡수하였다.
“천마의 은총으로 충실한 종, 타칸이 죽음을 바치나이다.”
곧이어 화룡기사단이 전멸했다.
< 37. 악령군주(1) > 끝
ⓒ
< 37. 악령군주(2) >
휘광길드는 가장 거대한 아홉 길드 중 한곳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다.
대도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김태환의 소속이기도 한 장소.
“전투의 흔적이 있군.”
그곳에 도착하자, 무수히 많은 전투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기이한 기운.’
우- 우-
무영이 이끄는 망령들이 기분 나쁜 울음을 토해냈다.
망령과 비슷하되 다른 사이한 기운이 주변에 흩뿌려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히아신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논과 화룡기사단이 사라지고 한 차례 흔들릴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태양길드는 아직까진 건재하다.
고작 그 정도로 무너졌다면 최강의 길드라고 불릴 리 없었다.
“사령세가. 놈들이 이곳을 공격했다.”
사이한 기운의 정체는 바로 사령세가 특유의 것이었다.
말인 즉, 사령세가가, 혹은 천마의 신도들이 이곳을 덮쳤다는 의미.
‘놈들은 계속해서 불어난다.’
결코 가벼이 넘겨선 안 되는 일이다.
벌써 휘광길드만한 집단이 당했다면, 천마의 신도를 자처하는 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10인’의 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휘광길드의 길드마스터 ‘바하무드’는 아직 건재하다는 뜻이다.
잠시 후 탐색관련 스킬을 가진 사람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주변을 탐색하던 이들 중 하나가 외쳤다.
“대규모로 이동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땅의 기억을 조금씩 훑어보던 탐색자였다.
그의 눈이 청광색으로 변하며 레이더마냥 주변 땅을 훑어보고 있었다.
모두가 다가오자, 그가 설명했다.
“이곳으로 오천 여에 달하는 인원이 움직였습니다. 정확히 남서쪽을 향해서요.”
“오천 명이나요? 혹시 움직인 이들이 휘광길드인가요?”
히아신스가 묻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땅의 기억을 훑는다고 하더라도 만능은 아니다. 대략적인 구성밖에 엿볼 수 없다. 그래도 오쳔 명의 움직임을 측정했으니 탐색자로서 훌륭하다 할 만 했다.
“남서쪽이면 하늘도서관이 있는 곳 아닌가요?”
“투기장도 그곳에 있습니다.”
“휘광길드라면 저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바하무드는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니까요. 굳이 하늘도서관으로 향할 이유가 없어요.”
히아신스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때렸다.
놀라운 일이지만, 히아신스는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전장이라는 특수성. 그리고 억압된 상황에서 해방되자 두 개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투기장으로 향한 무리가 사령세가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어쩌면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네요.”
“우려라 하시면?”
“이틀 뒤. 푸른사원의 게이트가 열리는 날입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죠?”
“아······!”
탐색자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무영도 마찬가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의 시련, 천마의 영역화가 되어서 사원의 연결도 끊긴 줄 알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새로운 인물들이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다면?
‘몰살.’
그만큼 사령세가의 힘은 더 커질 것이다.
천마의 사도들도 사냥을 함에 있어 더욱 큰 보상을 얻어 강화될 것이고.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맘때쯤 등장하여 성장한 영웅이 많았다.
무영이 도착하고 1년 뒤 게이트를 넘어왔던 대표적인 영웅이······.
‘산의 군주 붐바르!’
그 역시 용군주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일으켰던 남자다. 산의 힘을 다루는 그가 게이트를 넘어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그대로 죽게 놔두긴 아까웠다.
“투기장으로 가야한다.”
무영이 짧게 읊조렸다.
히아신스도 생각이 다르진 않은 듯싶었다.
만약, 이 싸움이 길어질 경우 푸른사원과 연결된 게이트가 유일한 구원책이 될 수도 있는 탓이다.
적은 계속 늘어난다.
아군은 계속 줄어든다.
비록 막 도착해서 약하다고 하지만, 전장은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적당한 원조와 도움을 주면 순식간에 성장해 힘이 되어줄 터.
혹시 수성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곳만큼 적을 막기 용이한 곳도 얼마 없었다.
하늘도서관과도 가까워서, 공격을 가기에도 좋다.
“투기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런 곳을 빼앗길 순 없었다.
무영은 본신의 힘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가 악귀라면, 더한 미친 악귀처럼 날뛰었다.
투기장을 점거한 사령세가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자들은 시체술사에게 조종당하는 강시가 되었고, 천마의 사도들 역시 많았다. 사령세가의 인원 천 명 정도를 합치면 대략 오천이 되는 상황.
허나 태양길드와 비교하면 조족지혈. 질과 양 모두 상대가 안 된다.
“천마의 은총이여!”
“이 천한 목숨을 천마께 바치나이다!”
그러자 놈들이 택한 건 자폭이다.
몸을 날려 폭탄처럼 이용했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수성을 하자, 여간 골치가 아팠다.
하여 무영 역시 무자비한 정면돌파를 택했다.
‘가시화.’
전신에서 가시가 솟는다. 비록 민첩이 낮아지지만, 방어력은 대폭 상승하는 기술.
귀족악마를 사냥하고 얻은 스킬이었다.
<물리저항이 200상승했습니다.>
<마법저항이 150상승했습니다.>
<민첩이 60%(235) 하락합니다.>
안 그래도 무영은 마법저항이 엄청나게 높은 편이다.
10강 정도의 강자가 아니고선 마법저항이 400을 넘기는 인류는 얼마 없었다.
헌데 가시화 스킬을 사용함으로서 500을 훌쩍 넘겨 600에 다다랐다.
정말 어지간한 스킬이 아니고선, 무영에게 타격을 주는 게 불가하다.
물리적인 공격 역시도 통하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무영은 돌격해 길을 만들었다.
“정말 사람이 아니로군.”
“스킬이 몇 개야?”
모두가 무영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전투가 있으면, 무영은 달려갔다.
싸움에 미친 악귀 그 자체.
<영향력 순위가 격상했습니다.>
<10위(500점) -> 9위(1,000점)>
<천마가 규칙을 변형합니다. 앞으로 이틀간 신도들이 얻는 점수가 두 배가 됩니다.>
변화가 생겼다.
천마의 개입. 설마 규칙마저 새로이 정립할 줄이야.
‘급한 놈이군.’
무영은 혀를 차며 주변에 얼음결정화를 둘렀다.
쾅! 콰콰쾅!
결정들이 이내 흔들리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 신도들이 휩쓸렸다.
하지만 무영은 멀쩡했다.
‘600의 마법저항이라.’
이만한 수치는 과거에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비록 스킬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분이었다.
입구를 막던 놈들이 정리되자 무영은 가시화를 풀었다.
스릉!
그리고 비탄을 뽑았다.
“놈을 막아!”
“무영! 저놈을 죽이면 천점이다!”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적들!
발을 뗀 순간, 무영은 살인귀가 되었다.
대격전 끝에 투기장을 되찾았다.
거대한 원형의 투기장엔 온갖 방어마법이 걸려있어서 외부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공중으로 침입하려면 높은 랭크의 비행스킬을 요구한다.
잘 만든 요새와 같았다.
그리고 투기장의 끝에 수십 개의 검은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저게 게이트다. 조금씩 활성화되며 문의 모양을 이뤄가고 있었다.
“서방니이임!”
투기장을 점거하고 얼마 안 되어서 불현 듯 우히가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대도시에 들어서고 통 우히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요, 요정?”
“요정이다!”
“세상에······.”
무영을 향해 달려온 우히를 보고 사람들이 기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요정은 잡고 싶어도 잡지 못하는 존재.
요정이 따라다니는 사람은, 대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이다.
“서방님. 우히가 그동안 보고 싶었지요?”
“이름이 우히였군.”
무영이 시치미를 뚝 떼자 우히가 투정부렸다.
“씨, 튕기는 것도 매력적이야. 그래도 우히가 알아본 걸 알게 되면 우히를 다시 보게 될 거예요.”
“놀러다닌 게 아니었나?”
“아니거든요! 이 시련. 요정이 만든 거 같애요!”
일순, 정적이 일었다.
천마의 시련.
당연히 천마가 만들어낸 것인 줄 알았건만.
요정이 만들었다?
‘보통의 시련은 요정이 만들지. 그리고 압둘론은 천마가 신이 아니라고 했다.’
무영도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천마가 신이 아니고 요정이라면, 월하의 ‘신 만들기’ 작업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실은요. 여기 도시에 들어와서 뭔가 되게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거예요. 우히가 그런 거 못 참잖아요? 그래서 막 이곳저곳 막 들쑤셔봤는데 요정의 집이 몇 개 발견됐어요.”
“요정의 집이라. 시련을 만들면 준다고 했지.”
“네. 근데 그걸 놔두고 다니진 않아요. 그리고 모두 주인이 없었어요. 우히가요.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더 찾아봤더니! 주인이 있는 집이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위험한 요정의 집이었어요!”
“아주 위험한 요정?”
“요정왕이었어요.”
무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요정여왕이 새로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왕은 처음 듣는다.
그런 무영의 마음을 읽은 듯 우히가 설명했다.
“아! 여왕님 말고요. 엄청 오래 전에 요정왕이 있었다가 사라졌거든요. 무언가 잘못을 해서 위엄을 잃고 ‘공허’로 떨어졌대요. 근데 왜 요정왕의 집이 이곳에 있는 걸까요? 뭔가 냄새가 나지 않나요?”
우히가 어깨를 으쓱했다.
요정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잃었다.
오랫동안 부재한 ‘왕’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공허에 있는 그 왕을 불렀다면.
월하.
놈이 부른 거다.
공허는 말 그대로 무(無)의 지대.
신이 되지 못한 자들의 말로로 치부되는 곳.
그곳에 있던 이를 부를 만한 존재는 월하밖에 없었다.
‘요정왕이 시련을 설계하고 천마가, 신이 되고자 한다.’
얼추 들어맞는다.
시련은 본래 요정이 제일 잘 만드는 법이고, 본래 신들은 이토록 정교하지 못하다. 이면의 주인들이나 아수라가 내려준 시련치고 제대로 된 게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때요? 우히 잘했죠?”
이어 우히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영은 가볍게 손을 올렸다.
적은 신이 아니다.
그 믿음 하나가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영향력 순위가 격상합니다.>
<9위(1,000) -> 6위(2,000)>
<천마가 규칙을 새로이 정립합니다.>
<제거대상들에겐 천마의 표식이 새겨집니다.>
<천마의 사도들은 본능적으로 사용자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천마의 사도가 되시겠습니까?>
<이는 천마가 사용자에게 직접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사도가 된다면 모든 위험이 해제되고, 더욱 큰 힘과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천마가 신이 아니라는 의심을 했다는 것만으로, 놈이 직접 움직였다.
모두가 신이 아니라고 믿으면 정말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는지.
우히의 견해가, 천마를 조급하게 만든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지.’
무영은 단호히 거부했다.
*
이틀간의 격전.
물경 일만에 달하는 사도와 사령세가, 강시들이 투기장을 노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대는 통에 태양길드의 길드원 모두가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켰다.
푸른사원과 연결 된 게이트는 멀쩡하다.
지이이이이익!
이틀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오자, 게이트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초췌하고 힘이 없었다. 그래도 적당한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게이트를 넘어서 태양길드와 무영 등을 바라보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사원에서 한 달을 버티고 힘들게 넘어왔는데, 웬걸.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푸른 사원에서 같은 사람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대부분이 학습했다.
긴장감은 더욱 올라갔고······ 그러던 와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왔다네! 왔다네! 나 대마법사 오스카가 왔다네! 크하하! 너희는 뭐냐? 적이냐? 썩 물러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볼 게다!”
웬 미친놈의 출현이었다.
미친놈의 손에서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다른 한 손에는 얼음창이 만들어졌다.
“대단하군요. ······ 정신이 살짝 이상한 것만 빼면요.”
히아신스가 말했다.
동시에 아예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스킬을 다룬다. 그것도 푸른 사원을 막 나온 초보자가 말이다. 만약 이 장면을 다른 길드나 세가들이 봤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눈독을 들였을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마계에서 어디 성정이 중요하던가.
그보단 힘과 가능성이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이곳이다.
“멀린의 수제자! 나 대마법사 오스카를 누가 막으리요! 당장 꺼지지 않으면······ 컥!”
무영이 미친놈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놔라!”
미친놈이 얼음창과 화염구를 냅다 무영의 얼굴에 던졌다.
무영은 피하지도 않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킬이 터졌지만, 무영은 멀쩡했다.
작은 그슬림조차 없었다.
그걸 보고 미치놈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어, 어떻게 내 마법을 맞고 멀쩡한 거냐! 그래. 네가 악마로구나!”
“멀린이라고 했나?”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이 악마야!”
미친놈은 이미 무영을 악마로 확정지은 듯싶었다.
아무리 뛰어난 초보자라고 해도, 결국 초보자다.
이미 초강자의 반열에 든 무영에게 초보자가 상처를 입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무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미친놈이 넘어온 게이트가 가장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의 인원이 살아온 것이다.
그걸 보면 미쳤을 뿐 악인은 아닌 것 같았다.
‘멀린.’
하지만 그보다 무영이 놀란 건 멀린이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듣고 무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푸른 사원의 대마법사!
과거 세 마신의 발목을 잡았던 진정한 마법사가 멀린이었다.
당시의 전투는 마계가 뒤흔들릴 수준이 대격전이었다.
본래 멀린은 무영을 제자로 들이려했지만, 무영이 거부했다.
헌데 그가 새롭게 제자를 들였단 말인가?
무영의 눈이 다시금 미친놈에게로 향했다.
< 37. 악령군주(2) > 끝
ⓒ
< 37. 악령군주(3) >
동시에 살기를 쏘아 보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정제 된 살기다. 너를 죽이겠다는 그 기운은 사자의 저주파와 같이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미친놈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는 게 나을 거다.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네 눈알을 뽑고, 네 심장을 씹고 대가리를 태워버릴 테니까!”
발악과 같았다.
하지만, 제법 독기가 있다.
무영의 살기를 지근거리에서 받고 버틸 수 있는 초보자는 몇 없을 것이기에.
물론 제대로 쏘아내면 전신이 터져버릴 터였다.
그럼에도 제법이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벌써 나온 거냐.”
멀린의 제자가 된다는 건, 어느 정도 완성이 되기 전까지 푸른 사원에 체류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출중한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1년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놈은 도망친 것이다.
멀린이 대충할 리는 없으므로, 본격적인 수련에 질려 푸른 사원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뭐, 뭘······ 꺼헉!”
무영은 놈의 목을 잡고 그대로 올렸다.
놈은 바동대며 전신을 떨어대다가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무영의 눈은 잠잠한 분노로 가득 찼다.
멀린의 제자. 이 타이틀은 마계에 지각변동을 주기 충분하다. 마왕과, 쓰임에 따라 마신도 잡을 수 있는 그런 직업이 ‘대마법사’였다.
그걸 내다버렸다.
그 희망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불량품으로 뛰쳐나왔다.
어찌 열이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그렇게 죽겠지.
당장 이 투기장을 무영이 아닌 사령세가가 그대로 점거하고 있었다면, 이놈은 강시의 좋은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철퍼덕!
무영은 인상을 구기며 놈을 바닥에 던졌다.
“콜록! 콜록!”
“잘 들어라.”
어쨌거나 오스카. 이놈은 멀린으로부터 마법을 배운자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킬’이 아니라, 정통 ‘마법’에 도달한 자!
살려서 부릴 수만 있다면 썩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어 주변을 둘러보자, 수만 개의 눈이 무영에게 도달했다.
“이곳은 마계다.”
초보자. 무엇을 알겠는가.
하물며 지금 상황은 그들에게 최악과 같았다.
나오자마자 다시금 전장으로 내던져졌으니까.
무영이 투기장의 하늘을 바라봤다.
키에에에엑!
곧 뼈로 만들어진 와이번 따위가 오르며 투가장에 걸린 보호마법을 깨부수고 난입하기 시작했다.
스릉!
무영은 비탄을 뽑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은 전장이다.”
천마의사도들이 가진 스킬을 각양각색이다.
천마가 내려준 스킬 외에도 자신만이 가졌던 고유의 스킬 또한 많았다.
그것을 무영이 전부 예측할 순 없다. 다만, 그렇기에 최악의 경우 투기장의 보호마법이 조만간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하였다.
그렇게 공중에서 난입한 숫자가 오백여 가량.
나머진 지상을 통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양길드의 길드원도, 무영도 싸움에 이골이 나 있었다.
초보자들은 신들의 싸움을 보는 것처럼 굳어버린 채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산 넘어 산이라더니. 미치겠네.”
“저 사람들은 대체 정체가 뭐야?”
“푸른사원의 괴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만.”
놀라움, 경악, 짙은 한숨.
저마다 느끼는 감정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눈을 떼지 못했다.
푸른사원에서도 한 달간 힘들었다.
괴물들은 매일 같이 쳐들어오지, 식량은 부족하지.
헌데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만큼 지금의 전투는 역동적이었다.
특히 무영의 싸움방식은, 처절하다. 무척이나 공격적이고 뒤가 없다.
가장 선두에서 적의 선두를 깨부수며 길을 튼다. 성공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섬멸할 수 있지만 실패하면 개죽음뿐이 안 되는 전술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냈다.
뿐만 인가.
‘괴물.’
그는 죽음을 다룬다.
그에게 죽은 자들은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다.
괴물보다 더한 괴물이 있다면 저 사람이리라.
무영은 태양길드의 총사령관이라는 직책 탓에 숨기고 있었지만, 천마의 시련이 시작되고 레논이 사라진 뒤 그 힘을 밝힌 것이다.
허나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이미 망령을 다룰 때부터 논의된 문제.
워낙 스킬이 많아서 그런 스킬 하나가 더 있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는 태도였다.
짙은 피냄새가 사방을 둘러쌌다.
시체들이 즐비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수라장. 마계는 이런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죽여야만 살 수 있다더니······.”
“저들이 우리를 죽이면 어떡하지?”
허나 그들에겐 충격이었다.
그럴 수밖에.
푸른 사원을 벗어나면, 끝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다. 이제 초보자수련을 끝낸 셈이다.
특히 오스카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멀린님의 말이 사실이었어.’
세상에는 강한 인간도 많다고 했다.
하지만 오스카는 스스로가 최강라고 여겼다.
푸른사원에선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고수가 된 것 같았고 푸른사원에 갇힌 채로는 너무나도 무료했다.
멀린은 인간이 아닌 고로 다른 인간 강자들을 꺾고 싶었다.
‘안일했다.’
작아졌다.
이곳에서 오스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저들의 눈에 비친 오스카는, 그저 수많은 초보자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다.
만약 저들 중 누구라도 자신들을 죽이고자 한다면 초보자로선 막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서걱!
마침내, 마지막 사도의 목을 잘라낸 무영이 비탄을 뒤로 당겼다.
그러자 비탄에 묻은 피가 무영에게 흡수되었다.
‘악마!’
저들 중 악마가 있다면 분명히 저놈이다.
그럴 만한 모습이었다.
사람을 개미처럼 밟아 죽이고, 악독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
오스카는 확신하며 마법을 되뇌었다.
놈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한다.
“죽엇!”
물과 바람, 땅과 불, 그리고 금의 기운이 헌데 어우러졌다.
오스카가 현재 쓸 수 있는 최고의 마법.
천하의 악마라도 이걸 맞고 멀쩡하진 못할 것이다.
스팟!
오행의 기운이 뭉쳐진 푸른색의 구가 무영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무영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비탄을 들었고, 눈 깜빡할 사이에 푸른색의 구를 갈랐다.
기운이 뭉쳐진 순간부터 무영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있었지만 그뿐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오스카는 입을 쩍 벌렸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그러더군.”
이어 무영은 비탄을 집어넣었다.
죽이진 않는다. 멀린의 제자. 1년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정통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재능도 꽤 출중하다는 뜻이니, 영지발전에도 도움이 되리라.
물론 아무리 재능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영을 공격한 순간 베어버리는 게 정상이다. 최후까지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마신을 막아낸 그 ‘멀린’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일단 정신 상태부터 뜯어고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좆 됐다.’
오스카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스카에게 있어서 무영은 악마 그 자체가 되었다.
히아신스의 눈이 몽환적으로 물들었다.
무영에게 요정이 따른다는 걸 알고 더욱 신뢰가 갔다.
이제는 그가 기사이고 아니고가 상관이 없었다. 그저 ‘무영’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요정은 진짜 영웅만을 따른다.
고로, 무영은 영웅이었다.
‘때리는 모습도 멋져.’
그러다보니 콩깍지가 쓰였다.
오스카가 처절하게 맞는 장면에 모두가 혀를 내둘러도 히아신스만은 아니었다.
‘주먹에 피가 묻은 모습도 멋져.’
주먹에 피가 묻고 오스카의 전신이 걸레처럼 변했음에도 히아신스는 무영이 숨을 쉬는 것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아무리 마계라도 사랑은 있다.
특히 소녀인 이상 그 감성은 죽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이 히아신스에겐 절정기였다.
단 하나의 메시지만 떠오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태양길드의 길드마스터, 알렉산드로 퀸타르트가 사망했습니다.>
“······!”
히아신스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대관절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영웅과 버금가는 인간이 죽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가 송달된다.
사실을 알고 더욱 절망하라는 건지, 아니면 더욱 정진하라는 의도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는 영향력만으로도 영웅 이상의 존재였다.
그의 죽음은 당연히 모두에게 알려졌고 그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털썩!
히아신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색이 시퍼래졌다.
“길드마스터가?”
“말도 안 돼······!”
“거, 거짓말이겠지.”
태양길드도 난리가 났다.
일반 길드원에게 있어서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는 신화다. 가장 밑에서 위로 올라간 사람.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그가 실종되었을 때에도 다시 돌아오리란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다.
레논이 일을 빠르게 처리하려했던 것도 그래서다. 알렉산드로가 돌아오면 그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게 뻔하니까 미리 권력을 손에 넣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헌데······ 죽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무영 역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는 본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인물.
인류 10강 중 하나다.
가장 많이 살수림을 이용했을 정도로 암계에 능하다.
그가 벌써 퇴장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가 틀어졌다. 그 결과 그가 죽었다.
알렉산드로는 분명히 노림수가 있었다. 일부로 몸을 숨긴 채 마지막 한 방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럴진대.
대체 어디서, 누가?
무영의 눈빛이 한차례 일렁였다.
*
타칸이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떨어진 팔을 들어, 다시금 상처부위에 붙였다.
“미천한 종이 배신자를 처단했나이다.”
곧 보랏빛이 생성되며 떨어진 팔이 붙었다.
반면 이미 죽은 시체는 답이 없다.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는 피를 한 움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곳은 지하수도.
하늘도서관과 이어진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하지만 이미 주변은 반쯤 붕궤된 상태.
타칸과 알렉산드로 퀸타르트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지형이 변한 것이었다.
‘너는 강자다.‘
타칸도 인정했다.
자칫 잘못했다면 자신이 당할 뻔했다.
그로도 모자라 흑강시 백여구를 혼자 박살냈다.
어째서 타칸이 이런 지하수도에 있는가······.
월하는 현재 하늘도서관을 떠날 수 없다.
하여 타칸으로 말미암아 죽이도록 명했다. 그 결실을 이제야 맺었다.
악령들의 힘과 천마의 힘은 궁합이 잘 맞았다.
아수라와 천마가 비슷한 성향을 지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로도 부족해 새로운 검도 한 자루 얻었다.
검은색 기운이 물씬 어린 ‘광살자의 검’!
사용자에 따라서 능력치를 달리하는 검이다.
죽음과 가까울수록 능력이 더욱 올라가는데, 타칸이 사용하자 단번에 S랭크가 되었다.
덕분에 타칸은 초월체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다.
만약 타칸이 아닌 다른 자가 이곳에 왔다면 알렉산드로를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
이어 타칸이 그 근처에 떨어진 거울 하나를 손에 쥐었다.
태양거울. 태양길드의 신물(神物)이다.
알렉산드로가 유일하게 챙긴 물건.
타칸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비명도 내지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안을 방황한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끝내는 돌아왔다.
외부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내적으로도 비슷했다.
그런데 이후 타칸은 태양거울을 망토 안으로 숨겼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아예 의식도 안했다. 본능적으로 거울을 숨긴 채 타칸조차 잊어버렸다.
“다음 목표는 투기장이다. 천마께서 그곳의 탈환을 원하신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타칸이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 일천에 달하는 강시가 발을 옮겼다.
< 37. 악령군주(3) > 끝
ⓒ
< 37. 악령군주(4) >
흉비쉬는 사령세가에서 제 할 몫을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육망성을 부수고, 하늘도서관에 침투하여 실시간으로 세작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데드라고는 하나, 무영이 만든 것이기에 활용도가 높다.
아수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월하에게만 눈에 띄지 않는다면 더욱 큰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흉비쉬님. 들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가 죽었다고 합니다.”
“제기랄. 충성하는 건 우리인데 왜 엄한 놈에게 그런 중한 임무를······.”
“저희가 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있어봐야 더 이상의 공을 쌓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흉비쉬는 사령세가의 초강자다. 당연히 따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무영에게 패배하고 지금은 그저 언데드일 따름이었다.
흉비쉬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도서관을 나서면 실시간으로 무영에게 보내는 정보가 늦어진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간은 생명과도 직결된다.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이곳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목소리를 쥐어 짜내듯이 흉비쉬가 말하자 주변의 분위기가 급히 침울해졌다.
더욱 많은 천마의 은혜를 입으려면 공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그저 지키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월하님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까?”
“없다.”
“이미 아투카님이나 룬파파님은 하늘도서관을 내려가셨습니다. 알렉산드로의 죽음이 확실시 된 지금이 태양길드를 무너트리기 최고의 시기라면서요.”
“타칸도 곧장 투기장으로 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투카와 룬파파가?
그 둘은 흉비쉬와 마찬가지로 사령세가의 초강자다.
가장 영향력이 큰 세 명 중 두 명이 하늘도서관을 내려갔다.
거기에 타칸이 더해진다, 라.
이건 이미 불리의 수준을 넘었다.
하늘도서관에 배치된 절반이 넘는 병력이 한곳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생긴 사도들도 조금씩 집결하고 있었다.
강력한 령들과 강시들까지.
그 숫자. 어림잡아 5만.
반면 태양길드는 1만 4천 정도가 남았다. 더 많은 초보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흉비쉬의 의식에 침투한 무영은 내심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출 수만 있다면······.
“좋다. 우리도 합류한다.”
이렇게 된 이상 진흙탕 싸움뿐이었다.
*
<제한시간이 541시간 남았습니다.>
<생존인원 – 385,598>
<제거대상의 순위를 나타냅니다.>
<1순위 제거대상(15,000점) - 히아신스>
<2순위 제거대상(10,000점) - 바하무드>
<3순위 제거대상(5,000점) - 오오츠키 유카>
<4순위 제거대상(3,000점) - 무영>
······.
<5순위 이내의 제거대상들은 그 위치가 사도들에게 표시됩니다. 아울러 령들의 공격을 더욱 거세게 받습니다. 사망 시 그 영혼마저 천마에게 귀속됩니다.>
<‘천마’가 제안합니다. 사도가 되시겠습니까?>
<수락한다면 ‘천마검(S)’을 수여받을 수 있습니다.>
무율진이 제거대상에서 사라졌다.
대신 무영의 순위가 올랐다.
또한, 천마는 무영에게 S랭크의 무기까지 걸었다.
피식 웃고 말았다.
히아신스를 보건대, 천마가 이러한 제안을 하는 건 오로지 무영뿐인 듯했다.
‘가장 믿음이 없는 자. 천마에게 나는 비수고 독이다.’
설령 천마가 진짜 신이라고 할지라도, 무영은 그를 무시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믿으며 허상에 대한 믿음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믿음만을 갈구해야할 천마로선 가장 버거운 상대가 무영이었다.
물론 구미는 당긴다.
S랭크의 천마검. 거기다가 천마의 축복까지 받으면 무영은 당장 가속을 사용하지 않고도 10강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저걸 믿는다?
놈은 언급하지 않은 게 있다.
‘아수라.’
엄연히 따지면 무영은 이미 아수라의 사도다.
무영이 천마의 사도가 되는 순간, 아수라는 분노할 것이다.
두 신의 사도가 될 순 없는 법.
그 영향으로부터 천마는 무영을 보호할 수 없다.
딱히 이득도 아니다. 차라리 믿음을 진창까지 끌어내려 보상을 얻는 게 낫다.
“무, 무영님. 깃발 500개를 완성했습니다. 헤헤.”
얼굴이 붕어처럼 변한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얼마나 잔악하게 맞았는지 오스카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물론 한시적인 것이겠지만, 전시의 상황에서 말만 잘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무영은 고문에도 일가견이 있다.
죽지 않게끔, 오로지 고통만을 느끼게끔.
단지 고문을 싫어할 뿐이지, 하려고자 한다면 세상 누구보다 잔인하게 할 수 있었다.
“깃발을 투기장 꼭대기에 꽂아라.”
“넵! 무영님의 하늘과 같은 은혜에 힘입어 이 오스카, 반드시 모든 깃발을 투기장 끝에 펼쳐 우리의 기강을 적들에게······.”
“사족이 길군.”
“꽂고 오겠습니다!”
무영이 주먹을 한 차례 털어내자 오스카가 질색하며 물러났다.
장황하다고 해야하나. 하여간 오스카는 색깔이 강했다. 이 정도로 천성마저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멀린에게서 도망친 것이겠지만.
이윽고 무영은 시선을 돌렸다.
태양길드의 표식이 그려진 500개의 커다란 깃발이 투기장 구석에 널려있었다.
전부 초보자들이 만든 것이다.
이후 투기장 곳곳에 세우고 주변에 대놓고 보이도록 하였다.
이미 적들은 투기장에 태양길드가 있다는 걸 안다.
굳이 이처럼 광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이 아닌 다른 이들은?
모이지 못하고 흩어진 자들이 합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태양길드의 표식을 보면 어쨌든 누군가는 올 터.
‘시간이 없다.’
다만, 시간의 문제다.
적들은 모이고 있었다.
흉비쉬를 통해 본 하늘도서관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최대한 지연시킨다고 하더라도 240시간 이내에 쳐들어올 것이다.
반면 태양길드의 사기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부터 계속.
다시금 바람을 바꾸려면, 이번만큼은 천운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무영의 생각은 다행스럽게도 적중했다.
“히아신스! 아니, 이제 길드마스터라고 해야 하나?”
“바하무드님!”
히아신스가 반갑게 웃으며 상대를 맞이했다.
휘광길드!
그곳의 길드마스터 바하무드의 등장이었다.
그가 끌고 온 오천 명은 모두 휘광길드 소속이었다.
거의 절반은 당한 셈.
“소식은 들었다. 참 안타깝게 되었어. 놈은 나도 꽤 좋아했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슬퍼하는 건 이 시련이 끝난 뒤에 하기로 했어요.”
“화초가 난초가 되었구나!”
바하무드가 크게 기꺼워하였다.
그는 키만 2m에 이르는 거구로,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듯 전신이 근육질이었다.
하지만 전신에 모든 털이란 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
“그리고······ 네가 무영이란 놈인가 보군.”
바하무드가 시선을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초장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강렬한 투지와 기운을 내보내며 무영을 압박했다.
정제된 무형(無形)의 기운을 쏘아내는데, 무영도 놀랄 만큼 제법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꿈쩍도 안했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라 바하무드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자 바하무드가 되려 놀랐다.
‘받아치는 게 아니라 흘려? 내 기운을?’
차라리 받아쳤다면 이처럼 놀라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아예 흘려냈다. 한 마디로 자신의 기운에 동화됐다는 거다.
사람의 기운은 모두가 천차만별이다. 오천 명이 있으면 오천 개의 기운이 있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니 결코 기운이 같을 수 없다.
헌데 상대와 같은 기운, 기세로 임할 수 있다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과연. 태양길드를 휘젓는 돌개바람이 있다고 했지. 이제 보니 태풍이었군.’
바하무드는 기운을 거둬들였다.
“목숨은 잘 간직하고 있어라. 너와의 싸움이 무척 고대되는구나!”
흉악스러운 말을 남기곤 그가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천 명의 인원도 함께 말이다.
‘김태환.’
개중에는 김태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앞쪽에 있는 걸 보면 태양길드와 교류하며 공로를 인정받은 모양이었다.
김태환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무영은 눈빛으로 답했다.
“무영님. 개의치 마세요. 강자를 만났을 때 바하무드님은 항상 저렇답니다. 저 정도면 정말 최상급 표현이에요.”
히아신스가 말했다.
“개의치 않는다.”
“말은 험하게 해도 바하무드님은 착해요. 알렉산드로님도 인정하셨을 정도로요. 알렉산드로님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인 길드마스터가 바하무드님이었으니까요.”
알렉산드로는 적이 많다.
그를 좋게 보는 집단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바하무드만은 그런 알렉산드로를 인정하고 다가왔다.
그래. 바하무드······.
그는 그런 성격이다.
무영도 알고 있다.
회귀 전, 그를 죽인 게 무영이니 모를 수가 있겠는가.
단지 바하무드를 함정에 빠트리고 살수림에 의뢰를 넣은 게 알렉산드로였으니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적지 않은 생존자들이 투기장으로 모였다.
그렇게 모으고 모은 숫자가 3만.
초보자들은 숫자에서 뺐다. 초보자의 숫자만 5만에 달하지만 그들은 후방지원이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다.
“사령세가가 쳐들어왔습니다! 추, 추정 숫자 7만!”
7만?
예상보다 많다.
무영은 이맛살을 구겼다.
그리고 투기장의 꼭대기에 올랐다.
“무율진! 적들 중에 무율세가가 있습니다! 이, 이럴 수가!”
“뭐? 무율진?”
“무율세가 전체가 사도가 됐다고? 이런 미친!”
난리가 났다.
7만. 어쩌면 그보다 많은 적들이 투기장을 에워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에······ 무율진이 있었다. 무율세가의 가주.
오대세가 중 한곳이 투항했다는 건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스릉!
무영은 비탄을 뽑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다.
‘타칸······.’
무율진. 사령세가. 이내 눈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무영의 망막에 각인 된 하나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타칸. 배승민을 탈출시키고, 결국 세뇌를 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나타났으니 무영도 당하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죽이고자 한다면, 죽일 것이다.
무율진은 느긋했다.
이 싸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세가의 다른 이들은 불안함을 표했지만, 무율진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상대는 태양길드입니다. 거기다가 휘광길드가 힘을 합쳤다면 그 저력은······.”
“맞습니다. 숫자가 많다고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천마를 따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쯧쯧.
무율진은 혀를 찼다.
저 무지몽매한 녀석들.
물론 이해는 한다.
허나 여기까지 와놓고 불안함을 토로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래도 가주로서, 그들을 반강제로 끌고 온 장본인으로서 설명할 필요는 있었다.
“들어라. 너희는 알렉산드로가 제거대상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냥 행방불명이었던 게?”
“멍청하긴. 제거대상에 나타나지 않은 건 놈이 이미 천마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
정적이 흘렀다.
놀랐으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사도라면 제거대상 목록에 뜨지 않는다.
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모두의 반응을 본 무율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알렉산드로는 진즉에 태양길드를 버렸던 거다! 천마신교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벌인 일이겠지. 나 또한 그리 보았다.”
허나 알렉산드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었다.
천마신교에 의해 직접 단죄되었다.
‘멍청한 놈.’
처신을 잘못해서라고 보았다.
알렉산드로는 욕심이 많은 놈이니 분명히 화를 불렀겠지.
어차피 무율세가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검골형제를 잃고, 고대의 정령마저 잃었다.
그를 만회하기 위해선 승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생각은 시련이 끝난 뒤에 해도 좋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투기장 안에 모여 있는 놈들은 다 죽을 거란 거다.”
쿵! 쿵!
타칸이 검을 들었다.
곧 검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지며 주변을 휩쓸자, 령들이 가장 먼저 투기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 죽여라.”
무율진이 서슬퍼렇게 웃었다.
이 싸움, 질 수가 없다.
< 37. 악령군주(4) > 끝
ⓒ 온후#
< 37. 악령군주(完) >
가장 먼저 온갖 령들이 투기장을 넘었다.
무영은 전선에 뛰어들어 몸소 적들을 막았다.
절대자의 별이 빛나며 주변을 감싸고, 닥치는 대로 ‘적’이라 규정된 모든 걸 먹어치웠다.
하지만······ 무영의 진면목은 대규모 전투에서 나온다.
수많은 이들이 부딪히는 전장!
그곳이야말로 네크로맨서가 가장 파격적이게 날뛸 수 있는 공간이다.
하물며 데스로드는 네크로맨서의 상위호환 클래스!
‘죽음의 예술.’
무영은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진 어느 정도 절제하며 일부러 모든 걸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전장은 앞으로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길목이다.
<758구의 시체가 언데드화 되었습니다.>
<무작위 시체를 선택해 예술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예술점수 51점!>
상관없다.
전장에서까지 예술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데스로드와 무영의 견해가 다르다.
데스로드는 모든 죽음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려 하니까.
하지만 결론은 같다.
승리하는 것!
“어, 언데드가 저렇게 많이?”
“리치도 한 번에 저 정도 시체를 일으키진 못한다고!”
“설마 무영 총사령관님?”
웬만한 리치도 700구가 넘는 시체를 한 번에 언데드로 만들지 못한다.
죽음의 예술 스킬이 A랭크가 되며 한 발자국 더 도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무영에게 박혔다.
무영이 한 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시체들이 되살아나 적들의 살점을 씹었다.
시체술사에게는 불가능하다. 그 외에 시체를 다루는 직종은 많지만 언데드로 되살려내는 클래스는 거의 없었다. 하물며 저 숫자라니······.
기적.
어쩌면 무영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태양길드의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꺾었다.
뿐만 인가.
쿠와아아아아앙!!
불로 이루어진 용이 운다.
수십 미터의 크기로 커진 불의 용이 무영의 주변을 돌며 령들을 집어삼켰다.
불의 용. 태양길드의 신수(神獸)!
바로 저거다. 저 모습 하나가 모두에게 강한 신뢰를 줬다.
언데드가 음이라면 저 용은 양이다. 음과 양 모두를 다룰 수 있으며 그 모습은 태양신의 헌신, 혹은 사자와도 같았다.
‘태양신은 인간에게 다가가고자 자신의 불꽃을 억제했다.’
태양길드의 길드원이라면 모두가 태양신에 관련된 문구를 안다.
개중에는 이러한 문구도 있었다.
태양신은 자신이 가진 양의 힘이 너무 강해 인간들이 타죽자, 그를 슬퍼하며 음의 힘을 배치했다고.
즉, 달을 만들었다.
어디까지나 태양길드와 태양신에 초점을 둔 것이니 이러한 창세신화도 나온 것일 테지만 지금 무영의 모습은 그의 화신이나 사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장은 그러한 믿음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므로.
천마가 믿음을 갈구한다면, 무영은 믿음을 만들어냈다.
“태양신의 수호가 우리와 함께하신다!”
“태양의 용이시여!”
쿠와아아아앙!
그들에게 호응하듯 용이 더욱 날뛰었다.
동시에 무영의 영향력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제거대상의 순위가 격상했습니다.>
<4위(3,000) -> 2위(10,000)>
<천마가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거대상을 죽이면 두 배에 달하는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가 되시겠습니까?>
적용되는 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갔다.
현상금에 금액이 더해지듯이.
거기에 2배를 준다고 한다.
뻔한 수작질.
무영은 무시했다.
저딴 되도 않는 발림에 넘어간다면 자존심이 상한다.
더욱 날뛰었다. 오로지 검에 살(殺)만을 담았다.
“끄억!”
“무율세가 이 개새끼들아!”
령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도들? 사도들 중에선 정말로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무율세가다.
무율진이 가주로 있는 그곳.
뒤섞인 공포를 만들어내고, 아름과 요람의 정령을 다시 붙였으며, 검골삼형제로 말미암아 세계수를 얻고자 했고, 또한 아타락시아로 무영의 암살을 명했다.
결국 뒤섞인 공포는 배승민이, 나머지도 다 무영이 손에 넣었다.
어찌 보면 무율진은 참으로 무영에게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아낌없이 주는.
뚜벅!
무영은 발길을 돌렸다.
무율진. 그와는 처음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검일, 검이, 검삼.”
법보를 꺼내 모두 불렀다.
<소드데빌, 검일과의 레벨 차이가 100이하입니다.>
<죽음의 예술 스킬이 A랭크로 격상하며 무작위 무구 등을 가져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100명분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죽음.
그런 건 여기에 넘친다.
100명이 아니라 1,000명분의 죽음도 줄 수 있었다.
곧이어 검일과 검이, 검삼이 나란히 소환되었다.
지이잉-
그들은 공명했고 더 나아가 무율진을 바라봤다.
무율진도 무언가에 끌리듯 무영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크게 놀랐다. 천하의 그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골······!”
“무율진을 죽여라.”
미친 듯이 날뛰던 무율세가의 사람들도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검골 삼형제는 무율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자들이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힘, 뭐 하나 사람을 움직이기에 부족한 게 없으니.
그런 상징이 적으로 돌아섰다.
이미 가주의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점에서 검골들의 배신은 뼈아프게 다가왔다.
‘배신은 아니지만.’
저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란 소리다.
“노오옴!”
그때 지근거리에서 바하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하무드가 있는 곳. 그곳엔 타칸도 있었다.
검은 연기가 휘몰아치는 검을 휘두르며 강하게 바하무드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천마의 축복. 그리고 저 검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
두 가지가 더해지자 바하무드마저 압박할 수준의 강자로 변한 듯싶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혼이 보이지 않는다.’
본래라면 영혼착취를 통해 타칸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헌데 머리 위에 영혼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혼 자체를 저당 잡힌 채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모든 령들의 중심에 타칸이 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녀석이다.
어느새 령들의 우두머리처럼 군림하게 된 모양이었다.
‘죽여야겠군.’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전장의 영향일까?
아니면 간만에 타칸을 재회해서일까.
무영은 비탄을 한 차례 털어내며, 타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배승민.
아크리치가 된 이후 그는 무영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하여 무영의 힘과 그 근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었다.
‘빨리 이 벽을 뚫어야한다.’
대도시는 외부에서 봤을 때 붉은 벽에 뒤덮여 있었다.
배승민은 그 벽의 일부분을 뚫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힘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지식은 뒤섞인 공포의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자 무영을 비롯한 다른 언데드의 기운들도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타칸의 생사도 확인하였다.
‘주인님. 타칸을 죽이면 안 됩니다.’
배승민의 손이 붉은 벽을 반쯤 뚫었다.
그에 비례하듯 배승민의 손도 망가졌다가 재생하길 반복했다.
벌써 수십 개의 마법을 뚫었지만, 아직도 절반이 남았다.
허나 배승민은 다급했다.
월하.
타칸의 기운을 확인한 즉시 놈의 의도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타칸은 미끼입니다!’
월하는 아수라를 안다.
아수라의 사도가 무슨 힘을 다루는 지도 안다.
왜냐하면, 월하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탓이다.
월하는 뱀이다. 마후라가의 진정한 분신이었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고대의 정령인 뒤섞인 공포의 지식을 훑어보니 그와 관련된 사항이 나왔다.
본래는 금지된 일.
신의 외유는 철저하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마후라가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
신을 만드는 것!
온갖 정령과 요정을 이용해 실험을 하였다.
그때 뒤섞인 공포도 후보군으로 올랐다. 그러나 뒤섞인 공포는 세계수를 흡수한 뒤 반신은 되었으나 진정한 신이 되지 못해 버림받았다.
당시에는 실패했고, 다시금 절반이 아닌 진정한 신을 만들고자 도전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타칸은 미끼다.
‘주인님께서 타칸을 죽이면 그가 깨어난다. 지금 주인님의 몸으로 그를 감당할 순 없어!’
그.
정확한 이름은 배승민도 모른다.
하지만, 타칸과 마찬가지로 ‘아수라도에 갇혀있는 왕’이라는 건 안다.
물론 왕이긴 하나 타칸과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 존재는 마치 신과 같음이라.
결국 무영은 월하처럼 신체를 빼앗기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월하의 속임수고 미끼다. 타칸과 무영이 반드시 부딪히게끔 만들어서 아수라에게 타격을 주는 게 그의 속셈이었다.
어쩌면 아수라도의 왕을 소환해 자신이 부리려는 것일 수도 있고.
지이이이익!
배승민이 마침내 벽을 뚫었다.
동시에 그림자와 동화 된 배승민이 바닥을 타고 이동하며 순식간에 무영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아······.”
전장.
피냄새가 진동하는 장소.
그곳의 중심에, 무영이 있었다.
무영의 검이 타칸의 심장부위를 꿰뚫고 있었다.
바하무드와 합공한 결과 타칸의 빈틈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심장은 타칸의 정수가 모인 부위.
결이 있는 장소였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러자 타칸이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검은 기류가 타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며 무영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물러나십시오!”
배승민이 다급히 무영에게 다가갔다.
타칸에게 연결 된 것을 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투우웅!
하지만 검은장막이 생성되어, 배승민을 튕겨냈다.
장막은 순식간에 무영을 삼키고선 그대로 울럭이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그 모습은, 거대한 검은색 심장과도 같았다.
타칸은 강했다. 놀랍도록 강해졌다.
바하무드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무영 홀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한 능력치적인 측면 외에도, 타칸의 기량자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자는 무영이었다.
‘결’을 보고 꿰뚫었다.
세상 어느 것도 결을 뚫리고서 멀쩡할 순 없다.
하지만······.
“나를 깨웠느냐?”
어두운 세상이었다.
그 중심에, 무영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왕좌에 앉아있었다.
왕좌는 낡고 녹슬어 있었다. 그 뒤로는 하늘까지 솟은 얇은 탑이 있었는데 역시나 곳곳에 균열이 가 있었다.
“너는 누구지?”
“나를 모르고 깨웠단 말인가?”
그가 웃었다. 무영이 절대로 지을 수 없는 표정을 그는 자연스럽게 자아냈다.
“이곳은 아수라도이니라. 나는 아수라의 부탁으로 아주 오랜시간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지.”
아수라. 그를 옆집 친구처럼 말하는 이자가 누구인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아수라도라면 무영이 깨달은 여섯 가지 세상 중 한 곳이다.
‘멀더던이 말한 적이 있었지. 봉인 된 존재가 있다고.’
그리고 그 존재가 무영과 똑같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흘려 들었지만, 설마 그 존재와 마주하게 될 줄이야.
타칸을 죽인 영향일까?
“긴 시간 나는 이곳에 있었다. 기억도 안 날 정도의······ 억 겹의 시간을 말이다.”
그는 지쳤다.
아수라도는 굉장히 무료한 장소였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넌······ 누구냐.”
무영은 오한을 느꼈다.
전신이 떨렸다. 감정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무영조차,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이 자는 이미 선을 벗어난 존재라고!
하지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여 물었다.
상대를 알면 조금이라도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가 다시금 웃었다.
“나는 루키페르. 이곳에선 악령군주로 활동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나를 루시퍼라고 부르더군.”
타락한 천사 루시퍼.
무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마계엔, 이 세상엔 천사가 없다.
있다면 오로지 악마뿐.
헌데 천사였던 자가 나타났다.
천천히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씩 무영에게 다가왔다.
“이제 네 몸을 내게 다오.”
< 37. 악령군주(完) > 끝
ⓒ 온후#
< 38. 권능 포식자(1) >
무영은 눈을 떴다.
이어 세상을 바라봤다.
거친 바람과 공기의 입자가 피부로 와 닿았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청량함.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마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얼마 만에 맡은 향기인가.
얼마 만에 느끼는 체온이란 말인가.
손을 뻗자 감각이 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무료하게 보내다보니 잊어버린 것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완전하군.’
하지만 이 육체는 너무나도 형편이 없었다.
자신의 본신에 비하면 비교조차 창피할 수준이다.
무영······ 아니, 루키페르는 쯧 혀를 찼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격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지만 자신의 신위가 어디 간 건 아니니까.
루키페르가 시선을 옮겼다.
반쯤 분쇄된 뼈다귀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놈 역시 눈에 익다.
“타칸. 일어나라.”
스아아아악!
손에서 불투명한 기운이 뻗쳐나갔다.
이윽고 타칸을 감싸자, 뼈가 재구성되며 이내 완전한 모습을 감췄다.
‘기분 나쁜 기운이 섞여있군.’
하지만 천마의 보랏빛 기운이 타칸에게 섞여있었다.
정확히는 타칸이 쥔 검······ 저기에 몰려 있다.
루키페르가 타칸의 검을 빼앗았다.
부르르르르르르!
보랏빛 기운. 천마의 힘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마치 발악이라도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힘 싸움에서 루키페르가 압승한 것이다.
투웅!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루키페르가 검을 쓰레기마냥 바닥에 버렸다.
그러자 타칸이 정신을 차렸다.
“여, 여긴? 내가 왜 전장에 있는 것이냐, 무영?”
타칸이 눈을 끔뻑이며 루키페르를 바라봤다.
루키페르도 타칸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도 무영으로 보이느냐?”
“그럼 네가 무영이 아니면······.”
이내 이상함을 느낀 타칸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곤 한 발자국 물러섰다.
고작 한 발자국이지만, 그 안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저돌적이고 돌진밖에 모르던 타칸이 망설임을 갖게 된 것이다.
“루키페르님?”
“이제야 날 알아보는군.”
“하지만 그 몸은······.”
“놈의 영혼은 내가 먹어치웠다. 인간치곤 제법 양질의 영혼이더군.”
뚝!
타칸이 멈췄다.
루키페르는 아수라도의 진정한 군주다.
타칸과 또 다른 왕이 따르는 지도자. 하지만 아수라도를 벗어난 타칸은 독립적인 개체로서 움직이길 바랐다.
헌데 다시금 루키페르에게 얽히고 만 것이다.
타칸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무영에겐 배울 게 많았다.
반면 루키페르에겐 배울 수가 없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강한 존재였고 격의 차가 너무 많이 나는 탓이다. 태어나서부터 강하다는데 무얼 어떻게 배우겠는가.
‘혼이 먹혔다면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루키페르가 실수를 할 리는 없었다.
혼이 먹혔다면, 이는 소멸을 의미했다.
앞으로는 절대 무영을 못 본다는 의미다.
묘한 기분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도 짧고, 좋은 기억도 딱히 없건만.
“너의 오랜 친우가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더구나.”
“칼라 말씀입니까? 놈은 제 친구가 아닙니다.”
칼라는 아수라도에서 타칸과 라이벌 구도에 있던 왕이다.
타칸이 악령 포식자라면, 칼라는 악령 구도자다. 서로 정 반대의 성향. 스스로를 악령의 ‘왕’이 칭하며 경쟁을 마다치 않았다.
“네가 나왔듯이 칼라도 나와야 좋은 구도가 완성되지 않겠더냐? 마침 이 몸은 쓸만한 걸 익히고 있구나.”
타칸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빌려 현세에 나왔다.
루키페르는 무영의 영혼을 먹고 몸을 빼앗았다.
칼라도 마찬가지다. 빙의할 몸이 필요하다.
루키페르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시체에서 모든 피가 빠져나와 모여들었다.
곧 주변에 둥그런 마법진이 형성되고 피들이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피가 모이자, 건장한 남성의 모습으로 갖춰졌다.
핏빛 망토를 두르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뱀파이어였다.
곧이어 남자가 청광색의 눈을 떴다.
그리곤 루시페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칼라가 악령군주를 알현합니다.”
“네 몸으로 구성된 건 진조 뱀파이어의 모방품이다. 본래 너의 종족이 그러했으니 움직이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영광입니다.”
칼라가 슬쩍 고개를 들어 타칸을 바라봤다.
타칸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나타난 탓이다.
하여간 루키페르가 나타난 이상 타칸은 더 자유롭지 못하다.
타칸은 그를 수행하며 그가 바라는 것을 행해야 했다.
잠시 후 칼라가 물었다.
“하온데 군주시여.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우선······ 주제도 모르고 감히 신의 흉내를 내는 녀석을 끌어내려야겠지.”
루키페르는 엄밀히 말해서 신이 아니다.
신이 될 뻔한 존재였지.
그렇기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은 영 보기가 싫다.
‘감히 나 악령군주를 움직이려 해?’
더불어서 이 모든 게 누군가의 합작품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았다.
타칸에게 덫을 심어, 무영과 싸우도록 한 뒤 자신이 나오게 누군가가 조작했다는 걸 모를 루키페르가 아니었기에.
“그럼 주변의 인간들부터 다 죽이시겠습니까?”
루키페르는 나약한 인간을 싫어한다.
주변에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의 루키페르로 보자면, 주변의 인간은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니. 그보다 더 기분 나쁜 기운이 넘실대는군. 놈들부터 죽이겠다.”
칼라가 살짝 놀랐다.
평소라면 그냥 쓸어버리라고 명했을진대.
이내 루키페르가 천마의 사도들에게 눈을 돌렸다.
인간도 인간이지만, 저 짝퉁 신의 힘을 가진 자들이 더욱 거슬린다.
의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우선순위가 밀린 것이라고 칼라는 해석했다.
루키페르가 비탄을 뽑았다.
지이이잉.
비탄이 울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었다.
무영이 아님을 알아본 걸까?
미물 주제에 주인을 가린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피식 웃으며 루키페르가 한 차례 검을 휘둘렀다.
스와아아아아아아아!
거친 풍압. 검의 궤도가 그리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검풍이 일었다.
그 경로에 있던 사도들의 머리와 허리가 양분되었다.
족히 삼백 명은 되는 인원이 단 한 번의 손짓에 생을 달리했다.
모두가 넋을 잃었다. 그러자 루키페르의 몸 주변으로 거대한 얼음입자가 떠올랐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입자가 순식간에 날아들어 주변 곳곳에 폭발을 일으켰다. 무영이 사용했던 영점폭발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다.
‘왜 인간의 반쪽짜리 마법을 사용하시는 거지?’
칼라와 타칸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키페르. 악령군주인 그는 반신격에 이르는 존재다.
당연히 신위와 권능을 사용할 줄 안다.
그러한 것들은 혼에 깃들기에, 신체가 바뀐다고 사용 못하는 건 아니다.
굳이 인간의 조잡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루키페르는 힘을 숨기거나 하지도 않는다. 항상 최대의 공격으로 적을 눌러버린다. 그를 생각하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반쪽짜리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수천에 달하는 군세를 죽였다.
“이대로 군주께서 싸우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지.”
칼라가 먼저 일어났다.
도전적으로 타칸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동시에 수만의 박쥐로 분해되어 전장을 휩쓸었다.
타칸은 멍하니 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싱숭맹숭한 기분을 어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현세로 온 뒤 처음 만난 인연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만······.
타칸이 떨어진 검을 쥐었다.
‘나는 그저 따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무영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한 순간이었다.
전황이 뒤집히고 적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는 건.
단 한 명의 남자가 모든 걸 바꿨다.
무영!
저 모습. 정말 태양신의 사자란 말인가?
모두가 열광했다. 모두가 무영의 이름을 불렀다.
“태양신이시여!”
“태양신께서 우리를 굽어보신다!”
그의 힘은 평범한 이치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손짓 한 번에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데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하지만 본래의 힘과는 살짝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태양길드의 사람들에겐 상관이 없었다.
지금 무영은 그들에게 태양신, 그 자체였으므로.
결국 사령세가와 무율세가, 천마의 사도들은 철저하게 파멸했다.
중간에 흉비쉬가 난을 일으켜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
“인간들이 주제를 모르고! 감히 태양신 따위와 루키페르님을 비교하다니요. 명하신다면 저들 전원의 피를 빼앗고 절규하게 만들겠습니다.”
칼라가 격노했다.
루키페르는 신이 되려다가 실패한 존재다.
덕분에 타락했지만, 그래서 신에 대한 증오가 남다르다.
칼라는 루키페르가 응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되었다. 현세로 나왔는데 한 번쯤은 아량이란 걸 베풀도록 하지.”
아량?
루키페르와 가장 안 맞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수라도의 악령군주는 폭군이다. 타협이 없다.
그럴진대, 아량이라니!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칠흑의 로브를 뒤집어 쓴 아크리치다.
놈은 대뜸 다가오더니, 넙죽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 다행입니다! 무사하셨군요!”
“너는 누구냐?”
“접니다. 주인님께서 창조하시고 새 삶을 부여한 배승민입니다.”
“아아······ 배승민. 무슨 일이지?”
루키페르가 말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말투로.
도리어 말투에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제가 계속해서 따르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배승민의 태도가 이상했다.
저만한 아크리치라면 몸의 주인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승민은 대뜸 허리부터 굽혔다.
“군주시여. 놈의 의도가 수상합니다.”
칼라가 반대했다.
루키페르가 고개를 저었다.
“칼라. 어차피 이 몸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녀석에게서 고대정령의 향이 매우 강하게 난다. 이 냄새라면, 한때 반신격의 존재였던 뒤섞인 공포이겠군.”
같은 반신으로서의 친근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루키페르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곧장 신의 흉내를 내는 놈을 보러 갈 것이다. 따라가겠느냐?”
“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배승민이 크게 읊었다.
이윽고 루키페르가 몸을 돌렸다.
그가 공중에 뜬 하늘도서관을 바라봤다.
저곳에 자신을 꺼낸 누군가가 있다.
필시 의도가 있을 터. 그 자체가 매우 같잖다.
‘건드리지 말아야할 것을 건드린 자는 파멸하는 법이지.’
루키페르가 움직였다.
배승민은 그가 나타나는 걸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를 두었다.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님이 아니다.’
지켜본 결과 알 수 있었다.
아예 다른 존재다.
경악할 격의 소유자.
진정으로 군림하는 자!
‘이상하군.’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알 듯 모를 듯 무영의 존재가 그에게서 비춰졌다.
그래서 확인해보았다.
배승민이 직접 나서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아예 다른 존재라면 배승민을 배척할 것이고, 만약 배승민의 생각이 맞는다면 전혀 다른 반응이 튀어나올 것이었다.
‘이제 알겠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섞였다.
섞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멸한 줄 알았던 무영의 혼이 조금씩 루키페르의 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째서 혼이 남아있는 것인지는 배승민도 모른다.
하지만 무영은 한 번 돌아왔다. 정확히 두 번 소멸시켜야 아예 사라지는 셈이다. 루키페르도, 배승민도,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
덕분에 무영의 혼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은밀하게.
루키페르 스스로도 모르게끔 말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조금씩 혼의 영역을 침범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살수의 표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경지에 이른 살수가 암살대상을 노리는 행동 그 자체였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혹은 어떠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루키페르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조차 못하고 무영에게 흡수될 터였다.
< 38. 권능 포식자(1) > 끝
ⓒ 온후#
< 38. 권능 포식자(2) >
하늘도서관으로 이어진 거대한 벽이 있었다.
이 역시 천마의 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다.
천마의 허락을 받거나, 20개의 정수를 모아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조건’이 걸렸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누군가의 허락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존재하며 조건 따위가 없어도 모든 걸 이룩할 수 있는 신위를 지녔다.
“얄팍한 수로군.”
신을 사칭한 녀석이 만든 것치곤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같잖다. 루키페르가 보기엔 모든 게 부실하고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가만히 손을 댔다.
루키페르가 한 것이라곤 그게 전부다.
그러자 하늘까지 치솟은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릉!
허나 사라지진 않았다. 도리어 천마의 힘이 더해졌다.
“반 푼이 따위가!”
즈아아아아아아아악!
양 손을 벽에 대고 그대로 찢어발겼다.
조금씩 벽이 갈라지더니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루키페르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벽을 없애는 게 아니라 틈을 만드는 게 고작이라니.
본신이었다면 이런 벽 따위 단번에 파괴했으리라.
무영의 몸에 자신의 신위가 전부 깃들긴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이 정도가 한계인 듯했다.
‘어디까지 발악을 하는지 보자꾸나.’
하지만 이 정도도 충분하다.
감히 되도 못한 반쪽짜리가 자신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불어서 타칸과 무영에게 수작을 부린 녀석. 그 녀석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루키페르가 슬쩍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장소지만, 특정한 지점에서 마법의 낌새가 느껴졌다.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놈이 도망갈 장소 따윈 처음부터 없었으니.
이어 루키페르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가자, 타칸과 칼라, 그리고 배승민이 뒤를 따랐다.
월하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키페르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예상외였다.
“루키페르······ 루시퍼가 안에 있었단 말인가!”
안에 누군가가 봉인되어 있는 낌새는 느꼈다. 아주 강력한 존재. 깨어나거든 아수라의 사도인 무영을 집어삼키리라 보았다.
하지만 그게 루시퍼일 줄은 월하도, 마후라가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고대의 괴물, 정령 따위가 튀어나오리라 여겼건만.
‘아수라가 어째서 사도를 들였을까. 그리고 어째서 타락한 천사가 놈의 안에 숨어있었던 것인가.’
팔부신룡 중 아수라와 사이가 좋은 이는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런 아수라가, 사도를 들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민했다.
그 괴팍하고 악랄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 사도를 들인 건 초유의 사태였다.
하물며 타락한 천사의 존재도 의구심이 들었다.
천사는 마계에, 이 세계에 결코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
마신들을 봉인한 레메게톤은 일종의 ‘문’이다. 지구와 마계, 정령계, 기타 온갖 세계가 이어지는 구실을 하는 문.
하지만 천계는 배제되었다. 72마신이 나오며 레메게톤 안의 모든 천사를 죽이고 천계와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그래서 이곳엔 천사가 없다.
아니, 없어야 정상이었다.
마신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리 없으므로.
마계에 만약 천사가 있다면, 그것이 ‘촉매’가 될 수도 있었다. 천계와의 문을 잇는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설혹 타락한 존재일지라도 말이다.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마신들은 어떻게든 루시퍼를 말살하려 들 터였다.
루시퍼.
창세의 악마!
비록 72마신에 포함되어 있진 않고, 그 힘도 타락하며 많이 약해졌다지만, 그만한 존재라면 충분히 문을 열 수 있다.
천계의 문이 열리면 다시금 창세기 전쟁이 시작되리라.
‘천계와의 문이 열리거든 결국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겠지.’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차원이 재정립되고 합쳐지는 건 빅뱅이 버금가는 일이었다.
‘아수라······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어쨌거나 루키페르가 나타났다면 그가 노리는 건 본체일 것이다. 더 나아가 신격화 중인 천마마저 없애버리려 들 터.
물론 방비가 안 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놈, 루키페르를 조종하고 흡수할 안배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월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마후라가다.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여, 타락한 천사 따위에게 당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지독한 냄새였다.
천마. 이놈은 정말 악취를 풀풀 풍기는 녀석이다.
대체 모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악취를 풍긴단 말인가.
“무영! 무영이다!”
“저놈이 그 제거대상 1순위?”
“태양길드의 대리를 제치고 1순위에 오른 그 녀석이란 말이지.”
안에는 강한 사도들이 있었다.
천마의 힘을 갈구하며 들어온 이들. 비록 신앙이 크진 않지만 그들은 천마의 축복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다.
<현상금 : 천마가 무영에게 직접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무영의 신체 부위 하나당 50,000점을 드립니다.>
있을 수 없이 파격적이었다.
천마가 주는 점수로 무구를 사거나 축복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축복은 마약과 같았다. 한 번 겪으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부위당 오만점이라면, 손과 발, 머리와 몸통을 고려해서 최소 30만점이다.
사도들이 눈독을 들이며 순식간에 루키페르를 둘러쌌다.
동시에 맡아지는 악취가, 루키페르의 미간을 좁히게 만들었다.
“그 따위 냄새를 풍기며 내 앞에 서지 마라.”
하지만 루키페르에겐 모두가 같잖았다. 고작해야 인간들. 반쪽짜리 축복을 받는다고 쓰레기가 재활용되진 않는다.
촤아악!
루키페르는 비탄을 휘둘렀다.
풍압만으로도 절반이 스러졌다.
쿠롸아아아앙!
거대하기 짝이 없는 용의 화염이 작열했다.
재도 남기지 못한 채 타버렸다.
“괴, 괴물······!”
“끄아악!”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사도들은 현저한 ‘격’의 차이를 느꼈다.
저자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괴물. 그것도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한 명도 남김없이 주변을 정리한 루키페르가 위쪽을 바라봤다.
스아아아아.
망령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 대도시를 지키는 수호령같은 것.
아무래도 천마에게 종속된 듯싶었다.
쯧!
되도 않는 수작질이었다.
시간벌기에 불과했다.
그것도 고작 몇 분.
“재롱은 다 떨었느냐?”
루키페르가 물었다.
하늘도서관 쪽에 있던 모든 이들이 죽었다.
사도들도, 사령세가도, 모두.
이제 월하만 남았다.
루키페르는 본능적으로 월하가 이번 일을 꾸민 배경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놈에게서 엄청날 정도의 악취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월하는 여유로웠다.
“루시퍼.”
“나를 아는 놈이로구나. 그렇다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 터인데?”
“알다마다. 루시퍼가 상대면 나라도 함부로 대할 순 없지.”
“네놈은······.”
루키페르의 눈이 월하에게 닿았다.
마치 분석을 하듯이.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네놈도 가짜였군. 가짜끼리 모여 무슨 수작질을 벌이려는 게냐?”
작당모의도 하필 가짜끼리 하고 있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짜가 아무리 발악해도 진짜는 될 수 없었다.
“루시퍼.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는가?”
“시간벌기라면 집어치워라.”
“이곳은 고대왕의 성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왕의 ‘묘’이지.”
월하가 비파를 들었다.
대도시는 본래 고대왕을 기리는 장소다.
모든 안배가 되어있고, 모든 것의 시작인 지점.
처음으로 ‘왕’이란 수식을 달았던 진정한 왕의 묘!
“묘는 죽음과 봉인을 뜻한다. 너는 이곳에 봉인되어 천마의 양분이 되어줘야겠다.”
스르르.
비파를 튀기자 바람소리가 났다.
동시에 대도시 전체에 바람이 몰아쳤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루키페르가 움직였다.
타칸도, 칼라도, 배승민도 움직였다.
촤악!
월하는 무방비였다.
루키페르의 검이 오른팔을 잘라냈다.
원래는 머리를 자르려 하였으나, 비파의 소리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월하는 비파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스으으으윽.
이윽고, 허공에서 수백, 수천에 달하는 손이 튀어나왔다.
손은 순식간에 루키페르를 붙잡았다.
“감히! 이 따위 것으로 나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보는 게냐!!”
처어억.
루키페르가 그 상태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월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대왕의 성은 반신격에 이른 존재도 가둬둘 수 있는 강력한 봉인구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빌려 신격이 흐트러진 루키페르가 그 봉인구를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전신에서 용의 불이 튀어나와 월하를 공격했다.
월하는 피할 수 없었다. 그대로 전신이 너덜너덜해졌다.
머리가 불타고, 피부가 녹아내렸다.
쿵!
이어 루키페르가 비탄을 바닥에 박았다.
어느덧 조금씩 손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나 루키페르를 이 따위 구속구로 가둬둘 수 있을 거 같으냐!!”
쿠와아아아앙!
하늘도서관이 흔들렸다.
루키페르에게서 튀어나온 기운들이 땅을 갈랐다.
하늘도서관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봉인구에 잡힌 채로 저만한 힘을 낸다.
신이 될 뻔한 존재였다더니 과연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구속구에 의해 이내 루키페르가 검은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게 타락한 천사 루시퍼란 말인가······.”
전신이 타버린 월하가 중얼거렸다.
타락한 천사라고 무시한 걸 철회했다.
만약 놈의 본체와 마주했다고 한다면, 마후라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둠이었다.
짙은 어둠.
루키페르는 분노했다.
감히! 반쪽짜리, 가짜 따위가!
아수라도를 나왔는데 다시금 봉인을 당했다.
어찌 열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반대편이 조명이 비치듯 밝아졌다.
뚜벅!
뚜벅!
누군가가 걸어왔다.
“정말 병신이 따로 없군.”
냉정하기 짝이없는 욕과 함께 등장한 남자.
루키페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며, 자신이 혼을 집어삼킨 놈이다.
“네가 어떻게?”
놈은 바로 무영이었다.
하지만 혼을 소멸시켰는데 어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허상은 아니다. 실제로 무영의 영혼이 느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영은 이미 루키페르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이제는 제거할 수도 없다. 대체 어느 사이에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힘이 있으면 뭐하지? 결국 사용자가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데 말이다. 짜증이 나서 병신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군.”
힘이 있으면서 그 따위로밖에 쓰지 못하냐는 질책이었다.
무영은 처음부터 루키페르의 행동거지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머리가 있다면,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면, 월하의 그 같잖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무영도 타칸이라는 미끼에 낚이긴 했지만 재차 이렇게 방법을 물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루키페르는 욕만 하고 있다.
열불이 터지는 일이다.
“네놈······!”
루키페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놈, 무영의 혼을 다시 소멸시키면, 자신의 혼도 무사하진 못한다.
어떻게, 어느 사이에 파고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천년만년 이곳에 갇혀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주도권을 넘겨라. 반 푼이.”
그것을 무영은 잘 알았다.
허나 여기에 계속해서 갇혀있는 건 무영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루키페르의 혼을 모두 흡수할 때이면 늦는다.
족히 수십년, 어쩌면 백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는 일.
그래서 무영은 협상을 시작했다.
괴팍하고, 독선적이며, 자기밖에 모르는 루키페르를 상대로 말이다.
< 38. 권능 포식자(2) > 끝
ⓒ 온후#
< 38. 권능 포식자(3) >
반 푼이!
루키페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살면서 그는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신이 되고자 도전하고 실패했을 때조차 모두가 그의 힘을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뭐란 말인가.
이곳은 봉인구이자 정신의 세계다.
이곳에 한하여 루키페르는 본신의 힘을 그대로 되찾았다.
당연히 반신격에 오른 자신의 힘을 무영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죽고 싶은 게냐?”
루키페르가 말했다.
허나 무영은 도리어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겁먹은 개가 따로 없군.’
겁을 먹은 개일수록 더 크게 짖는다.
루키페르. 어차피 지키지 못할 말을 왜 굳이 입에 담는지.
이래서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 거다.
태어날 때부터 루키페르는 강자였고 엄청난 신위를 손에 넣었다.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없이 그저 살아왔다. 아무리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대도 100년을 못 산 무영만 못하다.
“계속 버텨 봐라, 반 푼이. 주도권을 넘기지 않겠다면 빼앗아오면 그만이니.”
“나를 상대로 빼앗겠다고? 하!”
가소롭다.
루키페르는 비웃고 말았다.
무영의 혼이 자신의 혼을 침범한 걸 아예 몰랐을 때에나 당했지, 알고 있는 이상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미개한 인간 놈이 반신에 이른 자신의 혼을 어찌 더 침범할 수 있단 말인가.
허언이다. 무영, 놈도 마음이 조급한 게 분명했다.
방대한 혼에 뒤섞여 어차피 조만간 그 형체조차 남지 않으리라.
“알고도 못 막는다면 네놈은 진짜 반 푼이, 머저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영은 다시 어둠 속으로 퇴장했다.
무영은 대살수다.
웡 청린을 죽이고 0번이 된, 최강의 살수.
대상이 암습 사실을 알더라도 성공하고 마는 게 무영이었다.
시간의 차이일 뿐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무영은 네 개의 각기 다른 클래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지녔다.
그만큼 영혼의 그릇이 넓기 때문이다.
클래스. 그와 관련 된 힘은 영혼에 담긴다.
보통 한 가지 클래스를 얻으면 그 영혼은 가득 찬다고 말한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무영은 기준치의 네 배인 것이다.
하물며 성향이 다른 것들을 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계산을 초월하는 방대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인간의 혼이 반신의 혼을 탐한다?
당연히 인간은 버티지 못한다. 스스로 파멸한다.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상식 바깥의 존재.
파멸할 거란 생각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히 인간 따위가!!”
무영은 어둠이었다.
정신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몸을 숨기는 데 도가 텄다.
대체 어떻게?
정신이란, 영혼이란, 본래부터 형체가 없는 것이다.
숨기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놈은 해냈다.
주변에 동화되어 빈틈이 생기면 루키페르의 영혼을 갈취했다.
그 양은 극소량이 불과하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악령의 군주인 나보다 더 혼을 다루는데 익숙하단 말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혼에는 형체가 없지만 기본적인 색깔이 있다.
그 사람의 인생. 굴곡에 따라 색깔도 달라진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게 그 때문이다.
만약 숨긴다면 그것은 혼이 백색인 자일 것이다.
하지만 혼이 백색인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영의 혼은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다. 그것들이 합쳐지면 불투명한 백색이 되었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자기보호색······.’
루키페르는 카멜레온을 떠올렸다.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고자 주변색깔에 동화되도록 진화된 동물.
그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루키페르의 생각은 반쯤 맞았다.
무영은 자신의 인격을, 혼을 지키고자 본능적으로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다른 이들의 상태창 시계를 빼앗으며, 이야기를 보며, 정체성을 지켰다.
반면 무영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색깔이 여러 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대로 백색이 될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했고.
“두렵나?”
“······!”
불현 듯 나타났다.
등 뒤에서.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고개를 돌렸을 때, 무영은 없었다.
루키페르는 어둠 속을 뒤졌다.
역시나 무영은 찾을 수 없었다.
“나와라! 쥐새끼 같은 놈!”
정신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음성에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불안함’이 섞여있었다.
루키페르에게 무영은 미지였다.
여태껏 이런 자는 없었다.
수많은 악령을 다루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미지는 공포다.
루키페르는 지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더욱 몸을 부풀렸다.
부풀린 몸은 표적이 되기 더욱 좋았다.
무한한 악순환.
마지막 희망은 반신격의 혼을 취하다가 자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놈은 전혀 균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져가면 가져가는 대로 흡수했다.
대체 어떤 인간이 반신격의 혼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놈은······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건가?
잡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귀신처럼. 아니, 귀신조차 아니다.
알 수 없는 무언가. 불가해(不可解)의 존재.
인간을 대상으로 이러한 감정을 느끼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다.
“색이 없다. 향기가 없다. 형체가 없다······.”
“나는 너의 망상이 아니다.”
스윽.
다가왔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렸다. 생각을 읽혔다.
알 수 없는 무영의 존재를, 루키페르는 망상으로 치부하려 했다.
상상의 산물이라면 저 모든 게 설명되는 탓이다.
더욱 무서운 건, 무영은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루키페르의 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을 뿐이었다.
이대로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거든 루키페르의 혼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에게 백 년은 긴 시간이지만 루키페르에게 백 년은 찰나와 같다.
그 인식의 차이가 루키페르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무려 100년이 아닌 고작 100년.
인간으로 따지자면 1년 뒤에 죽음을 확정 받은 셈이다.
‘주도권······.’
육체의 주도권만 넘기면 그만인 일이었다.
이후 육체에 정착한 혼은 루키페르의 혼을 갈취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주도권을 넘긴다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무영의 힘은 루키페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루키페르가 빠져나가지 못하면, 무영도 빠져나갈 수 없다.
“네놈에겐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단 말이냐?”
“있고말고. 텅 빈 네 머리와 다르게 내 머리는 많은 생각을 한다.”
모든 언행이 모욕적이다.
무영은 루키페르를 무시하고 있었다.
살면서 이러한 무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지?”
“주도권을 넘기면 알려주마.”
“······ 좋다. 하지만 너 역시 하나를 내놔야 한다.”
“말해봐라.”
“너의 정체! 네 진정한 정체를 알려다오.”
루키페르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그 공포가 미지에 근거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놈의 정체만 알아낼 수 있다면, 이 공포도 가실 것이다.
무영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진실한 정체성이라.
한 가지가 있긴 있었다.
“절대자.”
이만한 정체성과 특징은 또 없다.
동시에 무영의 주변으로 붉은 빛이 들어찼다.
천마의 그것처럼 역하지도 않고, 오히려 신성한 느낌의 빛.
웃기는 말이지만 웃을 수 없었다.
‘별의 선택을 받았다?’
그것도 절대자의 별이 선택했다.
루키페르는 당황했다. 하지만 놈은 절대자와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거짓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합리화일 수도 있다.
절대자의 별이 택한 자이니, 자신의 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더는 이러한 되도 않는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질색이었다.
루키페르가 입술을 꽉 깨물며 패배를 선언했다.
<루키페르가 육체의 주도권을 건넸습니다.>
<권능, ‘혼의 결속’이 생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루키페르가 허락한다면 그의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권능 포식자’를 계승했습니다.>
<권능 포식자는 말 그대로 권능을 포식할 수 있는 힘입니다. 신격을 먹어치워 힘을 기를 수 있는 권리!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진정한 권능의 소유자들은 막강한 힘을 지녔습니다.>
루키페르가 다시금 작아졌다.
혼의 우위에서 자신이 밀리리라곤 생각조차 못한 듯싶었다.
무영의 혼까지 숨기는 신출귀몰함이 그를 질리게 만든 탓이다.
만약 육체적 대결이었다면, 루키페르가 절대 무영에게 패할 리 없었다.
“그럼 나가도록 하지.”
자신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유유자적 움직였다.
무영은 거침이 없었다.
월하.
놈은 제법 대도시에 대해 연구를 한 듯싶다.
고대왕의 성이 천마를 부르기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영은 이 성에 대해 잘 알았다.
무영보다 고대왕의 성을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묘다. 묘지기가 있기 마련이지.’
묘지기는 묘를 관리한다.
당연히 봉인도 풀 수 있다.
그리고 대도시의 묘지기는 태양길드다.
고대왕의 봉인을 풀고 놈을 잡아, 이 대도시를 세운 게 태양길드였기 때문이다.
태양인장!
그것이 열쇠였다.
무영에겐, 그 인장이 있었다.
배승민이 쓰러졌다.
타칸도, 칼라도 월하를 막진 못했다.
조금의 차이.
월하도 힘을 많이 상실한 탓에 그다지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지긋지긋한 놈들. 죽어서 천마의 영양이 되어라.”
장장 삼일가량을 싸웠다.
놈들은 이미 죽어서 그런지 죽지도 않았다.
잘 지치지조차 않았다.
끝없는 소모전.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자 월하가 비파를 들었다.
지이익!
그 순간, 검은 구가 갈라졌다.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구를 자르자 그곳에서 무영이 튀어나왔다.
“네, 네가 어떻게?”
월하가 눈을 부릅떴다.
봉인구는 회심의 한수였다.
루키페르마저 봉인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헌데 봉인구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나?
있다손 치더라도 그걸 어떻게 루키페르가 알겠는가?
하지만, 자세히 보자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루키페르가 아니다.
놈은······.
“지옥마. 유니콘.”
히히히히힝!
곧이어 하늘에서 두 마리 말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다가왔다.
검은색의 지옥마. 순백색의 유니콘.
둘은 오로지 무영만을 따른다.
본질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루키페르가 나왔을 때 몸을 숨긴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무영이 나왔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옥마와 유니콘이 무영의 옆에 당도하자 월하가 말했다.
“무영.”
그래. 무영이었다.
루키페르가 아니라!
그 사실을 깨닫고 월하가 가늘게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 반신격의 존재를 고작 인간이 몰아냈다고?
고작 사도 따위가 어찌!
정말로 루키페르를 몰아냈다면, 이는 예삿일이 아니다.
그 진정한 뜻을 월하가 모를 리 없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수.
심지어 대비조차 안 되어 있는 그런 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두렵나?”
무영은 말했다.
루키페르에게 한 것과 같은 물음.
그렇다.
월하에겐 또 다시 무영이 미지가 되어버렸다.
알지 못한다는 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고, 무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안다.
기사회생이 따로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다.
반면 월하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
타칸에게 그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무영이 이런 힘을 얻지 못했을 테니까.
루키페르가 나오지 못했을 테고, 어쩌면 월하와의 싸움에서 패배했을 수도 있다.
무영의 눈빛이 스산하게 잠겼다.
균열의 파편. 그리고 놈이 가진 권능.
‘다 먹어치워주마.’
< 38. 권능 포식자(3) > 끝
ⓒ 온후#
< 38. 권능 포식자(完) >
월하는 이미 힘이 빠진 상태다.
루키페르에게 기습적으로 공격당한 상태에서 배승민과 타칸, 칼라까지 상대했다.
“루키페르······ 님이 아니로군.”
모든 이들의 반응이 월하와 다르지 않았다.
타칸도, 칼라도, 루키페르가 ‘겉’에서 사라진 걸 믿기지 않아하는 듯했다.
단 한명.
배승민을 제외하곤 말이다.
“주인님. 나오셨군요.”
무영이 전해준 천공왕의 왼팔이 반쯤 찢겨진 채 배승민은 고전하고 있었다. 재생조차 시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마력을 전부 소모한 것이다.
그럼에도 배승민은 평온했다.
아니, 무영을 봄으로써 평온해졌다.
루키페르를 이겨낼 줄 알았다는 듯이.
스릉!
무영은 비탄을 꺼내 쥐었다.
마후라가.
음악의 신이며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 중에 하나다.
본래라면 거만한 성격을 버리고 겸손하게 기어 다녀 ‘복행(服行)’이라 설명되었지만, 월하는 그러한 것들과 거리가 먼 듯싶었다.
루키페르가 안에 있는 지금은 알겠다.
놈은 월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것이라고.
이래서 ‘가짜’라고 표현한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순 없다!”
쿠아앙!
월하가 발을 크게 디뎠다.
대지에 구멍이 뚫리며 그곳에서 온갖 음들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생각 바깥에서 일어난 일. 제어하지 못하는 재앙을 두고 월하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자신의 손 안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놈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만한 판을 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엔 뭐든지 변수가 많은 법이다.
적어도 놈은 최악의 수까지 상정을 해야했다.
“촌극은 끝이다.”
무영이 말했다.
이 일련의 일들 자체가 싸구려 촌극과 다를 바 없다.
대도시를 집어삼킨 뒤 신을 만들고자 하다니.
그것도 모두의 거짓신앙을 빌미로 말이다.
누군가가 들었다면 헛웃음부터 흘렸으리라.
자신의 일이 촌극에 비유당해서일까?
월하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비파를 들었다.
“반신격의 힘을 인간인 네가 온전히 가졌을 리 없다. 보나마나 허세에 불과해!”
디리링!
월하가 비파를 흘렸다.
수와아아아앙!
그러자 거센 태풍이 몰아치며 무영을 노렸다.
하지만 그를 지켜볼 지옥마와 유니콘이 아니다.
지옥마는 한 번 패함으로써 무영을 따르기로 하였고, 유니콘을 얻어 더욱 높은 충성심을 갖게 됐다.
유니콘 역시 마찬가지다.
악마에게 조종당하던 것을 무영이 구해줬다고 보아 그 은혜 갚기에 돌입한 것이다.
둘 다 최상급에 이른 괴물들.
하나하나는 월하에게 못 미치지만, 전혀 다른 성향의 힘이 합쳐지자 대항이 가능해졌다.
1+1=2가 아닌 4, 혹은 그 이상!
콰지지지직!
지옥마가 공간을 압축했다.
유니콘은 뿔을 빛내며 그 공간을 월하에게 다시금 날려 보냈다.
“고작 미물들 따위가!”
어찌 보면 루키페르와 성향이 비슷한 것도 같았다.
월하는 인상을 한참 찡그리며 연달아 비파를 튕겼다.
지직! 지지지직!
수많은 음들이 튀어나와 이내 소음이 되었다.
살을 뚫고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음이었다.
쾅! 콰콰콰쾅!
공간과 음이 만나며 그 사이에 수많은 흔들림을 낳았다.
주변의 모든 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이에서 무영이 움직였다.
전장을 겪고, 루키페르를 만나 얻은 건 ‘권능 포식자’뿐이 아니었다.
무영의 눈이 까맣게 물들었다.
곧이어 전신에서 죽음의 힘이 물씬 풍겨 나왔다.
죽음!
타락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그것.
<죽음의 예술 스킬랭크가 상승했습니다. A-> A+++>
<죽은 이들의 능력을 고스란히 복원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죽음의 무도(無)’가 생성되었습니다.>
<죽음의 무도 –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의 죽음을 접한다.>
<신조차 꿰뚫는 죽음의 힘. 이는 데스로드의 권능입니다.>
흉비쉬가 사용하던 죽음과는 질이 다르다.
무영은 죽음 그 자체와 접하는 게 가능해졌다.
아예 공간을 초월해버리는 힘.
정확히 말하자면 ‘혼의 결’을 보는 기술이었다.
결이 물질을 파괴한다면, 혼의 결은 모든 걸 끊어버린다.
까맣게 물든 무영의 눈에 월하의 죽음이 보였다.
놈과 연결 된 사신도 보였다.
저 사신······.
‘마후라가.’
보는 순간 알았다.
놈이 마후라가라는 걸!
‘월하의 몸을 빼앗았군.’
루키페르가 무영에게 하려한 것처럼 마후라가가 월하의 몸을 빼앗은 것이다.
하여간 무영이 보는 건 죽음의 세계다.
이제 신을 보는 것조차 가능해졌다.
아수라를 접하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보는 건 처음 있는 일.
신이라!
그다지 경외의 마음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무영에게 믿음을 바라는 건 사치다.
무영은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다.
‘죽음의 무도는 진짜 신조차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후라가는 생사를 초월했다.
하지만, 보인다.
놈의 죽음이. 혼의 소멸이.
존재를 격하하고 그곳에 침을 뱉은 무영이 월하와 마후라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부터, 저놈을 벤다.
사아아악!
뿔이 솟았다.
두 개의 뿔이 솟자 세상이 느려지며 더욱 자세히 ‘보는’ 게 가능해졌다.
소리에도 결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는 물질을 통해 전해지는 것.
그 물질의 방향만 읽을 수 있다면 공략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쾅! 쾅! 콰아앙!
비탄이 음과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무영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촤악!
마침내, 그었다.
하지만 월하가 아니다.
월하의 뒤에 있는 마후라가다.
마후라가가 크게 흔들렸다.
고작 옷깃을 베어내는 수준에 그쳤지만 실체하지 않는 허상을 베었다.
신에게 타격을 입혔다.
“네놈, 무엇을 한 거냐?”
월하가, 마후라가가 물었다.
매우 놀란 음성으로.
루키페르조차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진 못했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어찌 자신을 보고 베어낸단 말인가?
“어찌 미물 따위가 신인 나를······!”
주변으로 폭풍이 생성되었다.
음의 폭풍은 모든 걸 집어삼켰다.
지옥마와 유니콘이 쏘아낸 압축된 공간과 부딪히고, 대도시를 타격해 광범위한 피해를 주었다.
이어 월하가 비파를 버렸다.
양 손을 들자 투명한 검이 생성되었다.
“네놈은 필히 죽여야겠구나.”
마후라가는 무영에게서 ‘위험’을 느꼈다.
인간 주제에 신을 베어낼 권리를 가졌다니. 인정할 수 없다.
이대로 크게 놔두면 언젠가는 일을 그르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더 이상의 헌신은 다소 무리가 가지만, 마후라가는 최선을 다해 무영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김태환도, 히아신스도, 태양길드와 휘광길드도, 모두 하늘도서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굉음. 곳곳에 생성된 폭풍.
‘부디 무사하세요.’
히아신스가 중얼거렸다.
하늘도서관에 오른 무영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공방을 치열했다.
자칫 휘말렸다간 그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초강자로 분류되는 이들이 정찰을 떠났지만, 고개를 저으며 돌아왔다.
천마의 벽이 다시 생성된 탓이다.
외부에서의 침입을 아예 막아버리고 있었다.
벌써 수일 째.
그들은 가령들을 퇴치하며,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때로는 경외하고 어쩔 땐 아쉬운 소리도 흘렸다.
싸움의 진행이 어찌 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10강에 이른 이들이 싸우면 저러한 형태로 진행이 될 것 같았다.
10강은 서로가 불가침이다. 옛적부터의 전통과 같았다.
“마왕과의 전투를 보는 것 같군요.”
압둘론이 히아신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마왕과의 전투요? 보신 적이 있으세요?”
“대도시가 건설되기 전에 인류는 마왕들과 숱하게 싸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알렉산드로님도 그러했고······ 허.”
안주한 지 수십여 년.
마왕들은커녕 악마도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인류는 정체하고 있었다.
그것을 꾸짖듯 천마의 시련이 내려졌다.
안전에 취한 인류는 시련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이전이었다면, 마왕들과 싸울 당시의 그들이었다면, 이런 시련 따윈 순식간에 돌파했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도 무영이 아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이 시련이 지나거든 우리는 각성해야합니다. 이전의 안락함은 잊고 말입니다.”
압둘론이 강조했다.
쿠르르르릉!
검은 번개가 몰아쳤다.
히아신스는 하늘도서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영님이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강한 남자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무영은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었다.
압둘론조차 무영의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그 신위. 태양신의 사자로 추앙받기 충분하지 않았나.
‘믿어요.’
히아신스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필히 죽여야할 놈.
그러나 죽이지 못했다.
천재지변과 같은 싸움 뒤에 무릎꿇은 건 월하다.
신의 힘을 받던 신체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월하가 절규했다.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단 말이다!!”
무영은 모든 걸 읽었다.
이미 육체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월하가 신의 힘을 더 강하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고, 약해진 공격 따윌 파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과부하 상태가 되어 결국 신체가 녹아내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단순 힘 대결은 무영이 밀린다.
하지만 무영은 이용할 수 있는 수가 많았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너는, 네놈은 아수라의 사도 따위로 있을 녀석이 아니다!”
아수라. 데스로드. 그리고 킹슬레이어.
무영이 얻은 힘은 많다.
아수라는 그중 하나일 뿐.
천하의 마후라가도 그를 전부 읽진 못한 모양이다.
그것이 놈의 패착이었다.
무영이 월하의 목을 쥐었다.
뿌득!
그대로 꺾자, 생명이 스러졌다.
마후라가를 죽이진 못했지만 마후라가와 연결 된 월하를 없앴다.
월하가 죽었으니 마후라가도 전처럼 쉽게 설치진 못하리라.
동시에.
<불멸왕의 조각(2)을 손에 넣었습니다.>
<균열의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권능 포식자의 힘이 발동합니다.>
<권능 포식자의 힘이 중단됩니다.>
중단 되었다?
월하는 죽었다. 심장이 멎었다.
허나 온전히 멸하진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마후라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시퍼렇게 눈을 뜬 채, 그가 무영에게 말했다.
“이 몸을 영양 삼아 천마를 부활시키겠다. 어디 한 번 이것도 막아보거라.”
마후라가는 어떻게든 무영을 죽일 생각이었다.
월하의 몸으로 힘들다면, 천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스아아아악!
순식간이었다.
월하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루는 하늘로 날렸고, 하늘이 더욱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크아아······ 크아아아아!
언뜻 들으면 비명과도 같은 소리.
그러나 그 비명을 들은 무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느낌은 처음 루시페르를 마주했을 때의 그것이었다.
전율. 압도!
잠시 후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다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천마가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절반만 완성되었습니다. 불안정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천마는 완전해지고자 모든 걸 자신의 영양으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쿠우우웅!
족히 100m를 넘는 거구!
금빛 투구를 썼으나 양손이 철구에 속박되어 있었다.
죄인처럼.
하지만 그 존재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요, 요정왕 님이셔요.”
우히가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스아아아악!
그때, 태양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응? 이게 왜 나한테······?”
타칸의 망토 쪽에서 흘러나온 빛.
그것이 빠르게 한 형상을 만들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빛만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나온 목소리만큼은 알 것 같았다.
‘알렉산드로!’
무영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생각을 이어갈 겨를도 없었다.
알렉산드로의 형상을 한 빛이 천마를 향해 쏘아지듯 튕겨져 나갔다.
< 38. 권능 포식자(完) > 끝
ⓒ 온후#
< 39. 절대적인 무無(1) >
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태산과 같은 위용으로, 구속구에 얽힌 채 그저 비명만 질러댈 뿐이었다.
하지만 그 구속구 조차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중이었다.
“요정왕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공허에 떨어졌대요. 우리 요정들의 세계도 함께 부숴졌구요. 우히의 엄마가 그렇게 얘기해줬어요.”
우히가 몸을 바르르 떨며 무영의 어깨 위에 올랐다.
그리곤 강하게 무영의 목을 부여잡았다.
요정들은 자신들의 집이 없다.
인간이 대지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러한 토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련을 만들고 그 보상으로 집을 얻는다.
그 원흉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알렉산드로 퀸타르트!’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태양길드의 길드마스터.
인류 10강 중 일인.
그 외에도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그가 준비한 한 수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조차 포장한 것이라고 무영은 생각했다.
무영이 아는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사용할 작자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 그대로인 인물.
그런 그가 사라졌다. 유일하게 태양거울만을 들고서.
어쩌면 육체의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고, 사념 혹은 혼과 같은 걸 태양거울 안에 몰래 담아둔 게 아닐까.
태양거울은 말 그대로 거울이다.
본 것을 흡수하거나 저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른 월하는 방심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태양길드와 그곳의 마스터가 죽는다면 시련의 성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무영이라는 변수가 나타나고, 알렉산드로마저 마지막 반전을 꾀했다.
그래, 반전······.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복잡한 짓을 했을 리 없다.
노림수. 월하의 이목을 피해서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었던 거다.
무영은 죽음의 무도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빛의 형상을 한 알렉산드로가 천마에게 흡수되듯 들어가는 걸 보았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천마가 비명을 내질렀다.
만들어진 왕은 스스로의 구속구를 던져버리고 오열했다.
자신에게 들어온 걸 밀어내고자 발악하였다.
‘영혼동화!’
무영은 이맛살을 구겼다.
알렉산드로의 혼이, 천마의 불안정한 혼을 덮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노린 한수가 뭐였는지 알 것 같았다.
태양거울은 비춘 대상을 담거나 저장할 수 있다. 그리고 마(魔)를 몰아내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지금 알렉산드로는 태양거울 그 자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마에 지배당한 천마의 혼이 강한 반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처음부터 알렉산드로의 목적은 천마였다.’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어찌해야 하는가.
알렉산드로가 천마를 삼킨다면, 그 다음은?
“아, 안돼요. 저러면 안 돼요!”
우히가 벌떡 일어났다.
날개를 퍼덕이며 급히 날아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저 주변은 위험하다. 천마는 혼에도 타격을 입힐 정도의 격을 지녔다. 실체가 없는 요정이라도 맞으면 죽는다.
무영이 우히를 붙잡았다.
그러자 우히가 울먹이며 말했다.
“다른 게 나와요. 둘이 합쳐지면 그냥 다른 존재가 될 거예요!”
“다른 존재?”
“우히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아주 위험한 느낌이 나요. 엄마는 우히의 이런 감이 잘 맞는다고 했어요.”
우히가 엄마라 부르는 존재는 요정들의 여왕이다.
무영은 이맛살을 구겼다.
다른 존재가 된다?
우히가 이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천마도, 알렉산드로도 아니면 누가 된다는 말인가?
“절대적인 무······ 도플갱어.”
우히의 눈이 한순간 몽롱해졌다.
마치 무언가에 쓰인 듯이.
이윽고, 천마가 비명을 멈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00m가 넘는 거구가, 조금씩 줄어들어간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계속해서 줄어들다가 인간의 형태를 만들었다.
분명히 몸은 알렉산드로였다.
하지만 빚다가 만 것 같이 이목구비가 없었다.
그저 입 하나만 얼굴에 달랑 달려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군. 왜 얼굴이 없지?”
천마도 아니고, 알렉산드로 퀸타르트도 아니다.
정체모를 존재가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누구인가.
죽음의 무도로 바라본 놈의 형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절대적인 무(無).
뭐든지 될 수 있는 형질.
정말 도플갱어란 말인가?
도플갱어란 어떠한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는 상상속의 괴물을 이르는 이름이다.
이야기만 무성할 뿐, 마계에 도플갱어란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인간들은 서로 뭉쳐있지 조차 못했을 것이며 진즉에 파멸했을 것이므로.
‘불길하다.’
하지만, 불길했다.
비단 무영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었다.
타칸도, 칼라도, 배승민마저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신은 아닐진대.
왠지 모를 불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이 자리에 서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뼉을 쳤다.
“유전자 정보. 그래, 그게 부족했군. 이 몸은 영혼의 정보로만 빚어졌으니, 영혼에 맞는 유전자적 정보도 있어야 완성이 되는 거였어.”
혼잣말.
자신의 반쪽짜리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놈이 한쪽을 바라봤다.
정확히, 태양길드의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투기장을 향해서.
무영은 인상을 구겼다.
스릉!
비탄을 뽑은 채 빠르게 움직였다.
놈은 불길한 존재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돌이킬 수 없으리라고.
비록 월하를 상대하느라 심력을 소모했지만 아직이었다.
5초 정도는 4배로 느려진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
뿔 두 개가 솟고, 무영은 온 힘을 다해 나아갔다.
“어어?”
촤아악!
팔을 잘랐다.
스악!
가슴을 베었다.
토막을 냈다.
툭!
놈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너 재밌는 기술을 사용하는구나?”
얼굴만 바닥에 남은 녀석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동시에 흩어진 몸이 모여들어 다시금 육체를 재구성했다.
‘결마저 재생이 된다고?’
결대로 잘랐다.
죽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하지만 복구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몸의 시간을 되돌렸다.’
결이 잘리면 반드시 죽는다. 생물인 이상은 그렇다.
하지만 신체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타격을 입은 걸 아예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결을 베어내도 소용이 없다는 뜻.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인가?”
놈이 무영의 행동을 흉내 냈다.
그러자, 세상의 시간이 느려졌다.
“아! 이런 식이었군. 그런데 효율이 별로야. 이거 너무 빨리 지치잖아?”
느려진 시간 속에서 놈이 말했다.
무영과 같은 4배속.
‘위험하다.’
어쩌면 마신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이제 막 태어났을 때 죽여야만 한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무영은 비탄을 재차 쥐었다.
크아아아아앙!
용의 혼이 울부짖으며 그대로 놈을 덮쳤다.
인식할 틈조차 없이 아예 가루로 만들면 신체의 시간을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은 2초.
무영은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촤르르르르르르르!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그, 그만! 그만!”
놈이 외쳤다.
그걸 신경쓸 무영이 아니다.
결국 가루처럼 놈은 조각났다.
무영은 미간을 구기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스르르르르.
재생이 된다.
가루가 뭉쳐 다시금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로도 안 된단 말인가?
하지만 무영의 의도가 전부 실패한 건 아닌 듯싶었다.
재생된 놈의 얼굴이 구겨졌다. 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표정이 없다뿐이지 공포에 질린 행동 그 자체.
설마 무영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듯했다.
“무, 무섭다! 너 무섭다!”
도플갱어가 도망갔다.
투기장을 향해서. 태양길드원들이, 히아신스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하지만 무영의 이마에서 뿔이 들어갔다.
‘루키페르!’
무영이 혼의 문을 두드렸다.
묵묵부답.
루키페르가 힘을 빌려준다면 모르겠지만, 억지로 주도권을 넘긴 탓에 당장은 힘을 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무영이 내심 욕지기를 뱉었다.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손만 빨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무영은 모든 언데드를 소환했다.
검골 삼형제와 킹뮤턴트까지 불렀다.
“놈을······ 죽여라!”
놈을 막아섰다. 무영에게 당했다면, 다른 언데드들도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검골 삼형제가 검을 놀렸다. 타칸을 비롯한 언데드들도 급히 가세했다.
“제발 그만! 끄아악!”
놈이 죽었다 살아나길 반복했다.
어디까지 재생할 수 있는 지 보자!
무한히 가능하진 않을 터.
그렇게 수십 번을 죽이고 다시 재생했을 때였다.
불현듯 놈의 몸이 빛났다.
알렉산드로의 힘!
그중 은폐와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이다.
죽여도 죽지 않았던 알렉산드로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저 스킬들에 있었다.
텔레포트의 경우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위험을 벗어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스킬이다.
놈이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자 본능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빛 속에서 놈의 몸이 투명해졌다.
그리고 빛이 걷혔을 때, 놈은 그곳에 없었다.
도플갱어는 도망쳤다.
그는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와 같았다.
본래는 공허에 기생하며 살아가던 존재.
다만, 조금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궁금증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처음만난 생명체인 무영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공포’도 학습했다.
무섭다. 무영의 눈빛, 살을 베는 감각. 모든 게 두려웠다.
수십 번은 더 가루가 됐다.
다시 못 돌아오는 줄 알았다.
‘내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성이 되어야만 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완성뿐이 없었다.
영혼의 정보로 빚어진 몸.
하지만 몸을 형상하는 유전자가 부족하다.
그것이 가까이에 있었다.
‘히아신스! 내 원래 유전자로 만들어진 인간!’
알렉산드로의 기억.
히아신스를 흡수하면 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동화할 수 있으리라.
슈아아앙!
도플갱어가 투기장 안으로 텔레포트했다.
쿵!
그리고 바닥에 착지했다.
“저건 또 뭐야?”
“얼굴이 없잖아?”
“저것도 령인가? 일단 죽여!”
투기장 안에는 수천의 태양길드 길드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난입한 도플갱어를 죽이고자 무기를 빼들었다.
‘무기 든 놈. 죽인다!’
무영에게 한 차례 당했기 때문일까?
도플갱어는 분노했다.
저들은 무영처럼 강한 것 같지도 않았다.
강자들은 색깔이 있는 령들을 사냥하러 나갔기 때문이다.
투기장 안에 있는 이들 중 진짜 강자라 할 수 있는 이는 매우 적었다.
잠시 후 도플갱어의 손이 무기로 변했다.
그리고 인간들이 사용하는 스킬을 그대로 복사한 뒤 반사했다.
얼음도, 화염도, 번개도, 모든 스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아악!”
“스킬을 그대로 반사합니다!”
“아니야. 저건 가져가는 거다! 우리 스킬을 가져가고 있는 거야!”
깨달았을 땐 늦었다.
“꺼져라!”
도플갱어가 조금씩 자신감을 가졌다.
나는 약한 게 아니야!
하물며 히아신스를 잡아먹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소녀가 지척에 있었다.
인간들이 두려움에 떨며 살짝 물러나는 순간, 도플갱어는 거대한 천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히아신스! 내 유전자!”
히아신스가 고개를 돌렸다.
안은 치료실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있었고 히아신스는 그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이 평소 령들과 싸우는 것인 줄 알았건만.
난데없이 들어온 침입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히아신스가 말했다.
“······ 알렉산드로님?”
“네 피가 필요하다!”
어찌할 겨를도 없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도플갱어가 다가왔다.
그리고 히아신스의 목을 물었다.
콰악!
천막 안으로 무영이 들어섰다.
첨벙!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무영이 닥치기 전에 놈은 부랴부랴 도망쳤고, 그 결과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무영······ 님.”
히아신스.
소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무사··· 하셨군요.”
무영은 가만히 다가갔다.
목의 상처를 막은 뒤, 맥을 짚었다.
지지직!
손을 대려 한 순간 손이 튕겼다.
강력한 저주. 도플갱어의 이빨에 새겨진 저주가 히아신스에게 맺혀있었다.
‘늦었군.’
억지로 저주를 뚫고 히아신스를 살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피만 빨린 게 아니다.
생명을, 원천의 정기를 빨렸다.
강력한 저주가 있어서 엘릭서를 가져온대도 살아나기 힘들다.
성자의 축복이나 유니콘의 뿔이 있더라도 마찬가지.
하물며 그것들이 당장 정제된 형태로 있어야만 했다.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무사하셔서······ 다행··· 이에요.”
히아신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영에게 닿지 못했다.
그대로 히아신스가 고개를 떨궜다.
< 39. 절대적인 무無(1) > 끝
ⓒ 온후#
< 39. 절대적인 무無(2) >
숨을 멈췄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죽음.’
무영에게 죽음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수천에 달하는 사람을 무감정하게 죽였다.
그중에는 영웅도 있었고, 악당도 있었고, 평범한 사람, 노인과 어린애들 또한 있었다.
그들을 죽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느냐?
그렇지 않다.
세뇌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이 자체가 무영의 본성이었다.
허나 하지만 히아신스는 무영에게 순수한 호의를, 관심을 보냈던 소녀다.
아무런 대가없이.
마계에선 보기 드문 장면이고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할 수준의 감정이었다.
불현 듯 머릿속으로 히아신스의 꽃말이 떠올랐다.
‘겸손한 사랑이라.’
꽃말 그대로의 소녀였다.
하지만 도플갱어의 저주는 영혼 깊숙하게 박혔다.
죽어도 혼은 남아있어야 하건만, 없다.
놈의 저주는 사람과 생명 그 자체를 앗아가는 저주다.
그 이름답게 관련 된 인간의 모든 걸 파멸시키는 그런 놈이었다.
어쩌면 혼조차 놈이 가져갔을 수도 있었다.
히아신스를 언데드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속 빈 강정이 될 터.
냉정하게 따져서, 그다지 도움도 안 될 것이다.
팅! 팅그르르······.
무영은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울의 룬 반지.’
디아블로스를 만드는데 필요한 제물.
미치광이 군주의 반지와 오리스의 신좌를 모았다.
이 반지만 있으면, 제단으로 가서 디아블로스를 소환할 수 있다.
원래부터 이 반지를 노리고 히아신스의 옆으로 온 것이지 않던가.
그럴진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히아신스는 마지막까지 무영을 걱정했다. 보통의 소녀였다면 아픔에 몸을 떨었을 테다.
저주로 인해 몸이 죽어가는 그 고통은 진저리칠 만큼 끔찍한 것이었을 텐데도.
무영은 조심스럽게 떨어진 반지를 들었다.
“편히 눈 감아라. 도플갱어는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영이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 없었다.
오로지 무영만이 가능한 추모의 형태.
무영은 더욱 표정을 굳혔다.
‘제단은 만들면 그만이다.’
디아블로스의 소환 의식을, 조금 앞으로 당겨야겠다.
제단은 별게 없다.
그저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제물만 제대로 바치면 그만이니.
다만 디아블로의 신도가 염원을 해야 하는데, 그 문제를 무영은 자력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루키페르. 너의 신격을 빌려가마.’
힘이 아닌 격만을 가져왔다. 힘은 루키페르가 허락을 해야 나눠주는 거지만, 격은 이미 루키페르의 영혼을 흡수한 무영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루키페르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무영은 무시했다.
지금은 루키페르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
이어 제단을 세우고 반지 세 개를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나와라.’
스팟!
번개가 튀었다.
무영은 루키페르의 반신에 달하는 신격을 흉내 내는 중이었다.
그러자 자석처럼, 무언가가 제단으로 끌려왔다.
<세 개의 반지가 모두 모였습니다.>
<제단의 의식을 시작합니다.>
의식이라 할 것도 없었다.
말이 디아블로이고 신도이지 사실 이것들은 시스템에 불과했다.
디아블로는 신조차 아니었으므로. 과거 강력한 존재였다는 문헌은 있지만, 그는 그저 무기를 봉인해뒀을 뿐이다.
구색만 맞추면 소환되게 되어있었다.
반쯤 무너진 하늘도서관.
그곳에 어두운 안개가 몰려들었다.
안개는 세 개의 반지를 집어삼키고, 다른 하나를 내뱉었다.
<‘디아블로스(S+)’가 소환되었습니다.>
붉은 용의 형상이 그려진 대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그것을 무영은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자 관련 된 내용이 떠올랐다.
명칭: 디아블로스
등급: S+
내구: 350,000(수리불가)
분류: 무기
효과: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변할 수 있는 무기. 닿는 모든 걸 파괴하며 저주한다. 과거 디아블로가 사용하였으며 그 강력함 때문에 봉인이 되었다.
* 전설
* 닿은 적에게 ‘용마의 저주’ 전파
* 힘+55
* 지능+40
* 모든 능력치+10
* 모든 결계 스킬의 강화
S+!
불멸왕의 갑주와 같은 등급이다.
하물며 무기다. 좋은 무기는 구하기가 더욱 까다롭다.
‘도플갱어의 신체에 흠 정도는 낼 수 있을 테지.’
무영은 생각했다.
도플갱어가 자신의 신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던 이유를.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저 잘라내고 썰어내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닿는 순간 모든 걸 앗아버릴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겠지만, 무영은 욕심을 냈다.
‘먹어치워라.’
비탄을 들었다.
그릉! 그르릉!
그러자 비탄에서 묘한 소리가 나왔다.
디아블로스를 본 순간, 녀석의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
먹고 싶다고!
저 검을 내 힘으로 만들고 싶다고!
무영은 그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비탄이 디아블로스를 원자단위로 분해하며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탐식’이 발동합니다. 비탄이 ‘디아블로스를’ 흡수했습니다.>
<명칭: 비탄
등급: S++
내구: 357,888(수리불가)
분류: 무기
효과: 그레모리의 비탄이 담긴 검. 특수조건이 개방 된 상태.
* 신화(유일)
* 닿은 적에게 ‘진마의 저주’ 전파
* 적의 피를 흡수해 체력으로 전환
* 탐식(검 흡수. 흡수한 검의 내구를 비롯한 모든 걸 가져온다.)
* 힘+75
* 투기+30
* 지능+45
* 모든 능력치+15
* 분노의 함성
* 모든 공격과 결계스킬 강화
그르르릉······.
비탄이 만족한 듯 소리를 죽였다.
‘힘이 넘쳐흐른다.’
놀라운 점은 또 있었다.
흡수하자, 더욱 강화되었다.
기존의 능력에 추가가 된 셈이다.
본래 전설급이었던 무기가 신화급으로 탈바꿈했다.
이 위에는 이제 반신(초월)과 신급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S++등급 정도 되는 무구를 무영은 본적이 거의 없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수준.
그중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진마의 저주?’
하지만 특이사항이 있었다.
용마가 아닌 진마의 저주.
―진마는 자기보다 작은 마귀들을 잡아먹습니다. 혼에 새겨지는 저주이며 성황의 축복으로도 풀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설명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탄의 전신에선 불길함이 흘러 넘쳤다.
그 수준이 도플갱어에 육박할 정도다.
놈 역시 마에서 태어난 존재.
누구의 저주가 더욱 강할지, 한 번 따져봐야겠다.
‘그 전에.’
무영은 도플갱어를 확실하게 사냥하고자 한 가지 수를 더 내었다.
“배승민.”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어둠속에서 배승민이 나타났다.
무영은 배승민의 목에 있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탈리스만을 사용하겠다.”
탈리스만!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리틀 위시.
두 개가 합쳐지면 진정한 ‘위시’를 만들 수 있음이다.
몇 개의 마왕군단을 물리칠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힘!
진마의 저주와 위시를 도플갱어가 동시에 견뎌낼 수 있을까?
아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영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놈은 불길하다. 그리고 아직 보상이 나오지 않았다.
말인 즉, 최후로 놈을 죽여야만 모든 게 정산이 된다는 뜻이다.
저만한 존재라면 위시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보상도 바라볼 수 있었다.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말.
하물며······.
‘너의 권능은 나의 것이다.’
비탄과 달리, 아직 권능 포식자는 배가 고팠다.
*
―네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루키페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탈리스만과 리틀 위시로 진짜 ‘위시’를 만들었을 때였다.
―그것은 대천사의 힘이다. 그걸 어찌 네가 갖고 있는 게냐?
“위시가 대천사의 힘이다?”
루키페르는 본래 천사였다.
타락하며 성스러운 힘을 잃었다.
그래도 천사의 계보 같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 힘을 내게 다오. 너에게 협력해주마.
일순 루키페르의 탐욕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위시는 성스러움의 결정체.
이걸 흡수한 루키페르는 과거의 신위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무영의 혼 따윈 빠르게 사라져버릴 것이다.
협력해준다는 소리도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대천사의 힘이라······.’
하지만 저 탐욕 덕에 건진 게 있었다.
위시가 진정 그러한 힘이라면 조금 더 구체적인 소원을 빌 수 있을 듯했다.
“위시.”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바람이 살랑대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탔다.
곧 세계가 일변했다. 달이 아래에 있고 주변은 우주였다.
알 수 없는 행성. 그곳에 떨어진 건 무영뿐이었다.
―멈춰라! 그 아까운 것을 사용하겠다고?
―내게 넘긴다면 놈을 죽이는데 전면적으로 협조하마.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느냐?
루키페르는 속삭였다.
하지만 무영은 듣지 않았다.
루키페르의 힘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이 무영에게 향할 수도 있었다. 놈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것은······.
“대천사의 힘을 나에게만 부여해다오.”
―미련한!!
루키페르가 절규했다.
눈 앞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위시를 사용하면 더는 물릴 수 없다.
하지만 위시도 한계가 있었고, 구체적이며 상한선에 근접할수록 더욱 좋은 효과를 얻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무작위로 별 거 아닌 힘이 주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영은 루키페르의 힌트로 말미암아 최대의 선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 부여의 대상이 루키페르는 아니었다.
오로지 무영 자신 뿐!
「7대 대천사 가브리엘의 축복이 사용자에게 전이됩니다.」
「가브리엘은 자비와 복수, 죽음의 대천사입니다.」
「‘신성력’이 생성됩니다.」
「로드클래스, ‘대천사’를 계승했습니다.」
여태껏 얻은 것과는 전혀 성향이 다른 클래스.
허나 무영은 네 개의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클래스를 가질 수 있었다.
설마 신성력과 관계 된 것마저 가능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반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힘을 받아들인 것이다.
로드클래스, 대천사라.
―아아!!
루키페르가 전율했다.
설마 가브리엘의 힘을 무영이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듯싶었다.
대천사의 힘. 그중 7대 대천사라면 아예 이야기가 다르다.
루키페르가 비록 치천사의 계급에 있었던 자라지만, 7대 대천사는 단순한 계급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브리엘이라면 루키페르와 비교해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 천사였다.
저 힘. 저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가브리엘의 신성력은 일반적인 신성력과 궤를 달리한다.
놈은 일반적인 천사라기보단 악마에 더 가까울 정도로 악랄하다. 하지만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그럴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저 힘을 소유하면 자신의 타락도 무효화 되리라.
루키페르가 탐욕을 일으켰다.
하지만 무영의 혼에 신성함이 깃들자 루키페르는 기겁했다.
―어찌하여 인간이!
여태껏 보여준 무영의 행보가 굉장히 특이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천사의 힘마저 온전히 다룰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갖고 싶었다. 저것은 본래 자신이 가져야할 것이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무영을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
건드리면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았기에.
타락한 루키페르는 신성한 대천사의 힘 앞에 기를 펼 수 없었다.
‘루키페르마저 두려워하는 힘.’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도플갱어를 묵사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에 힘을 발휘해 적을 멸하는 게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무영은 이마를 만졌다.
뿔이 네 개로 늘어났다.
< 39. 절대적인 무無(2) > 끝
ⓒ 온후#
< 39. 절대적인 무無(3)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영은 최대 3개의 뿔을 돋게 할 수 있었다.
하나당 두 배로 느려지며, 8배속의 세계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속시간이 괴랄할 정도로 짧았다.
지금 무영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렇다.
‘16배속.’
느리다. 한없이 느리다.
그 느려진 세상 속에서 무영은 다른 걸 보았다.
생명의 꿈틀거림. 자연의 움직임. 공기의 흐름과 바람의 속살까지.
문제는 5초. 원래 배속의 5초가 아니라, 무영의 느낌으로 5초다.
이를 16등분하면 현세에서의 0.3초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0.3초를 5초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했다.
적어도 이 5초 동안, 현세에서의 0.3초 동안 무영을 이길 자는 없을 테니까.
초월체가 아닌 이상엔 말이다.
“커헉! 후읍! 후읍!”
무영은 재빨리 뿔을 감췄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파급력이 다르다. 눈이 빠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이 빨리 뛰었다.
‘자주는 못쓰겠군.’
네 개의 뿔을 드러내는 건 최후의 수였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숨겨둬야 했다.
적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 0.3초안에 모든 걸 끝내야만 했으니.
무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털어냈다.
‘상태창.’
달라진 점을 눈으로 확인하는데 가장 좋은 게 상태창이다.
객관적인 수치만큼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칭호->
어둠과 심연(모든 능력치+10)
전승효과->
(9가지의 전승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능력치+35, 지능지혜+15, 망혼력+10)
직업효과->
데스로드(Lord class)
킹슬레이어(Lord class)대천사(Lord class)
능력치->
힘 485(270+215) 민첩 477(288+189)
체력 450(280+170) 지능 495(240+255)
지혜 410(275+135) 투기 330(170+160)
마법저항 525(125+400) 망혼력 410(260+150)
악성향 400(320+100) 신성력 300(200+100)
종합레벨: 475
특이사항 : 루키페르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흡수해 순수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4차 각성을 완료했습니다.
착용&적용 중인 무구 : 비탄(모능+15, 힘+75, 지능+45, 투기+30), 12궁도 중 3세트(모능+30, 마저+140, 망혼력+40, 민첩+50), 불멸왕의 흉갑(힘+15,투기+30,체력+50,마저+80), 헤르메스의 장화(민첩+15), 해골장신구(힘+19, 민첩+4), 파멸의 하의-바론(민첩체력+20, 지능+30), 황야세트(마저+50, 지능지혜+20), 별빛(절대자의 별-모능+10)
한 눈에 보기에도 무영의 성장은 남다르다.
하지만 월하와 싸울 때보다 더욱 순수능력치가 높아졌다.
비탄이 디아블로스를 잡아먹었대도 어디까지나 보조능력치.
순수능력치의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4차 각성을 완료했다고?’
어느 사이에?
현재 무영의 순수능력치로는 4차각성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무영은 한 손에 맺힌 성스러운 기운을 바라봤다.
어쩌면, 위시를 사용한 순간에 4차 각성이 진행된 건 아닐까.
대천사의 신성력을 받아들이고자 몸이 알아서 진화한 것이다.
인지조차 하지 못했지만 강해진다는 건 좋은 거다. 이로써 단순 능력치 상으로도 무영은 인류 10강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특히 마법저항의 경우엔 500이 넘는다.
10강의 수준을 넘어 초월체에 근접한 수치.
어지간한 스킬은 이제 간지럽지도 않다.
‘이런 걸 장비빨이라고 했던가?’
무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장비의 덕을 많이 보고 있긴 했다. 무영 정도로 장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천하의 알렉산드로도 이에 근접하진 못하리라.
하긴. 중요한 건 결국 종합하여 얼마나 강한 것인가이다.
10강들도 장비의 덕으로 그만한 힘을 소유한 것이지 아니었다면 그 수준이 대폭 내려갔을 것이다.
‘대천사의 스킬도 확인해야겠지.’
새로 얻은 클래스다.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싸우는 바보는 없다.
어차피 이제 막 얻은 클래스이고, 로드 클래스의 주력 스킬은 자동등급 보정이 되지 않는다. 보나마나 최하위의 등급일 테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영은 상태창 시계를 돌려 나머지 정보를 떠올렸다.
스킬명칭: 가브리엘의 날개(無)
설명 - 7대 대천사장 가브리엘의 날개를 소환한다. 가브리엘의 날개는 모든 정의를 규정하는 힘이다. 최대 7,777개의 깃털을 날려 적을 격살할 수 있다. 깃털의 파괴력은 신성력에 비례한다.
스킬명칭: 정의 집행(無)
설명 - 자비와 복수, 그리고 악을 멸할수록 순수 신성력이 올라간다. 이는 가브리엘만의 권리이며,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스킬명칭: 신성한 축복(F)
설명 - 모든 대천사들이 가진 축복이며 회복스킬. 신성력과 등급에 비례하여 회복의 범위나 속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 축복의 힘은 능히 성황의 권능과 비견된다.
얻은 스킬은 세 개.
하지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가브리엘의 날개마저 소환할 수 있다니.
무영은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등의 피부를 뚫고 거대한 날개가 치솟아 올랐다.
촤악!
완전하게 펴진 날개는 두 개가 전부였지만 그 크기가 무영의 몸보다 커다랬다.
날개에 섞인 은은한 신성력은 무영이 보기에도 절로 경건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하!
무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천사의 날개라니!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천사의 날개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장 ‘천사’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은 인간이 무영 아닌가.
하지만, 이해했다.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천사였다면 무영은 결코 이러한 날개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정의 집행. 결코 타락하지 않는 힘.’
이 하나가 무영을 정당화했다.
루키페르가 어째서 발악하며 갖고 싶어 했는지 스킬의 설명을 읽고 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무영이 하는 대부분의 행동이 ‘정의’로 인정받는다는 뜻.
그러한 권리를 공유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이 정의집행이었다.
신성한 축복 역시 만만치않다.
‘성황에 비견되는 치유능력이라.’
등급이 낮아 자주 쓰진 못하고 범위도 비좁겠지만, 성황은 유일하게 신을 대리하는 인간이다. 성녀는 신의 제일사도라고 보면 되지만 대리자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당연히 성녀들의 힘도 성황 하나엔 미치지 못한다.
뮬라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자.
무영은 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마신들이 쳐들어올 때조차 그는 거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하니, 극도로 움직임을 조심하는 자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그가 움직이면 마왕들도 철수를 한다고 했다.
죽었던 이조차 살려낼 굉장한 이능을 발휘한다고.
그에 비견된다고 한다면······.
‘조금만 빨랐다면.’
이 힘을 조금 더 빨리 얻었다면, 히아신스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결국 결과론이다.
디아블로스를 얻지 못했다면, 도플갱어를 완전히 죽일 수 있으리라 자신하지 못했을 것이고 위시를 사용하지 않았을 터다.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어디 있느냐.’
이로써 모든 준비를 끝냈다.
무영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황혼이다.
뉘엿뉘엿 날이 저무는 중이었다.
도플갱어는 얼굴을 얻었다.
미약했던 부분들이 보완되었다.
‘나는 배가 고프다.’
하지만 부족하다.
영혼과 신체의 조화가 이루어졌대도 도플갱어는 더욱 많은 정보를, 힘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도플갱어는 여전히 무영이 무서웠다.
무영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그들의 피와 영혼이, 도플갱어에게 살을 붙였다.
와작! 와작!
쩝쩝!
뼈째로 씹었다. 그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걸 입에 넣었다.
“맛있다!”
인간은 별미였다.
한 번 중독되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도플갱어는 점점 대담해졌다.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은 약해빠졌다.
자신을 막을 자는 거의 없었고, 인간을 잡아먹을 때마다 빠르게 자신은 강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스킬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더 적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무영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리라고 보았다
10,50, 100······.
잡아먹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도플갱어의 힘도 강해졌다.
도플갱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령들도 꽤 맛있어 보이는군.’
귀신과 망령들.
고대왕의 수호자들까지.
실체가 없는 것들에 눈이 갔다.
하물며 령들은 도플갱어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끼에에엑!
꺄아아아아악!
령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애당초 그의 몸에 베이스가 된 건 천마와 알렉산드로다.
거기엔 월하와 악마들도 섞여있었다.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에 관여할 수 있다는 뜻.
‘별미지만 조금 부족해.’
령들을 잡아먹을수록 덩치가 커졌다.
하지만 인간에 비하면 그다지 맛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쩝!
도플갱어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뭉쳤다. 각각으로 돌아다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인간을 노리려면, 뭉쳐있는 지점을 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을 공격하면 무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아니다. 이 정도면 놈도 이길 수 있다. 내가 놈을 가루로 만들 수 있다.’
도플갱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힘이 넘쳤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쿵! 쿵!
도플갱어가 콧김을 강하게 뿜어내며 발을 옮겼다.
모든 인간이 투기장에 모여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작은 그룹부터 습격했다.
그러나 아무도 도플갱어를 막지 못했다.
“크하하하하!”
도플갱어는 신이 났다.
강한 인간들도 하나, 둘 흡수해 나갔다.
이제 진정으로 자신을 막을 자는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최강이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
더 많은 인간은 먹고 싶었다.
투기장이 보였다.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왔다!”
“문을 닫아!”
“원거리 사격! 마법사단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라!”
인간들은 계속 당하지만은 않았다.
투기장은 철저하게 준비한 자들만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플갱어를 막진 못했다.
아니, 타격은 줬다.
살이 파이고 신체부위를 잘라내고······.
하지만 도플갱어의 회복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진정 놈은 괴물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외쳤다.
절망어린 목소리.
도플갱어는 문을 뚫고 학살을 시작했다.
슝! 푸욱!
그때, 하늘에서 깃털이 날아왔다.
슈슈슈슈슈슈슝!
하나의 깃털은 점점 늘어났다.
이내 수천 개의 깃털이 도플갱어의 전신을 찔렀다.
‘회복이······ 거의 안 돼?’
도플갱어가 눈을 부릅떴다.
깃털이 박힌 장소는 회복이 무척 더뎠다.
이런 적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오, 사자시여!”
“태양의 사자께서 나타나셨다!”
인간들이 환호했다.
놈을 도플갱어도 안다.
무영!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꿀꺽!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영에게선 극도로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놈을 먹고 싶다.
아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만 한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놈을 먹으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질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쿵!
도플갱어가 뛰어올랐다.
무영을 먹기 위해!
살가죽을 뚫고 뼈로 이루어진 날개가 나왔다.
스릉!
그러나 무영은 무표정했다.
이윽고 하늘에 날개를 활짝 핀 상태로 비탄을 꺼내자, 주변으로 강한 암흑색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쿠와아아앙!
< 39. 절대적인 무無(3) > 끝
ⓒ 온후#
< 39. 절대적인 무無(完) >
분노의 함성!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다.
하지만 암흑색의 파동은 단순한 알림이 아니다.
적의 전투의지를 꺾고, 겁에 질리게 만들며, 각종 디버프효과를 줄 수 있었다. 투기에 따라서 강화되는 이 능력은 전투시에 꽤나 유용하다.
도플갱어가 움찔했다.
무영에 대한 공포가 다시금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태어난 즉시 수십 번을 조각내어 가루처럼 만들어버린 무영이다.
그 공포가 본능에 새겨져 있었다.
‘놈은 어리다.’
천마도, 알렉산드로도 아닌 어중간 한 놈.
힘 센 아이. 그것이 도플갱어에 대한 무영의 정의다.
조금은 의아했다.
알렉산드로 퀸타르트.
녀석이 만들려고 했던 게 고작 저런 것이었을까?
‘모든 게 변수였다. 그도 이런 결과는 짐작하지 못했겠지.’
무영 자체가 변수로 작용했다.
월하도, 천마도, 알렉산드로도 그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모두가 전부를 걸었고 그 결과 각기 다른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설마 천마가 반쪽짜리로 완성되었을 진 알렉산드로도 몰랐으리라. 하물며 그곳에 월하의 육체가 녹아들었다. 마후라가의 개입마저 있어서 거대한 혼란이 일어났다.
“죽인다! 죽인다!”
“저능아가 따로 없군.”
도플갱어가 이를 악물었다.
무영에 대한 공포심을 이겨내고자 발악을 했다.
무영은 무심하게 날개를 들었다.
빛의 아지랑이가 맺힌 날개에서 다시금 깃털이 쏟아졌다.
슈슈슈슈슈슝!
로드클래스의 스킬은 보정이 안 된다. 하지만 다행이도 가브리엘의 날개는 무(無) 등급이다. 무영의 능력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
비록 신성력은 낮지만, 도플갱어의 신체엔 독으로 작용했다.
“캬아아아악!”
쿵!
도플갱어가 괴성을 내지르며 날개를 휘둘러 무영을 쳐냈다.
퍼억!
쿠르릉!
무영이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중전은 한동안 자제해야겠군.’
공중전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하여간 맞은 부위가 제법 얼얼했지만 못 버틸 수준은 아니다.
“나는 강하다!”
도플갱어는 의기양양했다.
무영을 공격하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힘이 먹힌다는 걸 확인한 덕이다.
무려 수백에 달하는 인간과 수천에 달하는 령을 잡아먹고 키운 신체다. 아무리 무영이라도 자신을 막을 순 없었다.
후우우우웅!
콰차차창!
세 개의 스킬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사되었다.
화염과 얼음, 그리고 번개의 힘!
그것이 무영의 위로 무차별하게 쏟아졌다. 마치 우박처럼.
쾅! 쾅! 콰르르르르릉!
도플갱어의 마력은 끝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스킬이 쏟아지며 무영을 압박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모두가 조마조마해졌다.
“태양의 사자시여······!”
“우리가 도와야하는 거 아닌가?”
“우리의 공격은 놈에게 통하지 않아. 순식간에 회복되어 버리는 거 못 봤어?”
“하지만 사자님의 공격엔 회복이 더뎠지. 끼어들어봐야 방해밖에 안 될 거야.”
태양길드의 길드원 역시 강하기론 서러울 정도다.
실제로 도플갱어에게 무수히 많은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그 모두를 순식간에 회복하여서 문제다.
“젠장, 끝없이 쏟아지는군.”
“저거라도 막아보자고!”
그러나 전원이 같은 의견은 아니었다.
도플갱어의 저 쏟아 붙는 스킬이 끝나야 무영이 움직일 수 있으리라 짐작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그 선두에 선 게 김태환이다.
척결의 방패를 들고 나서선 쏟아지는 스킬을 막았다.
“끄으으으으으!”
방패와 관련된 능력치, 그리고 스킬에 전부를 투자한 김태환이다.
그럼에도 도플갱어의 공격에 계속해서 밀려났다.
사람들은 활을 쏘거나 스킬을 사용해 원거리에서 지원했다.
방패, 혹은 방어에 능한 이들은 김태환과 합류하였다.
사제와 관련된 직업들은 치유스킬을 사용하며 그들을 보조했다.
도플갱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먹이들은 얌전히 있어라!”
도플갱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먹이들 주제에 이토록 반항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도플갱어는 무영에 대한 공격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압도적으로 맛있어 보이는 게 무영인 탓이다.
“끄아아아아!”
김태환이 악바리를 질렀다.
비단 김태환 뿐만이 아니다.
“버텨! 씨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라!”
“사자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버텨야 한다!”
모든 방어가 차츰 뚫리고 있었다.
팔의 근육이 파열되고 입고 있던 갑옷이 녹아들었다.
손에도 화상을 입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자명한 상황.
“최대 3개였군.”
짙은 연기가 걷히자, 무영이 걸어 나왔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 별 다른 타격도 입지 않은 모습.
모두가 놀랐다. 도플갱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500을 넘긴 무영의 마법저항은 어지간한 스킬로는 흠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500이 넘는 마법저항을 지닌 인류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무영은 그중 1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도플갱어가 사용하는 스킬은 모두 ‘어중간’했다.
‘놈에게도 한계가 있다.’
무영은 떠올렸다.
도플갱어가 속도의 느려짐을 흉내 낼 때를.
그때도 여전히 무영이 빨랐다. 놈은 기껏해야 2배속의 세상을 가졌을 뿐이다.
또한 동시에 최대 3개의 마법밖에는 못 다룬다.
처음 모습에 눌렸을 뿐, 놈은 생각보다 만능이 아니다.
스릉!
비탄이 울었다.
그 울음은 전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다.
“······! 어디 이것도 견뎌봐라!”
멀쩡한 무영의 상태에 도플갱어가 흠칫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력한 스킬을 퍼부으면 그만이다.
도플갱어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불의 구가 만들어졌다.
불의 구는 조금씩 크기를 늘려갔다.
닿고 폭발하면 모든 걸 쓸어버릴 힘이 그곳에 담겼다.
슈아아아아앙!
이어, 불의 구가 작렬했다.
무영은 달렸다.
뿔이 두 개로 늘어났다.
4배속.
가속한 상태에서 불의 결을 보았다.
그리고 비탄을 휘둘렀다.
스악!
구가 정확히 두 개로 나뉘었다.
그대로 날개를 펼친 채 달려 나갔다.
대각선으로 도플갱어의 몸을 갈랐다.
즈아아악!
동시에 진마의 저주가 새겨졌다.
진마는 자기보다 작고 약한 마귀를 잡아먹는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도플갱어가 괴상한 비명을 질러댔다.
인간들에게 수많은 공격을 당하고서도 멀쩡했건만 갈라진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진마의 저주가 침투하여 도플갱어의 권능에 영향을 준 것이다.
키엑! 키에에엑!
소름 돋는 소리다.
반쪽으로 나뉜 도플갱어의 몸이 춤을 추듯 비틀거렸다.
그러자 곧이어 보랏빛의 기운이 도플갱어의 전신을 맴돌았다.
‘천마의 힘.’
알렉산드로의 스킬을 쓰더니, 이젠 천마의 힘마저 다루는 모양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몸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한 재생이 아니다.
도플갱어가, 둘이 되었다.
죽이는 족족 도플갱어가 늘어났다.
그 숫자가 어언 32체에 달했다.
무한히 증식하진 않고, 최대가 32체인 듯싶었다.
32체 모두 기존 도플갱어의 힘을 지녔다.
한 번에 96개의 스킬을 쏟아냈다.
“황야.”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지만, 저토록 무식하게 쏟아내면 무영도 버겁다.
물론 타격을 입어도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전과 달리, 무영은 이제 스스로 회복할 줄 안다.
‘신성한 축복’은 무영이 빈사사태에 있어도 한 번에 회복시켜주었다.
도플갱어의 재생력 저리가라 할 수준.
하루에 기껏해야 세 번이 한계지만 그만으로도 쉴 새 없이 싸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 쉴 새 없이 싸울 순 없는 노릇.
하여 결계를 발동했다.
절대자의 별과 함께 결계가 빛나며 주변을 다른 색깔로 탈바꿈시켰다.
<고유결계 ‘황야’가 발동됩니다.>
<비탄의 효과로 ‘황야’가 강화됩니다.>
황야.
그 말대로다.
주변은 온통 사막이었다.
무영은 이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다윗의 별.’
처음 푸른사원에 도착하고 그레모리의 사원을 발견했을 때의 일이다.
무영은 이 끝없이 이어진 사막 속에서 모든 걸 이겨냈다.
과거를, 자신의 한계를!
이 거친 사막은 일종의 거울이다.
본질을 보이고 시험하는 그런 장소다.
“이, 이게 뭐냐!”
“이건 내 몸이다! 꺼져라!”
“끄아아악!”
모든 도플갱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섞여있다.
그것이 한 번에 분출되듯 튀어나와 도플갱어를 괴롭혔다.
무영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놈도 그럴 수 있을까?
쉬이잉!
본체가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이곳은 황야. 무영의 결계 속이다.
무영의 허락 없이는, 나갈 수 없다.
‘이제야 너의 본질이 보이는구나.’
도플갱어의 본질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부터 본질이란 게 없으니 급조한 것일 터.
결국 이런 상황에 놓이면 극심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용서 못한다! 절대로!!”
도플갱어가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32체가 합쳐지며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만들었다.
억지로 합친 탓에 언제 무너질지 모를 만큼 신체가 흔들렸다. 마그마처럼 살점이 터지고 다시 붙기를 무한히 반복했다.
그러나 무시할 순 없다.
잡아먹은 모든 이들의 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아무리 무영이라도, 정면으로 받는 건 무리다.
“이 따위 결계 깨버리면 그만인 것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주먹이 닿자, 지면이 갈라졌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을 휩쓸었다.
무영의 뿔이 세 개로 늘어났다.
8배의 가속.
부서져 튕기는 지면의 잔해를 밟고 도약하며 순식간에 도플갱어의 근처로 다가갔다.
곧 도플갱어의 지척으로 다가가자······ 놈이 눈을 떴다.
“천마의 눈은 미래를 본다!”
도플갱어가 무영의 발목을 잡았다.
미리 알고서 행동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반응.
쾅! 쾅! 쾅!
그대로 무영을 찍어 눌렀다.
바닥에 튕길 때마다 무영의 신체가 비명을 질러댔다.
“쿨럭!”
피를 토하며 무영은 비탄으로 도플갱어의 팔을 찔렀다.
진마의 저주가 다시금 몸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끄어억!”
전기가 오르듯 놀라며 도플갱어가 무영을 놓았다.
바닥에 겨우 착지한 무영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장비의 튼튼함, 높은 체력과 마법저항. 이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죽었을 거다.
이렇듯, 황야는 양날의 검이다.
적의 본질, 적의 모든 걸 끌어내 시련을 줄 수 있지만, 반대급부로 전력을 폭발하게 만든다.
대신 저주가 훨씬 잘 통했다.
진마의 저주는 도플갱어의 몸을 침식해나갔다.
문제는 저 눈이다.
‘내 공격이 전부 읽힌다면······.’
16배속은 마지막 카드다.
고작 5초. 현실로는 0.3초.
그 안에 모든 걸 걸고, 실패하면 죽어야 한다.
그때였다.
“이 망할 년! 내 안에서 무엇을 하는 거냐! 크아아아!”
도플갱어가 혼란해 했다.
스스로의 몸을 긁고 때리며 무언가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먹이 따위가! 발악해봤자 소용없다!!”
의아한 일.
무영은 죽음의 무도를 사용했다.
눈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히아신스.’
히아신스의 기척이 도플갱어의 몸 안쪽에서 느껴졌다.
히아신스는 놈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완전히 소멸된 줄 알았건만 그런데도 끝까지 밑바닥에서 살아남아, 황야로 인해 본질이 극대화되며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히아신스는 도플갱어를 괴롭히고 있었다.
도플갱어의 눈이,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눈이 완전히 닫혔다.
‘16배속.’
기회다.
무영도 달라졌다.
네 개의 뿔을 모두 띄웠다.
공기의 움직임마저 느껴질 정도의 세계.
무영은 달렸다.
비탄이 도플갱어의 몸을 도륙했다.
하나, 열, 백······ 끊임없이 베고, 또 베었다.
불안정하게 합쳐진 도플갱어는 다시 분열도 할 수 없었다.
진마의 저주와 대천사의 힘이 깃들며 재생을 막았다.
정확히 현실로 0.3초가 지났을 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플갱어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스르르르르르!
몸이 무너져, 가루가 되었다.
< 39. 절대적인 무無(完) > 끝
ⓒ 온후#
< 40. 이단 심판관(1) >
하지만 전처럼 빠른 속도로 복구가 되진 않았다.
다만, 꿈틀거릴 뿐.
가루가 뭉치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황야가 제아무리 본질을 극대화시키는 결계라고는 하지만, 강력한 저주와 함께 결을 무수히 베였으니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영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플갱어. 반쪽짜리 천마. 월하. 알렉산드로 퀸타르트.
무율세가, 태양길드, 휘광길드.
그리고 히아신스.
모두가 읽히고설킨 일이 종장을 향해 달려왔다.
이제는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 상황.
<정의집행! 복수와 악의 처절한 징벌입니다. 신성력이 30 상승합니다.>
<‘왕 살해자’가 발동합니다. 모든 순수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27종의 왕을 살해했습니다. 앞으로 73종이 남았습니다.>
대천사와 킹슬레이어의 스킬이다.
둘 다 강한 적을 죽이면 능력치를 주었다.
특히 킹슬레이어의 경우, 100종의 ‘왕’을 죽이는 시련이 있었다. 굳이 진짜 왕이 아닐지라도 그만한 고유의 존재를 없애면 같은 효과가 나온다.
이제 27종. 마신의 영역을 건너며 수많은 괴물을 사냥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얻은 건 능력치만이 아니다.
<마후라가의 전승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지옥도(地獄道)’가 열렸습니다.>
<정복률 – 0%>
지옥도!
아수라도 다음의 계층.
육도 중 하나이며 가장 끔찍한 원령들이 사는 곳이다.
일순 무영의 눈앞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어둡고, 질척하며,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하지만 지옥도엔 주인이 없다.
아수라도가 세 군주에 의해 일통되었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단지 강함에 의해 급수로 나뉘어있을 따름이다.
9급부터 1급까지.
당연히 1급에 가까워질수록 강한 원령이다.
동시에 무영이 가진 망령들도 나뉘어졌다.
<사용자 ‘무영’이 가진 망령들을 힘에 따라 분류합니다.>
<4급 – 멀더던>
<6급 – 42마리>
<7급 – 555마리>
<8급 – 1,544마리>
<9급 – 3,787마리>
멀더던조차 4급에 불과하다.
칼라나 타칸쯤은 되어야 겨우 1급, 내지 2급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아수라도는 약간의 편법에 의해 루키페르마저 삼킬 수 있었지만, 지옥도는 전혀 다르다.
원한에 사무친 악령들이 즐비 하는 곳.
아마도 멀더던의 힘만으로는 정복이 불가할 것이다.
‘나중에 시간을 내야겠군.’
무영은 루키페르에 의해 혼을 나누는 법을 배웠다.
지옥도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는 말.
하지만 이는 후의 일이다.
당장은 눈앞에 있는 것을 얻는 게 더 급했다.
무영은 천천히 몸을 낮췄다.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권능포식자.’
루키페르의 권능!
상대의 권능을 포식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힘.
저항하지 못하는 지금이라면 어느 때보다 쉽게 포식을 행할 수 있을 터.
푸른 손이 튀어나와 도플갱어의 잔해를 뒤졌다.
<‘권능포식자’가 발동됩니다.>
<도플갱어의 권능 중 하나를 가져옵니다.>
무엇을 가져올까?
이번만큼은 무영도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식하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루키페르는 진즉에 다시 신위를 되찾았을 것이다.
게다가 권능은 힘이고 도플갱어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힘의 폭주에 무영의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슈아악!
푸른손의 손바닥에서 입이 생겨나고 가루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무작위의 권능을 손에 넣을 수 있으나 도플갱어의 권능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
당장 무영이 파악한 숫자만 해도 네 가지.
초회복, 빠른 학습, 분열, 그리고 천마의 눈!
<불멸왕의 힘, ‘일곱 번의 시련’을 포식하였습니다.>
일곱 번의 시련?
무영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미 푸른 손의 권능포식자는 사라진 뒤였다.
상태창 시계를 돌렸다.
그리고 스킬란에서 같은 이름의 권능을 찾았다.
스킬명칭: 일곱 번의 시련(無)
설명 – 불멸왕은 가장 위대하고 어려운 일곱 개의 시련을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일곱 개의 생명을 얻었다.
* 남은 생명: 7
* 부활할 때마다 중요한 것을 잃는다.
무영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부활이라니!
초회복조차 아니다. 말 그대로, 이름 그대로의 효과.
죽음을 역행하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권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과거 수많은 암살대상의 시계를 빼앗고, 관련 된 문서 따위를 보면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은 이름이었다.
마계는,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살아간다.
그게 상식이었다.
헌데······.
‘도플갱어의 권능은 아니다.’
도플갱어에겐 초회복이 있었다. 죽어서 부활을 한 게 아니라 스스로의 시간을 돌려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이건 누구의 권능이란 말인가?
‘천마.’
정확히는 요정왕이다.
조금이지만 요정왕의 진실한 정체에 다가간 느낌이었다.
치지지지지직!
도플갱어의 잔해가 색깔과 힘을 잃었다.
이내 그냥 무른 흙처럼 되어버렸다.
운이 좋았다.
‘부활을 꾀했을 수도 있겠군.’
만약 이 권능을 빼앗아오지 못했다면 아예 부활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리라.
초회복에 부활까지 가지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절대 죽지 않는 조합이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곱 개의 생명이라······.’
한 번 부활을 꾀할 때마다 ‘중요한 걸 잃는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감안해도 죽음을 일곱 번이나 면책할 수 있다는 메리트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무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과거에도 찾지 못한 힘. 누구도 갖지 못한 그러한 권능!
부활의 권능을 가진 마신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능히 이것의 사기성을 알 수 있다.
“벽이 걷힌다!”
“시련이 끝났다!”
황야의 지속시간이 끝나자 주변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대도시를 가뒀던 벽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시련이 끝난 것이다.
<‘천마의 시련’이 종결되었습니다.>
<순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사용자 ‘무영’의 영향력은 현재 ‘1위’입니다.>
<보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의 신발, 광전사의 투구, 무릉왕의 부채, ······.>
*
―시련의 중첩이라.
―진정한 불가해이지 않은가?
―우리가 줄 수 있는 보상의 범위를 넘어섰다.
―게다가 그는 이미 세 개의 클래스를 얻었지. 그의 혼에 새겨 넣을 마지막 클래스 자리를 두고 꽤 많은 신경전이 오갈 것 같은데.
―아니, 12궁도 중 세 개를 모았지 않나? 차라리 12궁도를 전부 모으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시련의 중첩이라지만, 결국 하나로 인식되어있다. 줄 수 있는 건 많아야 두 개 정도다. 그 이상을 주면 세계의 법칙을 깨야한다.
―우리가 소멸을 각오하고 주지 않는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인가······.
―현재의 그는 가장 유력한 후보지만 사실 지금도 너무 많은 것을 단기간에 가져버렸다. 이대로 무언가를 더 준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티질 못한다.
―순수한 능력이 너무 낮아. 이 상태로 마신들의 눈에 띄게 되면 반드시 죽겠지. 초월체가 되는 순간 세계의 눈이 그에게 향할 테니, 어렵군.
―그렇다면 차라리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걸 주는 게 낫겠군.
―필요한 것이라면?
―대지의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준 것이 있지 않나.
―설마?
―으음, 그게 있었군.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자칫 잘못했다간 주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진대.
―그건 그의 노력여하에 따라 달려있겠지. 이 이상은 우리의 소관을 떠난 일이다. 더 이상의 관여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아.
―우리는 이면이며 균형자이니.
―그나저나 킹슬레이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든 산의 주인, 용들의 왕, 죽음의 군주······ 그들을 찾아갔더군.
―대체 무슨 이유로?
―세계의 이변을 묻고자. 우리도 느끼지 않았던가? 대략 1년 전에 말이야.
*
<불가해의 영역을 탐험한 자여!>
<이면의 주인들이 사용자에게 ‘대조화’를 선물합니다.>
대조화라 불리는 물건은 작은 푸른색의 구슬이었다.
뾰롱! 뾰로롱!
일순 무영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아름과 요람의 요정이 반응하였다.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이.
명칭: 대조화
등급: 무(無)
설명 – 대지의 어머니. 조화의 신이 직접 만든 구슬. 비틀린 모든 걸 바로잡으며 조화롭게 유지하는 힘이 담겨있다.
이윽고 구슬이 무영의 손을 통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쏘오옥!
찰나 간에 벌어진 일.
“음······.”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효과도 없었다.
‘즉발성은 아닌 모양이군.’
이면의 주인들이 준 물건은 모두가 쓸모가 있었다.
이 역시 그러할 터.
무영은 약간의 의심을 하면서도 크게 경계하진 않았다.
이어 무영은 등을 돌렸다.
전쟁이 끝났으니, 그 뒤처리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런 무영의 등 뒤로 검은 색의 날개가 아주 약간이지만 돋아나기 시작했다.
*
알렉산드로와 히아신스의 혼은 함께 있었다.
천마의 몸 안에서 공존하며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히아신스는 알렉산드로의 영혼이 뿜어내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목적과 이야기를.
“돌아가고 싶다.”
알렉산드로가 막 마계로 도착했을 시절.
그는 갈망했다.
푸른사원에서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마계가 강자존이라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돌아가고 싶다.”
이런 세상은 싫었다. 하지만 살아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러다 보니 태양길드의 주인이 되어있었다.
결혼을 하고, 많은 자식도 낳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의 공허함은 여전히 사라지질 않았다.
그 와중 월하를 만났다.
천마신교의 교주. 기묘한 남자.
“이 모든 게 신의 농간이다. 신의 힘이 있다면 모든 걸 행할 수 있지. 죽음도 초월하며 세계도 넘나들 수 있다!”
실제로 그러했다.
천마는 죽어도 살아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었다.
처음 보고 겪는 힘에 알렉산드로는 전율했다.
세계간의 이동 역시도 가능하였다.
천마가 보여준 미래. 알렉산드로는 지구에 있었다.
하지만, 천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월하는 천마를 완성시키고자 했다.
그때부터 알렉산드로는 계획을 세웠다.
완성된 천마의 힘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계획을.
성공한다면,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다른 중요한 이들이 죽어도 살릴 수 있다.
죽음과 세계를 초월하는데 뭐가 대수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위험한 도박을 행하였다.
평소라면 더욱 깊이 생각했을 것이나,
“돌아가고······ 싶구나.”
염원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하지만 천마의 안에 들어와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천마는 반쪽짜리다. 진정한 의미로 죽음을 초월한 게 아니었으며, 세계간의 이동도 불가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알렉산드로는 허탈해졌다.
모든 걸 걸고 잃었건만 그게 한바탕 꿈이었다니.
천마가 진정으로 완성되었대도 알렉산드로의 꿈은 애당초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그래도 너만은 살아남거라. 나의 딸, 히아신스.”
동시에 알렉산드로의 눈이 히아신스에게 닿았다.
꿈틀!
모두가 사라진 뒤.
가루는 바람에 흩날렸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 정말 작은 조각. 그 하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조각은 조금씩 몸집을 불렸다.
이내 작은 소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누구지?’
발가벗은 소녀는 고민했다.
‘난······ 히아신스. 히아신스······.’
하지만 이름 외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 40. 이단 심판관(1) > 끝
ⓒ 온후#
< 40. 이단 심판관(2) >
띠링.
불현 듯 종소리가 들렸다.
히아신스는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의 옷을 입은 수많은 행렬들.
하얀 두건과 손엔 종을 든 무리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커다란 그림 하나를 거구의 남성 두 명이 옮기는 중이었다.
구름과 바다와 태양의 그림.
그리고 그 셋의 위엔 한 인자한 어머니가 있었다.
띠링. 띠링.
종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이어 순백색의 투구를 걸친 여인이 하얀 말을 탄 채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로군. 이 작은 소녀에게서 짙은 꽃의 향기가 나는구나.”
여인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여인은 히아신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뗄 수가 없었다.
조금씩 다가가 히아신스의 얼굴을 만졌다.
머리의 냄새를 맡고, 다시금 히아신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여인은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다.
“매혹의 향!”
흔히들 서큐버스가 가지고 있다는 매혹의 향.
그러나 히아신스에게서 풍기는 건 질 자체가 다르다.
모든 걸 아우르는 압도적인 향이었다.
맡는 순간 더 가까이 가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진다. 육체를 잘라내서라도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욕망이 절로 생겨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여인에게는, 이러한 향이 통하지 않아야 했다.
“구름의 신 ‘순’, 바다의 신 ‘륭’, 대지의 신 ‘한’, 그들 셋의 어머니 ‘이데아’시여, 불쌍한 양을 인도하소서.”
띠링. 띠리리링.
여인의 주변으로 수많은 종들이 생겨났다.
정화의 의식이다. 향에 매료되어 일순 잘못을 저지를 뻔한 의식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누구세요? 혹시 저를 아세요?”
히아신스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궁금증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 모든 기억과 관련하여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여인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어찌 이런 존재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여인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정화의 의식을 행했음에도 흔들린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선 안 되는 일.
여인은 신성도시 뮬라란의 이단 심판관이었다.
이단을 심판해야 하는 성스러운 몸으로서 이 일을 간과할 순 없었다.
‘죽여야 한다.’
여인이 등 뒤에서 거대한 검을 꺼냈다.
소녀, 히아신스에게 악한 감정은 없었다.
악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향과 체취는 모든 걸 마비시킨다.
자신에게마저 이 정도로 작용한다면 다른 이들은 불 보듯 뻔하다.
감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리라.
“사, 살려주세요.”
히아신스가 겁에 질렸다.
그 순간.
여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종이 사라졌다.
종소리도 죽었다.
‘죽여야······.’
여인은 손에 힘을 조금씩 잃어갔다.
툭!
이내 검이 떨어졌다.
처음엔 서큐버스들이 가진 매혹의 향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맡으면 맡을수록 왜인지 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판단할 수 없다고.
“······ ‘거룩한 천’으로 너의 향을 덮겠다. 너는 스스로의 향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천을 벗지 못하리라.”
여인은 히아신스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대신 품에서 삼각형의 종을 꺼냈다.
디링!
종이 울리자, 하늘에서 몇 겹의 천이 내려왔다.
그리곤 히아신스를 감쌌다.
오로지 여인에게만 허락 된 성신구. 거룩한 종과 천이다.
모든 삿된 것을 막아낼 수 있는 보구 중의 보구!
“세라피나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여인의 주변으로 성기사들이 달려왔다.
여인, 세라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를 안전하게 뮬라란으로 이송해라. 결코 중간에 일이 생겨선 안 된다. 알았나?”
“이 천은······.”
“더는 묻지 말고, 절대 천을 벗겨서도 아니 된다. 곧장 성황님께 보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알겠습니다.”
세라피나가 재차 강조하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선인지 악인지는 뮬라란에서 결정이 날 것이다.
기사들이 천에 싸인 히아신스를 조심스럽게 데려갔다.
그 뒷모습을 세라피나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성황께선 올바른 판단을 내리실 것이다.’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소녀.
신이 보낸 것인지 악마가 보낸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황이라면 옳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나저나 악의 기운이 너무나도 강하구나.’
이어 세라피나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지평선 너머엔 대도시가 있었다.
*
‘천마의 시련’에서 무영이 택한 보상은 아이작의 신발이었다.
기존에 사용했던 헤르메스의 장화 같은 경우, ‘가속’이란 옵션이 달려있었지만 무영의 뿔이 네 개가 된 시점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현재 무영이 가진 무구 중 가장 먼저 갈아 끼워야 할 대상이 된 것인데 마침 천마의 시련을 해치우며 눈이 가는 보상이 떠오른 것이다.
‘과거 인류와의 전쟁에서 죽었던 마왕의 것이었지.’
아직 무영이 마계에 소환되지 않았을 무렵.
인류는 마왕들과의 전쟁을 벌였다.
그중 아이작은 최상위급의 마왕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엄청난 희생 끝에 소멸되었고, 그 무구도 함께 사라진 걸로 안다.
그게 왜 보상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0년 후의 대혼돈. 이후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무영은 재차 생각했다.
대혼돈이 일어나고 인류가 모두 소환되거든 파벌싸움을 끝낸 마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들은 조금씩 전선을 밀리고, 내부의 싸움으로 조금씩 몰락해간다.
‘여기서 찾은 건 운이 좋았다.’
하여간 아이작이라면 마왕들 중에서도 급이 달랐다.
마왕이라고 모두 같은 급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까.
무영은 아이작을 본 적도 없고,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지만 당시의 무위에 과장이 없다면 충분히 기대해볼만 하다는 뜻.
명칭: 아이작의 신발
등급: S
분류: 장착형
내구: 150,000
효과: 마왕 아이작의 유품.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있다.
* 체력+30
* 민첩+30
* 지혜+50
* 악성향+50
* 블링크(지능과 지혜에 비례한 이동거리)
능력치는 준수했다.
한 가지를 너무 높게 올려주는 것보단 이처럼 골고루 올려주는 편이 전체적인 균형 면에선 더욱 낫다.
악성향을 더 올린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그 다음 특수능력인 ‘블링크’에 눈이 갔다.
블링크.
순간이동형 스킬이다.
알렉산드로가 사용했던 것처럼 먼 거리의 이동은 힘들지만 눈에 보이는 정도의 거리는 순식간에 접어 달릴 수 있었다.
하물며 사용횟수에 제한도 없으니······.
지칠 때까지 사용하여 유리한 고지를 꿰찰 수 있다는 의미.
‘이동형 능력이 붙은 무구는 꽤 희귀한 편이지.’
이동형 능력이 붙은 무구 중에 능력치가 준수한 것도 거의 없었다.
무영이 알기로는 그렇다.
보통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아이작의 신발은 두 가지를 모두 잡아낸 것이다.
일반 가죽장화와 외형의 차이는 없었지만 착용하자 힘이 솟아올랐다.
‘괜찮군.’
알아서 사용자에게 맞도록 크기가 조정되고, 전신에 검은 기운이 물씬 올라온다. 악성향이 더욱 오른 영향이다.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등 뒤의 검은 날개도 더욱 커졌다.
‘대조화를 흡수한 뒤 검은색 날개가 점점 커져간다.’
무영은 태양길드의 성에 앉아 인상을 구겼다.
처음엔 인식조차 못했다.
그러나 삼일이 지난 지금은 어지간한 어른 몸통만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색 날개가 점차 커져만 갔다.
이 날개는 가브리엘의 날개처럼 숨길 수도 없었다.
덕분에 본의 아닌 ‘악마설’마저 떠돌아다닐 지경이다.
‘두 쌍의 날개라······.’
검은 한 쌍의 날개 외에, 가브리엘의 날개를 펴면 도합 두 쌍. 네 개의 날개가 완성된다. 가브리엘의 날개가 위쪽이고 검은 악마의 날개가 아래쪽이다.
쯧!
혀를 찼다.
지금 무영은 대도시에 있었다.
복원된 태양길드의 성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고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죽고, 레논도 죽고, 히아신스도 죽었기에, 태양길드는 대부분의 구실점을 잃었다.
그나마 부길드마스터 압둘론의 존재로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허나 여기서 무영마저 떠나간다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리라.
그래. 지금의 태양길드는 모래성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필요악이다.
대도시는 푸른사원과 연결되는 장소.
이곳을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게 태양길드인 탓이다.
태양길드가 무너지면, 이곳은 난장판이 된다.
온갖 다른 거대 조직들이 대도시를 집어삼키고자 달려들 것이었다.
초보자들의 안위 따윈 무시할 게 뻔했다.
‘태양의 인장.’
무영은 과반수의 인장을 갖고 있었다.
인장은 길드를 상징하는 중요한 힘.
마음먹기에 따라서 태양길드를 휘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순 없다.’
무영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인장을 갖고 있다지만, 길드마스터의 자리를 꿰차려거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차츰 토지를 다져온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니.
정통한 구석이 있는 태양길드의 길드원들 대부분이 반발할 게 뻔했다.
설령 사자로 취급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럴 바엔, 원하는 것만을 취하고 적당히 움직이는 게 낫다.
‘정보와 인재.’
태양길드를 돕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태양길드의 그 필요성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만 해줄 생각이다.
이후 정보와 인재들을 손에 넣은 뒤 마신의 영역으로 떠나는 게 무영의 목적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쿵!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오스카가 들어왔다.
“무, 무영님! 큰일 났습니다!”
오스카는 멀린의 제자다.
1년 만에 도망치긴 했지만, 한 번 주먹다짐을 하니 제법 말길을 알아들어서 비서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뮬라란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이단 심판관이 왔답니다!”
뮬라란?
무영은 미간을 좁혔다.
신성도시에서 이곳엔 웬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이단 심판관이 무영님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오스카도 마계의 지식은 적당히 있었다.
멀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주입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신성도시 뮬라란이나 그곳의 이단 심판관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안다.
이단 심판관에게 잘못 걸리면 어지간한 도시 하나가 날아가는 건 예삿일이다.
뮬라란의 이단 심판관은 고작 일곱.
그 일곱 명은 능히 거대집단 하나의 힘을 갖고 있었다.
“제가 분장하고 나갈까요? 이러다가 마녀사냥이라도 당하면······!”
오스카의 눈이 무영의 등으로 향했다.
검은 날개.
그것을 본 이단 심판관이 무슨 생각을 할 지는 뻔하다.
하지만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왔다면 피할 수 없다.’
아직 대도시에서 해야 할 게 전부 끝나지도 않았다.
확실한 정보를 탐하고, 재능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일.
그들을 마신의 영역으로 데려가야 한다.
주기적으로 그게 가능하도록 조치도 취해놔야 했다.
더불어서 ‘살수림’에 대한, 알렉산드로만이 알고 있던 정보들을 반드시 열람해야 했다.
알렉산드로만큼 살수림과 접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므로.
무영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무영이 물었다.
“이단 심판관의 이름이 뭐지?”
“세라피나라고 하던데요?”
세라피나!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세라피나라면 이단 심판관 중에서 그다지 꽉 막힌 측은 아니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가 되면 전투가 불가피하겠지만, 당장 뮬라란과 척을 지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니 상대가 과하게 나오지만 않는다면 적당히 손님으로 맞이해줄 용의는 있었다.
< 40. 이단 심판관(2) > 끝
ⓒ 온후#
< 40. 이단 심판관(3) >
이단 심판관의 악명은 마계에서도 자자하다.
하여 이단 심판관이 나타나는 장소에서 긴장하지 않는 도시의 주인은 없다.
그것이 아무리 거대한 조직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신성도시 뮬라란을 단순 종교가 아닌 조직, 집단으로 보자면 단일 대상으로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비록 아홉길드, 오대세가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들조차 무시할 수 없는 게 바로 신성도시 뮬라란이었으니.
예전, 10강의 의미가 ‘마왕을 상대하고 처단할 수 있는 자’에 국한되었을 때, 대부분의 10강은 뮬라란에서 나왔다.
신의 힘을 받드는 그들은 능히 마왕을 홀로 상대했던 것이다.
지금은 10강의 의미가 변질되어 뮬라란 사제들의 이름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과거의 그 위명은 지금도 남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단 심판관에게 된통 걸려 사라진 도시가 열 곳이 넘을 정도다.
“뮬라란에서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도시는 만들어질 수 없어요.”
김태환의 옆에서, 한 용병이 말했다.
김태환은 여전히 용병무리와 섞여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라면 그들의 어깨에 놓인 자수다.
휘광길드의 자수가 용병들의 어깨에 놓여있었다.
태양길드와의 회합, 시련에서의 활동에서 김태환은 높은 점수를 받았고 이처럼 하나의 대(隊)를 창설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덕이다.
대장은 당연히 김태환이었으나 그다지 위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석에선 편하게. 공적인 자리에선 공손하게.
“왜?”
김태환이 묻자 시원하게 생긴 남자가 답했다.
“대장, 도시가 만들어질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주변 괴물의 씨를 말리는 겁니다. 하지만 괴물이란 건 죽으면 체취를 남기거든요. 악마의 긴 밤이 되면 악마를, 아니면 더 강력한 괴물을 불러오기 마련이죠. 그래서 축복이 필요한 거고요.”
“축복이 그들을 막아준다?”
“뭐, 비슷합니다. 사제들이 제단을 세우고 신의 축복을 바라면 적어도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괴물은 거의 없어지니까요. 축복이 없으면 하루에도 수백 마리가 쳐들어올 텐데, 대장 같으면 그런 곳에 있고 싶겠수?”
“잠도 제대로 못 자겠군.”
김태환도 납득했다.
하루 수백 마리.
대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적어보이지만 빈도의 문제다.
시도 때도 없이 괴물이 나타나는데 그런 장소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사람들을 떠나기 마련이고 도시는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질 것이다.
“이 축복이란 건 1년에 한 번은 해줘야 하거든. 모든 도시와 그곳의 주인이 뮬라란이라면 꿈쩍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죠.”
성의 바깥.
남자의 시선이 길가로 향했다.
김태환도 같이 움직였다.
뮬라란의 사제들은 휘광길드에도 찾아왔다.
대도시에 입성한 사제의 숫자가 물경 일만.
숫자보다 그들의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저 쳐다볼 뿐인 김태환이 침을 꿀꺽 삼킬 정도.
“대장. 그거 압니까? 뮬라란의 여사제들은 그곳에도 성수를 바른대요.”
남자가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다른 이들도 킥킥 거리며 작게 웃었다.
김태환이 맡은 일은 성문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나름 엄중한 분위기라 작은 소리에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이 김태환과 무리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닥치고 일에 집중해라.”
“예이~ 대장.”
위치가 사람을 만든 것인지 용병들도 더 막나가진 않았다.
‘이단 심판관은 보이지 않는군.’
고위 사제가 휘광길드를 찾기는 했지만, 이단 심판관은 없었다.
따로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 중이라고 하였던가.
‘형님.’
하지만 무영을 떠올리면 불안해지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무영에게선 악한 기운이 많이 난다. 척결의 수호자인 김태환은 남들보다 더욱 그런 것에 민감했다.
특히 검은 날개는 악한 기운의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것을 이단 심판관이 본다면?
둘 중 하나는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장. 최근 소문 들었습니까?”
일에 집중하던 때, 다시금 서늘하게 생긴 남자가 작게 말했다.
이번엔 기밀을 이야기하듯 김태환의 귀에 대고선 말이다.
“무슨 소문?”
“태양길드의 총사령관 있지 않습니까? 지금 한창 절정의 인기를 구가중인 그 사람이요.”
무영의 이야기였다.
“있지. 문제라도 생겼나?”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라고 하더군요.”
“되도 않는 소문이군.”
김태환은 일축했다.
푸른 사원에 있을 때부터 무영을 봐왔다.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건 아니었다.
“버그라는 사람이 무영 총사령관이 도깨비와 괴물들을 이끄는 걸 봤다는데요?”
“잘못 본 거겠지.”
“그 사람, 언령술사랍디다. 언령술사는 거짓말 못 해요.”
언령술사라.
그렇다면 조금의 신빙성은 생긴다.
말로 내뱉는 힘. 거짓을 말할 경우 언령의 힘은 약해진다.
하여 그들은 확신이 들기 전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 버그라는 사람. 어디에 있는지 아나?”
“제가 이래봬도 정보통 아닙니까. 당연히 알죠.”
“잠시 외출 좀 같이하지.”
대도시는 삼엄했다.
정확히는, 태양길드와 관련된 자들이 가시를 돋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단 심판관과 사제들에게 묘한 적대감을 드러냈고 심심하면 시비도 걸었다.
“왜 남의 집 구석을 안방처럼 돌아다니고 지랄이야?”
“저놈들 면상을 보니까 입맛이 싹 달아나는군.”
콰앙!
술집에서 가게의 식탁보를 박살내며 청년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반면 식사를 하던 성기사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스프와 빵을 먹었다.
김태환은 그 꼴을 보곤 작게 턱을 쓸었다.
”흠······.“
“감화된 유망주들이군요.”
“유망주들?”
“2세대 있지 않습니까. 마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애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태양길드의 총사령관에게 꽤 감화되었다고 합디다.”
“별난 일이군.”
푸른사원을 막 벗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유망주들이라 칭해지는 아이들은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철저하게 살인기계로 키워지는 것만 같았는데, 감화라니.
그것도 무영에게 말이다.
“태양의 사자. 악마설. 괴물 사냥꾼. 유일무이한 1강······ 그런 소문이 그 사람을 거의 신격화시키고 있지요. 압도적인 힘과 적당한 소문은 아이들을 감화시키는 법이고요.”
그건 그렇다.
확실히 김태환이라도 감화되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술집 구석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이를 발견하곤 손뼉을 쳤다.
“아, 저기 있네요. 대장.”
김태환은 조금씩 걸어갔다.
버그. 이름이 굉장히 특이했다.
그는 혼자 있었고 전신에 붕대를 감았다.
느닷없는 둘의 출현에, 버그가 고개를 돌렸다.
“저한테 용무가 있으십니까?”
“‘그’ 건으로 찾아왔습니다. 크게 이야기할 거리는 아닙니다만.”
김태환이 말했다.
버그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입니다. 그는 도깨비에요.”
“근거가 있습니까?”
“그는 도깨비의 왕, 움입니다. 모든 도깨비들을 아래에 둘 수 있는 자.”
움?
처음 듣는 단어다.
하지만 무영이 도깨비의 왕이라니.
버그가 이어서 말했다.
“믿기시지 않겠지만, 저는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다루지요. 지금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다지 악의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순수한 호기심.
“또한 그는 별의 주인입니다.”
별의 주인!
실제로 별의 주인이 된 자들은 적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떨친다.
대개 소설로 치자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비록 과거 마왕들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스러졌다지만 그 위명은 익히 들었다.
헌데 무영이 도깨비의 주인이면서 별의 주인이란다.
1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버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사실 도깨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의 정체가 정말 궁금합니다. 이번 이단 심판관이 어떠한 판결을 내릴지 그래서 지켜보고 있지요.”
“판결을 내린다니요?”
“공공 연연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흠······ 소리 차단.”
순간 주변의 소리가 차단됐다.
성기사들의 눈과 귀가 있음을 인지한 탓이다.
말로 이루는 것. 이것이 언령술사의 힘이었다.
“이단 심판관이 대도시에 병력을 이끌고 온 게 이곳에서 발생한 시련 때문이 아니라 태양길드의 총사령관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김태환의 어깨가 들썩였다.
모두가 시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천마의 시련. 이름부터 불길하지 않나.
하지만 애당초 무영을 노리고 왔다면 관점자체가 달라진다.
버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예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검은 날개를 가진 남자가 이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예언이요.”
공식선상.
무영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모든 게 공개된 투명한 장소에서 세라피나를 만났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겠냐는 계산도 있었다.
“저 사람이 총사령관?”
“오오······ 총사령관이다!”
짝짝짝!
넓은 공터.
성기사들과 태양길드의 병력들이 사람들을 막았다.
그곳엔 이미 수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 대부분이 무영에게 닿았다.
태양길드에선 사자라고 칭하는 자.
그를 이단으로 심판한다면, 태양길드와는 아예 척을 지자는 뜻이다.
그것도 공식선상에서 그리한다면 외교적 문제가 더욱 커진다.
세라피나는 투구를 벗었다.
찰랑이는 분홍색의 머릿결이 허리까지 닿았다.
뮬라란의 사제들은 모두 미모가 곱다. 신의 축복이라는 이름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몸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이, 무영의 날개에 박혔다.
검은 날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것!
‘루키페르. 잠시 꺼져 있을 순 없나?’
무영이 루키페르의 혼에 말을 걸었다.
하지만 루키페르는 묵묵부답이었다.
애당초 혼이 동화되어 있으니 꺼질 수도 없다.
말장난.
아직도 루키페르와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허나 마냥 장난이라 할 수도 없었다.
세라피나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둘은 조용했다.
무영도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고, 억지로 대화를 주도해나가는 타입도 아니었다.
반면 세라피나는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악마······.”
작은 두 덩이의 입이 열렸다.
결국 말했다.
태양길드 쪽의 모든 사람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슬쩍 검에 손을 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라피나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악마의 힘이 당신에게서 느껴집니다.”
“악마가 이런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걸 보았나?”
타락한 천사 루키페르.
그의 영향으로 더욱 커진 날개는 일반 악마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둠의 이면엔 과거 천사였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세라피나가 모를 리는 없었다.
“당신은 위험한 악마입니다.”
아예 악마라고 단정을 지은 듯싶었다.
하기야 무영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선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스릉!
세라피나가 등 뒤의 대검을 꺼냈다.
모든 성기사들이 무기를 꺼냈다.
태양길드도 마찬가지였다.
명령. 혹은 신호가 보내지면 이곳은 다시 전쟁터가 될 것이다.
무거운 긴장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 사이에서, 무영은 피식 웃었다.
‘가브리엘의 날개.’
그리고 다른 날개를 펼쳤다.
파악!
바람을 가르며 펴진 날개는 무엇보다 신성했다.
비교할 바 없는 순백이었으며 농도 짙은 신성력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세라피나의 눈에 작은 떨림이 일어났다.
< 40. 이단 심판관(3) > 끝
ⓒ 온후#
< 40. 이단 심판관(完) >
악마다. 이단이다. 검은 날개다.
무영은, 태양길드의 총사령관은 더할 나위 없는 ‘악’ 그 자체였다.
자체여야만 했다.
이단 심판관이 행하는 일은 하나.
악을 배제하는 것!
세라피나는 일곱 대천사 중 하나인 세라핌의 이름을 딴 세례명이다.
신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존재. 신의 옥좌에 가장 가까운 천사!
그 신을 부정하는 게 ‘악’이다.
그리고 악의 집합체와 같은 무영은 당연히 배제해야할 대상이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꺼림칙한 기운.
안에 깃든 강렬한 악을.
전신에서 소름이 일었다.
여태껏 보았던 어느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것을 보기 좋은 포장으로 가리고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재주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천사의······ 날개.’
마계엔 천사가 없다.
아무리 찾고, 울부짖어도, 천사는, 신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신앙을 유지했다.
신성력.
신에게 하사받은 성스러운 힘.
그들은 그저 그 힘을 받아 천사의, 신의 모습을 상상할 뿐이었다.
리틀 위시가 그러하다. 사용하면 나타나는 천사는 상상의 산물이었다. 진실한 천사가 어찌 생겼는지, 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들은 모른다.
성녀도, 성황도, 어느 누구도.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날개가 나타났다.
신성력이 듬뿍 담긴 천사의 날개가······.
단순한 스킬인가?
세상엔 수많은 스킬이 있었고 천사의 날개를 모방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스킬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것과는 그 기운이 궤를 달리한다.
날개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도 차원이 다른.
‘이 역시 거짓이고 현혹일지니.’
세라피나는 부정했다.
악과 선은 공존할 수 없다.
그게 상식이다.
무영의 날개는 두 쌍이었다.
아래쪽에 악이, 위에 선이 존재한다.
이율배반······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악마야. 거짓된 모습으로 내 눈을 어지럽히지 마라!”
종을 꺼냈다.
거룩한 종!
삿된 힘을 부정하고 거둬내는 능력이 거룩한 종엔 담겨 있었다.
종이 울리면, 무영의 진실 된 악이 튀어나오리라 세라피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디링!
디링!
종이 울렸다. 수많은 빛의 종이 생겨났다.
그 소리를 들은 모두의 눈이 풀렸다. 절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성기사들도, 태양길드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름의 신 ‘순’, 바다의 신 ‘륭’, 대지의 신 ‘한’, 이들 셋의 어머니 ‘이데아’시여······.”
뮬라란이 모시는 신은 넷.
그리고 거룩한 종은 전신인 이데아의 선물이다.
마왕도 피한다. 마신조차 정면에서 받고는 견뎌낼 순 없으리라!
세라피나의 눈이 무영에게 향했다.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악이 반응했기 때문일까?
이곳에서 자신이 진짜 ‘악’임이 증명되면 그는 살아나갈 수 없다.
필사적으로 감추려 들 테지.
하지만, 세라피나의 그런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웃기지도 않은 장난이로군.”
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인상을 굳힌 채.
종의 기운은, 무영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도리어······.
<‘거룩한 종’의 소리에 ‘가브리엘의 날개’가 반응합니다.>
<정화는 정의의 힘입니다. 거룩한 종의 신성력을 흡수합니다.>
<신성력이 ‘30’ 증가했습니다.>
날개가 신성력을 먹었다.
갑자기 왜 반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거룩한 종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뜻일 터.
덕분에 날개가 더욱 커졌다.
루키페르의 기운이 너무나도 강성한 탓에 제대로 기를 못 펴던 신성력이, 조금이지만 활로를 찾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룩한 종’의 소리에 ‘루키페르의 날개’가 반응합니다.>
<루키페르의 영향력이 축소됩니다.>
<‘대조화’에 의해 악성향과 신성력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공허의 날개’가 새로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회색의 날개가 가운데에 돋아났다.
그 크기가 매우 작지만, 이로써 세 쌍.
“어, 어떻게?”
세라피나는 놀랐다.
가브리엘의 날개가 무영과 종을 감싸 안은 것이다.
무영이 무엇을 하던 그것은 ‘정의’다.
악과의 조화? 천사라면 마땅히 타락하겠으나, 가브리엘은 결코 타락하지 아니한다.
대신 그 중심에 날개 하나를 더 피워 균형을 맞췄다.
그것이 공허의 날개.
하지만 무영은 이 현상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몸의 변형은 새로운 적응을 이야기한다.
적응하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 그리고 경험이 필요하다.
“네 눈엔 내가 아직도 악으로 보이는가?”
이 존재가 정녕 이단이라고?
세라피나는 혼란에 휩싸였다.
거룩한 종이 인정했다. 그는 악이 아니라고.
그의 날개는 진짜이며, 그의 신성력은 누구보다 고결하다고.
하지만 그에게선 분명히 악의 향기가 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건만.
슈아악.
바람이 불었다.
가브리엘의 날개는 한창 팽창하더니 주변에 깃털을 흩날렸다.
깃털이 바닥에 닿자 죽어있던 땅에서 풀이 자랐다.
꽃이 자라고, 아름다운 냄새를 풍겼다.
이것이 진정한 신성력의 힘이었다.
“사자시여!”
“아아!!”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눈물을 흘렸다.
신이 드디어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주셨다.
이 마계에, 악마뿐이 없는 세상에 희망을 주었다!
이단 심판관이 그를 증명한 꼴이다.
태양길드의 전원이 무영에게 예를 표했다.
진정으로 거룩한 존재에게 보내는 경의였다.
심지어, 몇몇 성기사와 사제들조차······.
“속지마라! 너희는 눈앞에 저 검은 날개가 보이지 않느냐!”
세라피나는 대검을 들었다.
덜덜덜!
하지만, 세라피나의 손이 심하게 떨리는 걸 무영은 알았다.
전의 따윈 가브리엘의 날개를 본 순간부터 없었다.
무영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무조건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뮬라란을 등에 엎고 있는 세라피나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세라피나의 주먹을 맞잡았다.
“아······!”
세라피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영은 세라피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직도 악으로 보이는가?”
검은 날개를 지닌 남자가 세계를 파멸시킨다.
하지만 남자는 검은 날개만을 지니지 않았다.
하얀색과 회색의 날개도 지녔다.
그의 모든 날개가 펼쳐진 순간, 세라피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겐 여러 가지 모습이 있었다.
여러 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파멸, 죽음, 생명, 사랑, 모든 게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세라피나는 그저 무서웠다.
혼자 하늘 끝에 놓이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엎드렸다.
조아렸다.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렸다.
한편의 사기극과 같았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서지, 무영은 어디까지나 ‘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신의 영역에 들어가 괴물들을 이끄는 게 무영의 본모습이었다.
이곳에선 혼자 활동하며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도시에 천사가 강림했다.”
“대도시에 신의 사자가 나타났다!”
“모든 악을 몰아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소문이 흘렀다.
사람에서 사람에게, 도시에서 도시로.
덩달아 무영을 따르는 이들도 많아졌다.
덕분에 ‘인재 찾기’가 쉬워졌다.
오스카는 일을 잘 처리해주었다.
“그런데 무영님. 인재들을 모아서 키우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키운다?”
“아니면 모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스카도 무영의 의도를 몰랐다.
하여 물었다.
무영은 성 내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피식 웃었다.
“말했겠지만, 마신의 영역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인재들만이 필요하다.”
직접 키우진 않는다.
마신의 영역.
그곳에 두면 알아서 크게 되어 있었다.
살기 위해선 싸워야 했으므로.
다만, 최소한의 도움은 줄 것이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깨비나 다른 우호적인 괴물들도 있었다.
“에이, 말이 그런 거죠? 진짜 마신의 영역은 장난 아니라던데요? 거기서 초보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스카가 질겁했다.
무영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쌓인 문서들을 살폈다.
모두 살수림과 관련 된 자료들이다.
‘여기 있군.’
그중 한 장을 꺼냈다.
알렉산드로는 정말로 살수림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중엔 심지어 무영이 모르는 것조차 포함되었다.
‘웡 청린이 팔부신중 야차(夜叉)의 전승자일 줄이야.’
이는 무영도 몰랐던 사실이다.
팔부신중.
어쩌면 역사의 한쪽 굴레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그들의 전승자가 아니었을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웡 청린은 본거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는 곳을 내가 알지.’
웡 청린은 그림자다.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영은 웡 청린이 만들어낸 ‘결과’를 알고 있다.
그 결과들을 따라가면 반드시 웡 청린과 마주치리라.
‘우선 신을 죽이는 창.’
한 가지 물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드시 웡 청린이 거쳐가리라 생각하는 무기.
몰이사냥의 시작이었다.
세라피나조차도 이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영을 도왔다.
무영이 묻는 것, 하는 것에 모두 참여하고자 하였다.
엎드리고 조아리며 눈물을 흘린 뒤, 세라피나는 무영을 더 이상 이단으로 몰지 않았다.
그저 순응하였다. 거대한 힘에, 미지에 짖눌려 무영에 대한 판단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다른 감정이 싹텄다.
세라핌은 사랑의 천사다.
세라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예 대놓고 드러냈다.
‘뮬라란에 사람을 심어둬서 나쁠 건 없다. 그리고 세라피나라면 신을 죽이는 창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테지.’
무영은 이를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였다.
신을 죽이는 창!
아직은 발견되지 않은 무기다.
하지만 시기상 지금쯤 관련된 정보가 모이고 있을 터였다.
이름은 신을 죽이는 창이지만, 결국 모든 존재를 꿰뚫는 보구다.
과거 딱 한 차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주인이 누구였는지도 무영은 안다.
‘웡 청린.’
신을 죽이는 창의 주인은 웡 청린이었다.
하지만 그 정보를 먼저 찾은 건 뮬라란에서였다.
고위사제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웡 청린이 파악하여 낚아챈 것이다.
마신조차 꿰어 죽이리라 생각해 그들은 모두 기대했다.
물론 봉인이 되어있어서 상상이상의 신위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 뮬라란은 살수림과 완전한 척을 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살수림은 건재했다. 철저한 점조직. 모든 걸 웡 청린이 제어했기 때문이다.
‘내가 갖겠다.’
무영의 눈빛이 깊게 잠겼다.
웡 청린이 가질 것이라면, 자신이 갖는 게 낫다.
더불어서 웡 청린과는 어차피 부딪혀야할 상대였다.
빠드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린다.
40년.
인간이 아닌 채로 살았다.
그저 살인무기였을 따름이다.
웡 청린에 의해 수천, 수만에 달하는 이들이 키워지고 버려졌다.
이제, 진정으로 복수를 할 때가 찾아왔다.
그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복수의 일환. 그 첫 번 째가 ‘신을 죽이는 창’의 탈환이다.
웡 청린과 부딪혀도지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무영은 과거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능력치 면에선 더욱 낫다. 단지, 순수능력치가 걸릴 뿐이지만 그를 감안해도 무영은 쓸 수 있는 수가 많았다.
그의 술수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숨고자 하겠지만, 무영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아악!”
어두운 저녁, 침실 안.
무영은 세라피나의 옷을 벗겼다.
우악스럽게 그녀의 둔부를 부여잡았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세라피나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 40. 이단 심판관(完) > 끝
ⓒ 온후#
< 41. 신을 죽이는 창(1) >
환락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세라피나는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었다.
하지만 무영은 잠에 들지 못했다.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잠드는 경험은 여태껏 없었다.
익숙하지 않았고, 생각할 것 또한 많았다.
‘망설임.’
무영은 어제 세라피나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세라피나는 무영을 따르는 듯 했으나, 일말의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단 심판관으로서의 직위와 무영의 정체에 관한 고민일 터.
하여 일을 섣불리 진행했다간 모든 걸 망칠 수도 있다.
어쩌면, 세라피나가 무영에게 몸을 허락한 건, 무영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신뢰는 금물이다.
무영이 아니었다면, 어지간한 남자라면 세라피나의 행동에 정신을 놓았을 것이지만 무영은 결코 방심을 하지 않았다.
세라피나는 아름답고, 강하며, 고결하지만, 또한 독을 품고 있었다.
세라핌은 하늘을 나는 뱀으로 묘사되곤 하였으니 차가운 뱀의 심장을 쉽게 믿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천천히. 조급해하는 순간 지는 싸움이다.
당장 신을 죽이는 창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지만 아직 시간은 많았다.
저 망설임을 모두 지울 수 있을 때까지 무영은 스스로에게 가면을 씌워야 했다.
만약 세라피나가 무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루키페르와 아수라, 움에 대한 이야기를 깨닫는다면 거침없이 무영을 찌르고자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해줄 무영도 아니지만, 세라피나를 얻으면 득을 볼 게 많았다.
뮬라란의 정보는 살수림도 쉽게 수집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므로.
그곳에 들어간 암살자는 백이면 구십은 죽는다.
다섯은 신의 종이 되고, 넷은 백치가 된다.
돌아오는 건 오직 하나. 그만큼 뮬라란의 방비는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무영으로선, 내부정보를 가지고, 가져올 수 있는 세라피나에게 군침이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숨겨놓은 것들을 확인해야겠군.’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고, 일과를 시작했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 대도시로 입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녕 천사인지. 아니면 천사를 자처하는 사기꾼인지!
하지만 그날 이후 무영은 바깥을 외유하지 않았다.
무영은 성 안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며칠째 알렉산드로가 만들어놓은 ‘시련’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중이었다.
‘시련상자.’
네모난 검은색의 사각형을 바라보며 무영은 턱을 쓸었다.
시련상자는 시련과 보상을 설정해서 넣어놓는 물건이다.
그런 게 지천에 깔려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100개였다.
아무래도 이것들은 알렉산드로가 준비한 ‘수련용 상자’인 듯싶었다.
강자를 육성하기 위한. 혹은 자신이 사용코자 이렇게 분류를 해놓은 것이다.
‘순수능력치의 상승을 꾀하는 수련용 상자들이다.’
분석하며 얻어낸 결론이었다.
모든 상자가 딱히 보상이랄 게 없었다.
대신 시련으로 설정 된 것들이 극한의 육체적 노동을 요구했다.
의도는 뻔했다.
순수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수련실 같은 것이다.
대규모로 만들어놨으나, 아직 실용화는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써보고 가져가야겠군.’
무영은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알렉산드로의 일지에서 이와 관련 된 글귀를 읽은 게 떠올랐다.
「수련용 시련은 순수한 힘을 키우기에 최적화 되어있다. 장비나 전승의 보조옵션으로 달린 능력치는 도움은 줄지언정 결국 순수하지 못한 힘이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의 일체를 꾀해, 아직도 미지인 6차 각성에 대비하여야
한다. 시련상자는 오로지 그것을 위한 안배다.」
6차 각성!
아직 그 기준을 이룩한 인류는 없다.
40년 후에는 6차 각성을 이뤘다고 예상되는 사람이 몇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인류에게 한계로 자리 잡은 게 5차 각성 까지다.
무영도 현재 4차 각성을 이뤘을 따름이었다.
6차 각성을 하면 초월체가 된다, 신이 된다, 무한한 힘을 얻는다. 등등의 이야기만 무성하다. 알렉산드로는 그 미지의 6차 각성을 위해 순수한 힘을 더욱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확실히 각성의 지표가 순수능력치이긴 했다.
하지만 순수능력치를 500, 600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단순한 노력으로는 안 된다.
빛나는 재능과 그에 걸맞은 투자로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하늘의 안배가 필요하다.
기연, 행운, 그러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마침 잘 됐군.’
허나 무영은 알렉산드로의 의견에 동의했다.
순수한 힘은 중요하다.
게다가 날개로 인해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안 그래도 훈련이 필요했는데 알렉산드로가 시련을 준비해둔 것이다.
툭!
무영은 장비를 벗었다.
법보화 시킨 뒤 무한의 주머니에 넣었다.
비탄도 마찬가지.
순수한 능력치를 키우는 공간이다.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으면 효과가 반감된다.
그리고 시련상자를 아직 상용화는 시키지 않았으나, 토대는 완성되어 있었다.
애당초 이것들이 완성된지 얼마 안 됐다.
완성한 직후 천마신교와 접선을 한 게 아닐는지.
‘먼저 맛을 봐야겠군.’
무영은 어깨를 풀었다.
알렉산드로의 안배.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시련상자는 상자마다 내용이 달랐다.
난이도도 천차만별이었다.
쉬운 건 한없이 쉬웠고, 어려운 건 무영조차도 풀기가 애매했다.
예컨대 단순히 허수아비를 치는 정도의 시련이 있는 반면 산을 옮기는 진정한 반복훈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알렉산드로는 반복훈련만큼 육체가 적응하고 강해지기에 더한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히히. 낭군님. 웬 삽질이에요?”
무영이 열심히 산을 옮기고 있을 때, 우히가 나타났다.
우히는 요정왕과 요정들을 추모한다고 한동안 바빴다.
그러다가 간혹 이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것이다.
무영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겨를도 없었다.
전신에서 비가 오듯 땀이 뻘뻘 흘렀다.
삽 한 자루만 주고 산을 옮기는 일이다.
장비의 도움 없이, 오로지 순수한 힘만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평범한 인간의 잣대로는 평할 수 없는 속도지만, 이런 육체적 노동은 간만에 해보는 느낌이었다.
<체력이 1 상승했습니다.>
능력치의 상승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벌써 29번째 시련.
마지막 흙을 삽으로 퍼서 나르자 다음 문구가 떠올랐다.
<삽을 이용해 산을 옮겼습니다.>
<소요시간 98시간 36분 22초.>
<수련의 법보(29)가 주어집니다.>
장장 4일하고도 2시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몇 년은 족히 걸렸을 일을 그 시간 만에 해냈다.
법보는 시련에 따라 한 장씩 주어졌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냥 평범한 종이쪼가리.
‘이걸 모으면 다른 게 생기는가 보군.’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법보를 주진 않을 것이다.
무영은 즉시 다음 시련을 시작했다.
<30번째 시련입니다.>
<발만 겨우 디딜 수 있는 절벽 위에서 태풍 사이를 걸으세요.>
절벽 위에 발을 디뎠다.
콰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태풍이 양쪽에서 몰아쳤다.
동시에 무영의 몸이 떠올랐다.
날개가 받은 저항을 미처 견뎌내지 못한 탓이다.
*
무영의 일과라곤 먹고, 자고, 시련을 행하는 것뿐이었다.
간혹 세라피나와 밥을 먹거나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그래왔다.
그리고 벌써 90번째 시련을 행하고 있었다.
산을 옮기는 게 가장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고, 보통 시련 하나에 여섯 시간 가량이 걸렸다.
쉬운 건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경우도 있었고.
문제는 이번 시련이다.
쿵! 쿠우웅!
90번째 시련에선 강철거인이 등장했다.
단순히 싸워서 이기는 게 전부라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내용이 이상했다.
강철거인과의 철인삼종경기!
300kg짜리 포탄을 던지고, 바닥속을 가르며, 420km에 달하는 거리를 주어진 코스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순수 달리기만으로 완주해야한다.
강철거인은 그 세 가지만을 특화시켜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느 정도의 오락성과 성취감, 그리고 의욕을 고취시키는군.’
연달아 패했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무영이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훈련들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고통의 한계를 경험하지 않아도, 능력치가 오른다. 강해진다.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시련들은 하나같이 육체를 전체적으로 자극해 한계를 넘게 만들고 있었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이게 상용화 되어 보편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도 엄청난 속도로 힘을 기를 수 있을 터였다.
‘이 역시 기득권층의 특권이었겠지.’
하지만 과거에도 보편화는 되지 못했다.
무영은 이것들을 가져가 본격적인 육성에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강해지는 데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입안이 말랐다.
무영은 흥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무영이 경험한 ‘강함’이란 모두 극한에서 왔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저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만들어졌다.
재능이 있어도, 즐기는 자는 이기지 못한다.
이런 알렉산드로의 발상은 전혀 색다른 것이었다.
“깡통. 다시하자.”
무영은 강철거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무영의 앞으로 선이 그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거인이 달리기 시작했다.
420km의 대장정.
무영은 16연패 만에 겨우 1승을 따낼 수 있었다.
적응력.
인간의 적응력이란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무영은 그 끝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슬슬 날개에 적응이 되는군.’
날개는 움직일 수 있었다.
100개의 시련을 돌파했을 때, 무영은 날개를 안으로 집어넣을 수도 있게 되었다.
동시에.
<100개의 시련을 모두 돌파했습니다.>
<최초로 100개의 시련을 돌파해, ‘현자의 물약’을 드립니다.>
<수련의 법보(100)이 주어졌습니다.>
<법보 100개가 모이기 시작합니다.>
<‘아공간의 법보(A+)’가 완성되었습니다.>
아공간의 법보!
말 그대로 무영에게만 주어진 새로운 공간이다.
물리적 법칙이 통하는 곳이며 직접 드나들 수도 있었다.
‘아공간을 만들어놨었군.’
아마도 거대한 아공간 하나를 만들어놓고, 시련을 모두 통과한 자에게 그 공간을 나누어 주는 것일 테다.
그리고 현자의 물약을 어떠한가.
‘개화시킬 능력치가 있던가?’
어지간한 능력치는 모두 개화가 되어있었다.
무작위성이 강하긴 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개화되는 능력치가 달라지니 고민을 해봐야했다.
‘천천히 생각해봐야겠군.’
무영은 일단 현자의 비약을 집어넣었다.
현자의 비약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극히 귀한 물건이다.
쓰기 싫어도 쓸 곳이 있는 그런 것.
이후 무영은 100개의 시련상자를 모두 법보화시켰다.
순수능력치도 크게 올랐다.
적어도 무구들로 인한 능력치가 더 높은 상황은 이제 나오지 않았다.
‘이것들은······ 대박이다.’
직접 겪어본 바, 이 시련상자들이 상용화되거든 인류의 평균은 크게 뛸 것이다.
초보자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시련들을 모두 완주한 뒤 시작하면 적어도 비명횡사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기존의 강자들도 한 번쯤은 겪어볼 만 했다.
이런 식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는, 그런 즐거움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한계를 크게 집어던질 계기를 만들 수 있으니까.
알렉산드로.
만약 그가 의도한 거라면 그는 천재라고 부를 만 하였다.
< 41. 신을 죽이는 창(1) > 끝
ⓒ
< 41. 신을 죽이는 창(2) >
‘상태창.’
무영은 상자를 챙기고, 모든 시련을 이겨낸 결과를 확인하고자 상태창 시계를 돌렸다.
다른 부분은 변화가 없었지만 능력치 부분엔 제법 전과 달라진 점이 눈에 띄었다.
능력치->
힘 515(300+215) 민첩 504(315+189)
체력 491(321+170) 지능 500(245+255)
지혜 410(275+135) 투기 340(180+160)
마법저항 525(125+400) 망혼력 410(260+150)
악성향 450(300+150) 신성력 330(230+100)
종합레벨: 491
주요 능력들, 그중 신체와 관련된 것들의 순수능력치가 크게 올랐다.
평균 30이상씩은 오른 듯싶었다.
특히 민첩과 체력이 많이 올랐다.
몸의 균형과 반복성 훈련을 한 탓일까.
고작 한 달을 투자한 것치곤 훌륭한 결과다.
‘500이라······.’
힘과 민첩, 지능과 마법저항!
이 네 가지의 수치들이 500을 넘겼다.
감회가 새로웠다.
500은 기준이다.
인류 10강조차 뛰어넘은 이가 거의 없는 미지의 세계.
그 입구다.
무영이 무서운 점은, 앞으로의 성장여지가 무한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500이 끝이 아니다.
무영이 올릴 수 있는 순수능력치는 아직 많았다.
만약 이대로 막힘없이 성장한다면······ 전입미답이라는 6차 각성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만하면 되었다.’
무영은 고개를 주억였다.
태양길드로 와서 얻은 것들은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더불어 알렉산드로가 숨겨놓은 것들을 모두 확인했다.
이제, 다음 도약을 위해 뛸 준비를 해야 했다.
무영은 ‘신비’를 지켰다.
사람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 자체가 소문에 살을 붙이고 부풀려서 무영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주었다.
물론 악질적인 비방을 일삼는 무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천사의 이름을 불렀다.
‘신비가 깨지는 순간. 나의 인간성이 드러난다.’
신비는 중요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참으로 큰 무기다.
만약 무영이 길드마스터가 된다거나 특정한 위치에 오르고자 한다면, 그 순간 신비가 깨질 가능성이 높았다.
인간인 게 드러나고 추앙심은 사라지리라.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신비는 더한 신비를 낳고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었다.
그래서 무영은 자신이 만날 사람을 선별했다.
푸른사원을 건너온 인재를 말이다.
“생각보다 많군.”
“적어주신 기준대로 선별한 겁니다.”
오스카가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연무장 안에 1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게선 초보자 태가 그다지 많이 풍기지 않았다.
‘광속의 아이핀, 검호 가펠트, 백안의 야타.’
그중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다르지만 선이나 윤곽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10강은 아니지만 과거에도 100강의 안엔 능히 들었던 자들이다.
‘이번 달이 풍년이었군.’
한 번에 이만한 인재들이 넘어올 확률은 굉장히 적다.
그리고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하였던가?
마신의 영역에서의 생존싸움. 그리고 알렉산드로가 만든 100개의 시련을 통과하면 쓸만한 전사로 탈바꿈 될 이들이 꽤 있었다.
“저분이 천사님?”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우리만 모은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다른 이유는 말해준 게 없으니.
무영은 연무장에 들어온 제 3자의 시선도 느꼈다.
‘세라피나.’
그녀는 무영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않았다.
무영의 진면목. 진심을 파악하고자 모든 것을 투자했다.
여기서부턴 말 한 마디가 중요하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나?”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면 부디!”
마계의 모두가 귀환하고자 하는 본능과 소망을 가지고 있다.
알렉산드로가 그랬고, 무영이 그랬다.
이제 한 달 된 이들이라면 그 마음이 절정에 달할 터.
난데없이 끌려왔으니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행할 것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무영이 천천히 말했다.
“72좌의 마신을 죽여라. 그리하면 돌아갈 수 있다.”
“마신······ 이 대체 뭡니까?”
무영은 짧게 일축했다.
“악의 결정체.”
모든 악의 시작. 근원. 그것이 마신이다.
무영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마계에 있는 악마의 숫자는 일억 팔천만 가량이다. 그 악마들을 다스리는 게 72좌의 마신이며, 그들은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지.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한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세라피나마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구체적인 악마들의 숫자가 파악되는 건 대혼돈이 있은 이후다.
지금 순간에선 어느 누구도 그들의 숫자가 일억 팔천만이나 된다는 걸 모른다.
그야말로 아득한 숫자.
현재 마계에 잔존한 인류보다도 많다.
“불가능해 보이는가? 하지만 걱정마라. 신께선 악마와 싸우기 위한 힘을 너희에게 주셨으니.”
무영은 가면을 썼다.
믿지도 않는 신을 팔았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마계의 시스템은, 신적인 존재들이 모여 만든 것이었으니까.
“악마들은 모든 존재를 지우고자 한다. 그들은 끝내 지구마저 삼켜버릴 것이다. 앞으로 머지않아 지구의 모든 인류는 소환될 것이며 그들은 모두 악마에게 노출 될 것이다. 너희의 가족이 악마에게 유린당하고, 머리를 잘린
채 바닥을 뒹굴리라.”
“······!”
“처, 천사님. 그게, 그게 사실입니까?”
모두가 경악했다.
설마 이 소환이 그처럼 대규모일 줄은 몰랐다는 듯.
그들의 입장에서 무영은 ‘천사’다.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그리고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세라피나.
‘대체 어떻게?’
그녀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인류가 모두 소환될 가능성은 상층부에서 이제 막 논의되고 있는 논제다.
무영은 예언이 있기도 전에 먼저 자기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예언을 기다리면 늦는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시간이 부족할진대 어찌 4년을 더 기다리란 말인가.
150명가량에게 말을 한 게 전부지만, 조만간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무영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보단 소문의 힘이 더욱 막강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비하라. 내가 너희에게 그들과 싸울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들의 심장부로 들어가, 심장을 찌를 힘을 주겠다. 너희 자신을, 가족을 지킬 힘을 말이다.”
사람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더한 가족애를 발휘하곤 한다.
마계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이라면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이제 막 지구에서 넘어온 이들이니 마음이 울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 150명은 푸른 사원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최소한의 생존법을 안다.
또한, 약육강식을 깨우친 이들이다.
약하면 죽는다는 걸 알았으니 무영이 내민 동아줄을 어지간하면 놓으려고 하지 않을 터.
파아아악!
무영은 가브리엘의 날개를 활짝 폈다.
신성력이 뛰쳐나와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무영의 전신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그 효과가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착각을 주었다.
‘연출.’
결국 보이는 모든 건 연출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연출이 90%였다.
“너희는 악과 싸울 전사로 선택받았다.”
“아아······.”
그들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들의 고생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무영은 악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자신은 악이 아닌 양, 스스로를 포장한 것이다.
세라피나는 더욱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무영이 한 말은 틀린 게 없으며,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거짓이 없었으니 더욱 헷갈릴 터였다.
‘정말 신의 사자란 말인가?’
세라피나가 손톱을 깨물었다.
그는 정말 미지의 존재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악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악의 멸망을 주장했다. 자신의 선함을 보였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런 이가 어찌 악일 수 있겠나.
방심을 꾀하고자 모든 걸 주었다. 순결도 바쳤다. 무영은 언뜻 방심한 듯 보였다. 그것마저 무영의 의도였음을 세라피나는 알 수 없었다.
점점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져갔다.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누군가가 답을 내주었으면 하던 찰나, 무영은 쐐기를 박았다.
“마신들의 힘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세라피나.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대비······.”
식사의 와중, 무영은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줄 아느냐?”
“모르겠어요.”
세라피나는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헌신하는 척을 하기 위함이었다.
무영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신에겐 찰나가 우리에겐 영원과 같다. 이미 몇 가지의 예언들이 도착했겠지만 그것은 과거의 것일 가능성이 있지. 사실상 예언이란,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발 먼저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
무영은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유일하게 나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모든 날개를 지니고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야 말하는 건······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때가··· 임박했다니요?”
검은 날개를 가진 남자가 세계를 파멸시킨다.
어쩌면 검은 날개의 남자가 무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무영에겐 흰색도, 회색도 있으니.
실로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무영은 눈을 떴다.
“마신들이 조만간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마라.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무기가 있다. ‘신을 죽이는 창’이 있으면 내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다.”
세라피나가 움찔했다.
이 역시 지도부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안 그래도 그와 관련된 움직임을 취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라피나는 흔들렸다.
무영이 보인 행동과 말들.
만약 모든 게 사실이라면,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던 찰나 무영이 경고하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세어나가선 아니 된다.”
“왜죠?”
세라피나가 궁금해했다.
창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퍼져나가선 안 된다.
웡 청린이 눈치를 채고 발을 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결코 모험을 하지 않는 탓이다.
하여 적당히 둘러댔다.
“내부에 적이 있기 때문이지. 얼마 전에 닌자들이 뮬라란에 침입하지 않았나?”
“······ 맞아요.”
불과 며칠 전에 들려온 소식이다.
뮬라란에 닌자들이 잠입했다고. 그래서 감옥에 있는 한 명을 빼내어 갔다고.
하지만 뮬라란은 철통경비다. 절대로 닌자들 따위가 쉬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내부의 적이 있지 않은 이상엔 말이다.
물론 이 역시 무영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었지만.
“내가 창을 바란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되고, 내 의도가 실패하게 된다면 인간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무영은 세라피나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세라피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강요라지만 길을 제시한 것과 같았다.
흔들림이 조금씩 멎었다.
수많은 정황들. 알 리 없는 사실들을 무영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예언과 자신의 혼란 역시도 알고 있을 지 모른다.
그래서 선택했다.
“······ 알겠어요. 비밀로 하고 움직이지요. 하지만 조용히 창을 가져오려거든 당신께서 모습을 감추고 제 ‘퍼스트 나이트’가 되어야 합니다.”
퍼스트 나이트!
이단 심판관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기사를 뜻함이다.
모든 이단 심판관들이 퍼스트 나이트를 뒀지만, 유일하게 세라피나만은 공석인 채였다.
< 41. 신을 죽이는 창(2) > 끝
ⓒ
< 41. 신을 죽이는 창(3) >
여태껏 곁에 두고 싶을 정도의 인재가 나타나지 않은 탓이다.
퍼스트 나이트는 이단 심판관과 가장 가까운 존재.
이단 심판관은 말 그대로 ‘심판’을 행하는 자였다.
성황조차 그 심판의 결과를 바꿀 권한은 없다.
하지만, 단 한 명.
유일하게 그 결과를 비틀 수 있도록 허락된 자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퍼스트 나이트다.
하지만 정의롭고 강인해야하며 순결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악한 자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힘을 잃기 마련이다. 순도 역시 낮으니 퍼스트 나이트의 재목이 될 수 없음이다.
하지만······ 무영이 정말 천사라면.
‘신성력의 순도가 높겠지.’
세라피나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성황의 신성력 순도는 89%. 성녀도 85% 수준을 거의 넘지 못한다.
같은 신성력이라도 이 순도에 따라 낼 수 있는 힘이 다르니, 천사라면 그 마의 벽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성력의 순도를 잴 수 있는 도구는 이곳에 없다.
“퍼스트 나이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영이 묻자 세라피나가 답했다.
“저와 함께 ‘성신녀의 궁’으로 가야해요.”
같은 시대에 존재하는 성녀의 숫자는 매번 다르다.
지금 뮬라란엔 세 명의 성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성신녀의 궁에 있다. 그곳에서 악의 기운을 먼저 눈치 채고 세라피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성신녀의 궁이라.’
무영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성신녀의 궁엔 성녀가 기거한다고.
무영은 문득 스노우가 떠올랐다.
과거 그녀도 성녀였다. 대혼돈 이후 갑자기 나타난, 베일에 가려진 여인.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스노우는 무영이 아수라의 사도라는 걸 알아차리고 메시지를 전했다.
‘본래라면 디아블로스의 제단으로 가야하겠지만······.’
스노우가 무영에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신을 죽이는 창’ 쪽이 더욱 급했다.
웡 청린을 잡을 수 있는 기회다. 설령 못 잡더라도 놈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 바라고 바라던 재회의 시간.
이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방해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
“알았다.”
무영이 짧게 말했다.
그러자 세라피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멀지 않으니 3일이면 충분할 거예요.”
세라피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신성력이란 말 그대로 신성한 힘이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한 힘!
그 신성력의 순도는, 존재의 ‘정의’를 기준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89%다. 90%를 넘긴 자는 역대에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성황이 두 번 바뀌고 열댓 명의 성녀가 나타났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현재의 성황이 가장 높은 신성력 순도를 가진 걸로 안다.
세라피나조차 82%에 불과했다.
이후부터는 1%의 차이가 엄청난 질의 격차를 불러온다.
사실상 신성력 순도가 85%가 넘고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여자일 경우에 성녀라고 부르니, 이단 심판관들은 아쉽게 성녀가 되지 못한 여인들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세라피나 역시 과거엔 성녀후보 중 하나였던 것이다.
‘통과하면 그를 따라야지.’
세라피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마계에 없는 천사의 강림이 사실인지.
정보를 캐보았으나 그는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가까운 인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김태환이라는 자를 찾아갔지만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무영은 특별한 존재라고만 일축할 뿐이었다.
신을, 천사를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일단 여태까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는 실로 정의로운 것 같았고, 실로 강인하였으니.
“우히히히히.”
막 속옷을 걸치려고 하는 순간 미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 숨은 채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요정이 있었다.
‘요정?’
그러고 보니 무영에 대한 이야기 중 요정과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무영을 따르는 요정이 하나 있다고.
요정은 악한 존재를 어지간하면 따르지 않는다. 그 소문이 무영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준 것이다.
설마 소문의 요정일까?
하지만 요정은 장난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장난이 통하지 않으면 삐져서 도망간다.
세라피나는 고개를 돌려 속옷을 바라봤다.
‘애기들 장난.’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속옷에 작은 애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애들이나 할 법한 장난. 누가 요정 아니랄까봐.
“깜짝이야. 벌레가 있네.”
영혼 없이 외치며 속옷을 침대 위로 던졌다.
“정말 무섭다.”
영혼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증발한 듯한 연기였다.
“우히히히히히히!”
그러자 요정이 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세라피나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감히 우히의 낭군님한테 꼬리를 쳐? 이 여우같은 년!”
우히는 배웠다.
잘난 남자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무영은 ‘너무나도 잘난 남자’였다.
언젠가는 이처럼 파리가 꼬일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
문제는 한 발 늦었다는 것이다.
설마 요정들의 추모를 모두 끝내기 무섭게 쌀이 익어 밥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낭군님?”
세라피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히는 눈을 부릅떴다.
“그래! 네가 꼬리친 남자는 우히의 낭군님이야. 우히한테 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테야? 우히는 이거보다 더 엄청난 일도 할 수 있어, 조심해.”
세상에!
세라피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저 단어를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면, 요정이 실체가 있는 존재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
‘아니, 천사라면······ 납득이 돼.’
어쨌거나 둘은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마침 잘 됐다.
궁금한 게 많았다.
“그분은 어떤 존재인가요?”
“유일한 별! 네까짓 여우가 넘볼 남자가 아니란 말씀이야. 우히도 아직 뺨에 입 맞춰본 게 전부인데 네까짓 게!”
뺨에 입을 맞춰봤다고 말한 순간 우히의 어깨가 축 쳐졌다.
세라피나와 무영간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듯싶었다.
세라피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우히도 커지고 싶어. 너처럼 실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우히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 전 장난을 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세라피나는 당황했다.
그러자 우히가 고개를 들었다.
우히는 손가락을 맞대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있잖아. 우히는 궁금해. 살을 맞대면 무슨 기분이 들어?”
“따······ 듯해요.”
“포옹하면?”
“아늑해요.”
“그럼, 그럼 입술을 맞추면?”
“황홀, 해요.”
세라피나는 사실대로 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할 것 같았다.
우히가 세라피나는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자신 없이 말했다.
“낭군님을 뺏지 마······.”
“빼앗을 생각은 없어요.”
“진짜?”
“네.”
“정말루?”
“네.”
우히가 눈을 깜빡이며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세라피나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요정의 눈은 정말 깨끗하구나.’
인형과 같은 몸. 빼어나게 귀엽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 눈이다.
티 없이 맑다는 게 이런 걸 뜻하는 걸까?
“우히히히. 너 정말 착한 애구나? 그럼 너 첩해.”
“첩이요?”
“두 번째 부인을 첩이라고 불러.”
“아······.”
그럴 생각까진 없으나 일단 장단을 맞췄다.
안 그랬다간 이 티 없이 맑은 요정이 바람처럼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만큼 불안정해 보였다.
“아까 장난친 거 미안해. 우히가 사과할게.”
“괜찮아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우히는 다 알아.”
“그분은 정말로 천사가 맞나요?”
“천사? 아닌데?”
“예?”
우히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세라피나는 다시금 당황했다.
천사가 아니라고?
이후 우히는 전혀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낭군님은 ‘희망’이야. 천사 같은 게 아냐.”
“희망······ 희망.”
작게 중얼거렸다.
추상적이다.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우히는 작게 혀를 찼다.
“낭군님은 천사도 악마도 아냐. 인간들은 참 멍청해. 왜 그런 조악한 단어들로 낭군님을 정의하려고 하는 거야?”
“정의되지 않은 존재는 두려움을 사니까요.”
“천사면 되고 악마면 안 돼? 왜?”
“천사는 선하고 악마는 악하니까요.”
“그러니까 멍청해. 낭군님은 낭군님인데. 왜 그걸 모를까?”
우히는 쉽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걸 우히는 모르는 듯싶었다.
세라피나는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는······ 정말로 희망인가요?”
“응! 우히의 희망이고 모두의 희망이지. 아무도 낭군님의 마음을 모르지만, 낭군님조차 모르지만 우히는 알아. 누구보다 너희를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걸. 표현방식이 과격하긴 하지만, 우히는 그게 셈이 날 정도야.”
우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라피나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
무영은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썼다.
갑옷을 걸치고 날개를 가렸다.
100개의 시련을 해결하며 날개의 조종을 익혔기에 이제는 숨기고 나타내는 게 자유로웠다.
그리고 일천에 달하는 행렬과 함께 성신녀의 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 행렬 중 무영이 태양길드의 총사령관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다만 ‘새로 들인 종자’라고만 세라피나가 설명했을 따름이다.
종자라.
기사의 하인 비슷한 것이다.
당장 퍼스트 나이트가 될 순 없었다. 그러니 일단 종자에서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태껏 세라피나는 종자조차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온 탓이다.
“저놈, 누구지?”
“본 적 있어?”
“세라피나님이 종자를 두시다니, 허.”
“감히 세라피나님의······.”
덕분에 주변에선 온갖 눈총을 받고 있었다.
무영은 세라피나와 조금 떨어진 채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그런 무영의 어깨 위엔 우히가 콧노래를 부르며 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작게 말하자, 우히가 무영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저 세라피나라는 여자요. 나쁜 여자 같지 않아요.”
“······?”
“우히히.”
우히는 마냥 웃었다.
무영은 고개만 갸웃할 따름이었다.
여태껏 가까이 다가온 모든 여자를 경계하고 질투하더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내 궁금증을 접었다.
성신녀의 궁에 도착하거든 바로 퍼스트 나이트가 되기 위한 시험이 시작된다.
‘신성력의 순도.’
첫 번째 시험이자 가장 중요한 것.
사실 무영도 궁금했다.
가브리엘의 힘을 받았다지만, 그렇게 따지면 다른 성기사나 성녀들도 신의 힘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들의 순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 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쿠와아아아아앙!
그때였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정확히는,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을 가렸다.
무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용은······.’
익숙한 용의 형상이 곧 지상으로 내려왔다.
검은색 용.
어둠이 쏟아지는 활화산의 주인, 아르키사!
유일하게 인간에게 길들여진 용이었다.
족히 100m는 될법한 몸집이었고 그 위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으나 그는 곧장 세라피나에게 다가갔다.
“세라피나! 우연이로구나.”
“한성님. 오랜만이에요. 하지만 우연은 아닌 것 같군요.”
세라피나도 알고 있는 듯싶었다.
다만 말투에 가시가 조금 있었다.
그 순간, 무영의 머릿속에 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한성. 그런 이름이었다.
저 모습. 과거와 그대로다.
인간 중 유일한 용의 계약자. 아니, 용을 길들인 남자.
용과의 계약으로 남자는 오랜 시간 젊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었으며 용언마저 사용이 가능했다.
세간에는 불로불사라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용군주!’
용군주 한성!
무영에게 있어서 가장 까다로웠던 암살대상이다.
인류 10강이며 혁명가였던 남자.
과거 가장 ‘영웅’에 가까웠던 남자가, 지금 무영의 눈앞에 있었다.
< 41. 신을 죽이는 창(3) > 끝
ⓒ
< 41. 신을 죽이는 창(4) >
“마침 주변을 지나갈 이유가 있어서 말이지. 그나저나 세라피나. 더욱 예뻐졌구나.”
한성은 너스레를 떨었다.
용과 연결된 그는 감각이 매우 활성화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귀는 주변의 모든 걸 듣고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하여 무영은 심장소리조차 죽였다.
용군주를 만난 건 기껍지만 지금은 신분을 숨긴 상태다. 혹여나 한성이 무영의 진면목을 알아보면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었다.
“입에 발린 말은 됐어요.”
“아니, 정말 예뻐졌대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어언 10여 년 전이었으니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어. 나한테 시집와도 되겠다, 하하!”
“한성님은 여전하시군요.”
“나야 늘 한결 같지. 초심을 잃지 않는 남자라고 불러다오. 그나저나······ 이 방향이면 성신녀의 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냐?”
한성이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하루만 더 가면 이제 성신녀의 궁이다.
그곳에서 무영은 시험을 받고 퍼스트 나이트가 될 예정이었다.
본래라면 이단 심판관의 움직임은 숨겨야할 사항.
하지만 한성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세라피나가 긍정했다.
“예. 한성님은?”
“사실 나도 성녀에게 볼 일이 있다. 최근 마신의 영역에서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겼지 뭐냐.”
한성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인류최강에 가장 가깝다는 남자.
하지만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아 바람과 같이 자유롭다.
세라피나가 살짝 놀란 듯 말했다.
“한성님에게도 고민이란 게 있나보군요.”
“끄응, 세라피나. 내게도 희로애락이 있단다. 하여간에 마신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다른 초월적인 존재들도 엉덩이를 슬금슬금 들려고 하고 있어. 조심하거라.”
마계의 초강자로 분류되는 게 마신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산의 주인, 용들의 왕, 죽음의 군주, 달의 아이!
이 넷은 마신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이 넷은 어지간하면 움직이질 않는다. 저들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거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실체를 확인한 사람이 있어 소문만은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한성이라면 저들을 보았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용들의 왕’을 한 번 마주하긴 했으리라.
용의 계약을 두고 그의 앞에서 서약을 맺었을 테니.
크릉! 킁! 킁!
그때였다. 어둠이 쏟아지는 활화산의 주인, 아르키사가 코를 벌렁댔다.
쿵!
조금씩 움직이자 홍해가 갈라지듯 성기사와 사제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르키사가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구나.”
한성은 여유로웠다. 아르키사가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탓이다.
마룡은 본래 신중하다.
이어, 아르키사가 무영의 앞에까지 다가왔다.
“세라피나. 저자는 누구냐?”
“제 시종이에요.”
“시종에게 아르키사가 반응한다? 흐음.”
한성의 말마따나 아르키사는 한참이나 무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
두 개의 눈이 세로로 닫히고 열린다.
하지만 무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투구에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아르키사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르키사는 마룡. 죽음을 다루는 용이다.
과거 이놈을 죽이고자 무영은 오랜 시간을 사용했다.
모든 암살대상 중에서 이 아르키사를 죽이는 게 가장 오래 걸렸다.
용의 감각은, 특히 아르키사 정도 되는 용은 인간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죽일 이유가 없다.
무영은 과거의 암살자가 아니다. 더는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지 않는다.
‘영웅과 함께 살아가라.’
한성은 영웅의 표본과 같다.
대혼돈 이후 그가 혁명에 성공한다면 인류는 몇 발자국 더 진일보할 수 있으리라.
무영이 직접 그를 암살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한성과 아르키사를 죽일 암살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같은 죽음을 다루고, 오랜 시간을 봐와서일까.
왠지 모를 동질감이 있었다.
무영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르키사의 콧잔등을 쓸었다.
크릉. 크릉.
아르키사가 작게 울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 놀랍군. 아르키사가 나 외에 사람의 손을 허락하다니.”
한성이 눈을 부릅떴다.
한성만이 아니다. 세라피나도 마찬가지다.
세라피나가 아직 성녀 후보였을 시절. 한성은 뮬라란에 몇 년간 기거한 적이 있었다.
성황의 친구이자 극진한 손님으로서.
아르키사도 함께 왔지만 어느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억지로 만지려다가 어깨가 먹힌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한성이 막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잡아먹힐 뻔했다.
그 이후 누구도 아르키사를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림의 떡. 그 위풍당당한 자태를 바라보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헌데 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댔다.
아르키사가 그것을 받아주었다.
세라피나도, 한성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는 용과도 관계가 있는 사람 같구나. 용을 죽인 자의 냄새가 난다.”
무영은 용사냥꾼을 전승한 바가 있었다.
암흑룡 바르사를 잡고 난 뒤에 얻었다.
하지만 이는 용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칭호다. 아르키사의 행동은 분명히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용사냥꾼······?”
“그래. 이 냄새는, 바르사로군! 어쩐지!”
그제야 이유를 이해했다는 듯 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사가 뭔가요?”
“새끼 암흑룡이다. 조막만한 녀석이 깐죽대긴 잘했지. 아르키사가 언제 한 번 크게 눌러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바르사의 피 냄새가 저자에게서 나니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지.”
크게 기꺼워하며 한성이 무영에게 다가갔다.
“자네가 바르사를 죽였나?”
끄덕!
이제 와서 숨길 수는 없었다.
한성이 눈치 챘다면 거짓을 말하는 게 도리어 더욱 의심을 살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용은 강력한 존재지만 사냥이 불가한 것도 아니었다.
“용을 죽인 자가 어찌 시종의 자리에 만족한단 말이냐? 혹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내가 이뤄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뤄주겠다. 이는 내가 아닌 아르키사의 마음이다.”
아무래도 아르키사와 바르사는 엄청난 악연으로 뭉쳐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한성.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는 그의 길을 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한성님. 그가 지금은 시종이지만 저의 퍼스트 나이트 후보입니다. 제 허락도 없이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아주시지요.”
“뭐? 퍼스트 나이트?”
퍼스트 나이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롭게 봤다는 듯 무영과 세라피나에게 연달아 시선을 주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사제와 성기사들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일반 시종이 아니라 퍼스트 나이트 후보였단 말인가!
“유일하게 너만이 퍼스트 나이트가 없다고 들었다. 사실 만난 김에 괜찮은 아이를 소개해주려 했거늘······.”
화악! 화악!
쿵!
동시에 하늘에서 커다란 익룡이 나타났다.
아르키사에 비하면 한참 작지만 이 역시 무시 못 할 괴물이다.
레드 와이번!
상급 중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한 포식자.
그 위에서 건장한 청년이 내려왔다.
“스승님. 후우. 겨우 따라잡았습니다.”
청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세라피나를 보곤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영락없이 쑥스러워하는 모습.
“양반은 못 되는구나. 하여간 이 아이가 내 제자인 펜드래건이다. 2세대이지만 어렸을 적에 부모가 죽고 내가 키워왔지. 아마 한 번 본 적이 있을 게다.”
“뮬라란에서 뵌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어차피 그 시종이 후보라면, 이 아이도 후보로 넣어주지 않겠느냐?”
“한성님의 제자를 제가 어찌······.”
세라피나가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한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보단 이 아이의 소망이다. 어렸을 적에 너를 한 번 보곤 크게 반했다고 하더구나. 제자 자랑은 아니다만, 펜드레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강자소린 듣는단다. 얼굴도 훤칠하고 성격도 나를 닮아 좋지.”
“마지막 부분이 제일 걸리는군요.”
“하여간, 어떠냐? 신성력이라면 걱정마라. 모두의 어머니 이데아께서 녀석에게 직접 축복을 내리셨으니.”
세라피나가 놀란 눈으로 펜드래건을 바라봤다.
뮬라란은 네 명의 신을 섬긴다.
구름의 신 ‘순’, 바다의 신 ‘륭’, 대지의 신 ‘한’, 이들 셋의 어머니 ‘이데아’
하지만 사실상 진정한 신은 이데아뿐이었다.
나머지 셋은 이데아의 자식으로서 대접을 받는 정도.
허나 이데아의 힘을 이은 사제나 성기사는 매우 적었다. 대신 힘을 받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역대 성녀나 성황 중 이데아의 축복을 받은 이가 압도적인 비율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펜드래건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세라피나에요. 이름이 특이하시군요.”
“아버지께서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부디 제가 세라피나님의 퍼스트 나이트가 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펜드래건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강렬한 염원을 담아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세라피나로선 한성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한성은 성황의 오랜 친우이며, 뮬라란의 은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영이다.
무영이 있는 한 이 모든 게 희망고문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거절을 하는 편이 낫겠으나 그러기엔 한성이 너무 걸렸다.
세라피나가 조심스럽게 무영을 바라봤다.
끄덕!
무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라피나가 말했다.
“알겠어요. 같은 후보로 넣죠. 하지만 공정하게 심사하겠어요.”
“바라던 바다. 오히려 그래주지 않으면 곤란해.”
한성은 자신했다.
용사냥꾼. 혼자서 얻은 건 아닐 테다. 그를 감안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펜드래건도 만만치 않다.
펜드래건이 승부욕을 띄우며 무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펜드래건. 한성의 제자. 있었던 것도 같군.’
한성이 암살당하자 펜드래건이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날뛰었다.
하지만 다른 기득권들에 의해 순식간에 정벌을 당한 걸로 안다.
한성을 닮아 정의심이 투철하며 분명히 강자도 맞았다.
“아참. 아르키사가 통행을 방해했구나. 나는 위에서 따라가마.”
한성이 눈치를 보다가 은근슬쩍 빠졌다.
펜드래건과 세라피나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주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윽고 한성이 사라지자, 펜드래건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고마워요.”
“어렸을 적에 한 번 본 게 전부이지만 그때부터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데아를 섬기며 그분의 은총을 받은 것 모두가 세라피나님 덕분입니다.”
“과찬이세요.”
무영은 조금 더 멀리서 그 둘을 따라갔다.
저런 분위기가 무영에겐 그다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성신녀의 궁.
작은 도시만한 규모의 사원이었다.
이곳에서만 수천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기거한다.
세라피나와 한성, 펜드래건과 무영이 입성하자 그들은 조용히 환영해주었다.
성녀도 미리 소식을 접하고 달려 나왔다.
세계수 장식이 달린 관을 쓰고 하얀색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
“반가워요. 한성님. 세라피나님.”
여인은 성스러움 자체였다.
진정한 성녀만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있었다.
무영은 이곳이 가시밭에 들어온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성향상 맞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시작이로군.’
하지만 무영은 개의치 않았다.
맞지 않는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이미 퍼스트 나이트가 되기 위한 시험의 장소에 들어온 것이다.
< 41. 신을 죽이는 창(4) > 끝
ⓒ
< 41. 신을 죽이는 창(完) >
그때 한성이 품 안에서 작은 검 조각을 꺼냈다.
검 조각. 별 다른 특색도 없었다.
다만 면이 넓은 걸로 보아 대검에서 부서진 조각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조각에서 느껴지는 힘이 상상이상이었다.
“대지의 성녀시여.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한성이 검의 조각을 건네자 성녀가 받았다.
대지의 성녀는 대지에서 온 모든 걸 알고 느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한참이나 조각을 만지고 바라보던 성녀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이 세계의 물질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한성님. 이걸 어디서 구하셨는지요?”
“용들의 왕. 그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이 조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용들의 왕!
모든 용을 다스리는 초월적인 존재.
그 힘은 능히 마신과도 비견된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거대한 섬 하나와 같은 크기이고, 움직이는 순간 온 대지가 들썩이는 탓이다.
용들의 왕이 부탁했다면 결코 간단한 물건은 아닐 터.
성녀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답 하나를 내었다.
“시간. 조각에서 시간의 무수한 흐름이 느껴집니다.”
“시간이라. 이거 참, 성녀님께서 모르시면 ‘현자의 방’뿐이 안 남았군요. 그 뒷방 늙은이들은 평생 안 보겠다고 다짐했건만······.”
한성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각을 바라보는 이들 중에는 무영도 있었다.
왜인지 저 조각이 익숙하다.
‘킹슬레이어.’
그의 검이다. 정확히는 그가 가졌던 검의 파편이었다.
왜?
어째서 용들의 왕이 킹슬레이어의 검 조각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무영에게 결을 가르친 뒤 사라졌다.
홀연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영도 딱히 찾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외의 곳에서 킹슬레이어의 흔적은 찾은 것이다.
이윽고 한성이 한 발 물러나자, 남은 건 세라피나뿐이었다.
“세라피나님께선 제게 어떠한 용무가 있으신가요?”
세라피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슴을 쭉 뻗으며 자신감 넘쳐하는 펜드래건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무영을 바라봤다.
“두 사람에게 ‘퍼스트 나이트’의 시험을.”
“퍼스트 나이트! 아아, 드디어 짝을 두시려는 거로군요.”
성녀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라피나도 성녀후보였기에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이단 심판관 중에서 유일하게 세라피나만이 여태껏 퍼스트 나이트가 없다는 사실도 꽤 유망한 이야기였다.
퍼스트 나이트는 단 한 명만 두는 게 가능해서 ‘짝’이라고도 불린다.
세라피나의 짝이 누가 될지에 관해 뮬라란에서조차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성녀가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지의 성녀시여. 펜드래건이라고 합니다.”
펜드래건은 한쪽 손으로 가슴을 쳤다.
그 위풍당당함에 성녀도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늠름하시네요. 대지가 그대를 반기는 게 느껴져요.”
“내 제자이니 당연히 그래야지.”
한성이 또 다시 제자 자랑에 나섰다.
이쯤 되면 팔불출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성녀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용군주의 제자시라니. 정말 인류의 축복이로군요.”
“과찬이십니다. 하하······.”
펜드래건은 그런 한성을 향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스승의 이름값을 빌리는 게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어 성녀가 오른손을 뻗어 펜드래건의 이마에 대었다.
그러자 빛이 흘러나오며 몸의 불순물을 씻겼다. 정신이 맑아지고 두 눈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대지의 가호가 함께하길.”
“대지의 가호가 함께하길.”
성녀가 말했고, 펜드래건이 받았다.
퍼스트 나이트 후보에게 남기는 성녀의 축하이자 축복이었다.
남은 건 무영.
성녀가 발을 옮겨 무영의 앞에 섰다.
그리고 무영의 눈을 보는 순간, 성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눈빛. 선과 악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한 건 세라피나 쪽이었다.
“성녀시여. 그 사람의 이름은 가엘입니다. 말을 잘 못하니 양해해주시길.”
“알겠습니다.”
납득한 듯, 성녀가 무영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대지의 가호가 함께하길.”
청량한 빛이 무영에게도 스며들었다.
하지만 활기가 돋는다거나 눈빛이 깨끗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이미 무영의 몸엔 불순물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몇 차례의 특수한 각성을 겪으며 노폐물을 전부 배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조화’ 덕분인지 전신의 모든 세포가 균형을 맞추고자 움직였다. 무영은 숨만 쉬어도 몸의 독소를 배출할 수 있었다.
성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말했다.
“그럼······ 따라오세요. 퍼스트 나이트의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습니다.”
퍼스트 나이트에게 중요시되는 덕목은 순결함이며, 강인함이며, 또한 정의로움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퍼스트 나이트로선 실격이었다.
순결함은 당연히 신성력의 순도다.
더욱 고결하고 더욱 정순한 것.
양과는 관계없다. 양이 아무리 적어도 순도가 높으면 모든 걸 뒤엎을 수 있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봐야할 것도 바로 이 ‘순도’였다.
누구나 신도가 되어 신성력을 가질 수 있지만, 악한 자는 결코 이 순도가 높게 나오지 않는다. 진정으로 신앙을 바쳐야만 더욱 큰 세례를 받는 것이다.
투명한 색의 구슬. 어른 머리통만 한 그것이 방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신성력의 순도를 측정할 수 있는 구슬이에요. 여기에 신성력을 쏟으면 순도를 알 수 있답니다.”
성녀의 설명에 펜드래건이 앞장섰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솔선수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다.
성녀가 이채를 띠며 펜드래건을 바라봤다.
저 정도라면, 다른 퍼스트 나이트들과 비교해서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아직 시험을 치르지도 않았지만 성녀가 보기엔 그랬다.
“양 손을 올리세요. 그 다음부턴 절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성녀가 재차 설명하자 펜드래건이 구슬 위에 양 손을 올렸다.
그는 모두의 어머니 ‘이데아’의 세례를 받은 자.
어느 정도의 순도가 나올지는 성녀뿐만 아니라 세라피나도 자못 궁금해 하고 있었다.
수아아악!
곧 구슬이 환한 빛에 잠겼다.
그러자 구슬의 밑바닥에서부터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을 넘어 막힘없이 올라갔다.
잠시 후 빛이 멎었을 때 모두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86%!”
성녀가 감탄했다.
거의 성녀수준에 육박하는 순도였던 탓이다.
남자는 이렇게 순도가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세라피나도 펜드래건을 다시 봤다는 듯 바라봤다.
펜드래건이 콧잔등을 쓸었다.
“괜찮게 나왔나 보군요.”
“괜찮은 수준이 아니에요. 성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 만한 잠재력이라니······.”
신성력 순도에 따라 여자는 성녀가, 남자는 성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순도만 높다고 성녀와 성자가 무조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다음은 무영의 차례였다.
무영은 가만히 구슬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그러자 등이 간질간질해졌다.
날개가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제어했다.
‘신성력을 유도하는 장치인가 보군.’
신성력의 발현이 날개를 자극한 것이다.
무영은 내심 혀를 찼다.
이후 구슬의 쓰임새를 대충 짐작하곤 무영이 신성력을 부었다.
화아아악!
펜드래건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밝은 빛이었다.
양은 적었지만 모두의 눈을 멀게 하기엔 충분했다.
동시에 구슬이 차올랐다.
중간을 순식간에 넘어 70%, 80%, 90%마저 넘겼다.
그것을 바라보는, 무영을 제외한 모두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이윽고 빛이 멈췄을 때 구슬의 전체가 밝게 발열하는 중이었다.
“99.9······.”
마지막 한 줄이 아쉽게 차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악을 넘어서 경이로운 수치였다.
인간의 한계라는 89%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성녀가 무영을 바라봤다. 세라피나도 무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점차 달라졌다.
성녀는 믿지 못했고, 세라피나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천사가 맞았어.’
순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만한 순도를 내었다면, 천사 말곤 없다. 신이라 해도 믿을 수 있다.
여태까지 했던 의심이 단번에 사그라졌다.
의심이 사라지자 안도감이 생겼다. 도리어 무영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성녀는 연이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수십 년간 이런 적은 없었다.
이만한 순도를 가진 인간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구, 구슬이 고장이 난 걸까요?”
우스갯소리다. 구슬이 결코 고장 날 리 없다는 걸 성녀도 알았다.
모든 사제와 성녀, 성자, 그리고 성황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니까.
“저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 겁니까?”
펜드래건이 이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86%라면 능히 성자급이다. 이 정도 순도를 가졌는데 어느 누가 질 생각을 하겠는가.
그런데 졌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믿기지 않았다. 용군주 한성조차 침묵할 수준이었다.
“나올 수 없어요. 그게 정설이에요.”
성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89%이상은 나온 적이 없다. 본 적도 없고.
구슬은 순도를 측정하지만, 90%이상부턴 순전히 상상의 영역이었다.
비교할 표본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실상 비교가 무의미했던 것이다.
불신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펜드래건이 무영을 한 차례 노려보곤 말했다.
“다음 시험을 준비해주십시오.”
“다음 시험은 달이 떴을 때 치러집니다. 우선······ 쉴 수 있는 궁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성녀가 스스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얼굴이 불에 댄 듯 화끈거리고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사다.
당장 성황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성녀가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세라피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작게 입모양을 바꿨다.
‘당장은 알리지 말아 달라’고 세라피나가 말하고 있었다.
무영에게 배정된 숙소는 제법 커다랬다.
무영은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브리엘의 영향인가?’
적당히 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순도라는 게 조절한다고 되는 게 아닌 듯싶었다.
로드 클래스, 대천사.
하물며 대천사 가브리엘의 힘이다.
오로지 ‘정의’를 추구하는 힘이 숨겨질 리도 만무했다.
오죽하면 루키페르조차 숨을 죽이고 있을 지경이지 않은가.
똑똑!
머지않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세라피나였다.
“들어와라.”
끼이익!
문이 열리자 예상대로 세라피나가 들어왔다.
세라피나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얀색 원피스의 차림으로.
털썩!
그리곤 직선으로 다가와 무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분을 알아보지 못한 제 우매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알아봤으면 됐다.”
“의심으로 가득 찬 이 두 눈을 도려내겠습니다. 그걸로 용서가 되신다면······.”
세라피나가 짧은 비수를 꺼냈다.
꿈쩍도 안 하며 그대로 자신의 눈을 찌르려고 하자, 무영이 발로 세라피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소리와 함께 세라피나가 옆으로 쓰러졌다.
“커흡!”
비수도 바닥에 떨어졌다.
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라피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훼손하지 마라.”
“그럼······, 이 불신을 어찌 해야 하죠?”
“시간은 많다. 천천히 갚아 가면 될 일이지.”
가브리엘은 자비의 천사이기도 하였다.
세라피나는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인재다.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었다.
여기서 괜히 생각을 많이 하게 놔둬선 안 된다. 무영은 곧장 다른 주제를 꺼냈다.
“마신의 견제를 위해선 신을 죽이는 창이 필요하다. 너도 알 것이다.”
“······ 예. 신을 죽이는 창은 ‘자멸의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현재 수많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에요.”
세라피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더는 숨기지 않기로 한 듯싶었다.
헌데, 자멸의 언덕?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무영은 망치로 머리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디아블로스의 제단이 있는 곳.’
설마 신을 죽이는 창이 그곳에 있을 줄이야!
그뿐만이 아니다.
스노우.
그녀가 무영을 부른 곳이기도 하였다.
< 41. 신을 죽이는 창(完) > 끝
ⓒ
< 42. 용군주(1) >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무영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스노우는 처음부터 지금의 일을 예견하고 자신을 부른 게 아닐까.
어차피 자멸의 언덕으로 오리라고 본 것이다.
스노우······ 과거 가장 강한 성녀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무영의 입장에선 그다지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태생에 대하여 의문이 있었을 뿐.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어떠한 이종족 또한 아니었으며, 천사는 더더욱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은연중 ‘베일’이라고 불렀다.
‘나를 부른 이유.’
꺼림칙했다.
모든 걸 읽고 무영을 불렀다면, 그녀야말로 대예언가라고 칭할 만 하였다.
누군가가 받는 신내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세세함.
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하고 꺼림칙했던 것이다.
혹여나,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사실마저 읽어냈다면?
‘위험하다.’
그래.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무영에게 있어서 위험한 인물이 스노우일지도 모른다.
무영은 강해졌다. 강해지고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혹은 경험을 살려서 그것이 가능했다.
스노우가 적으로 돌아설 경우, 무영이 앞으로 행할 것들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할 테지.
무영이 지금 웡 청린을 노리는 것처럼 ‘결과’를 안다면 난이도가 훨씬 낮아지는 법이다.
최악의 수까지 염두에 두었다.
스노우는 분명히 무영에게 도움을 줬지만, 그 도움이 마냥 호의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기엔 너무 달았던 탓이다.
그래, 달다.
무영은 그저 달기만 한 음식을 덥석 집어먹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
스노우가 무영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봐야 계산이 맞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마음속에 한 자루 칼을 갈았다. 스노우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아내기 전까지 이 칼이 무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퍼스트 나이트가 되셔서 움직이는 게 편할 거예요. 무영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곳엔······ 눈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럴 생각이다.”
무영은 짧게 답했다.
그러자 세라피나의 눈에 안도가 스며들었다.
두 눈을 도려낼 각오로 왔으나 무영이 막았다.
그 과정이 다소 격하긴 했지만, 우히도 말하지 않았던가.
‘희망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다만, 그 표현이 과격할 뿐이라고.
“다음 시험의 내용은 뭐지?”
무영의 눈이 세라피나를 관통했다.
펜드래건.
그는 과거 세라피나의 퍼스트 나이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무영에겐 그 자리가 필요했다.
이 직위로 말미암아 그가 과거에 중요한 무언가를 이룩했다면 모를까, 적어도 무영이 아는 한도 내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퍼스트 나이트보단 용군주 한성의 제자라는 직함이 더욱 강력하다.
고로, 무영은 그 자리를 찬탈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토끼를 잡는 데에도 온힘을 기울이는 사자처럼.
미리 도전과제를 듣는 건 반칙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기는 게 같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고 싶을 따름이었다.
“병장기술을 봅니다. 퍼스트 나이트는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세라피나가 거침없이 설명했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무영이 기본 검을 쓰긴 하지만, 사실상 병장기란 병장기는 전부 다뤄보았기에.
‘국자로 싸운 기억이 나는군.’
지금은 지난 과거의 일.
주방에서 변장한 채 잠입한 것이 들켜 국자로 싸운 기억이 떠올랐다.
작게 미소 지었다.
과거를 떠올리고 웃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방증.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처럼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활을 들었다.
빠르게 나는 표적을 맞추는 일.
총 20개의 표적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저 20개를 빠르게 맞추는 사람이 이기는 싸움.
퉁. 퉁.
무영은 활을 약하게 당기며 탄성을 확인했다.
‘좋은 활이다.’
신검합일. 검과 하나 되었으나 만류귀종이라고 하였다. 결국 모든 무기의 쓰임새는 비슷하다는 뜻이다. 다루고자 한다면 검이든 활이든 다루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가엘님. 펜드래건님. 그럼······ 시작해주세요.”
가엘은 무영의 가명이다. 가브리엘을 줄여서 대충 가엘이라고 둘러댄 것이다.
성녀가 신호를 보내자 펜드래건이 먼저 활시위를 당겼다.
투우웅!
퍽!
정확히 표적의 중앙을 맞췄다.
표적이 쓰러지자 펜드래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러면서 무영에게 눈길을 줬다.
그에게 있어서 최대 라이벌은 무영이었다.
허나 무영은 자신의 할 일만을 묵묵히 행할 따름이었다.
무영은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암활단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살수림 내에도 조직이 많다.
각자 전문분야로 나뉘어 관련 된 무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암활단은 당연히 활을 쏘는 살수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동시에 세 개의 화살을 건다. 결코 표적을 빗 맞추는 일이 없다.
무영은 두 개가 한계였다. 세 개부턴 정확성이 확 떨어진다.
슈슉!
퍼퍽!
연차적으로 두 화살이 날아가 표적에 박혔다.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
그것을 본 펜드래건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누구지? 저런 자가 어떻게 종자일 수 있단 말인가.’
원래라면 퍼스트 나이트가 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용군주 한성의 이름을 제하더라도, 펜드래건은 확실히 강자였다.
신성력의 순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강해지고자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웬 이상한 놈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지만 나이가 많아보이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의 또래, 혹은 조금 더 많은 정도.
그리고 펜드래건이 아무리 눈치가 없대도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다.
세라피나가 무영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질 수 없다.’
펜드래건의 양 눈에 불이 치솟았다.
어렸을 적 한 번에 불과하지만 세라피나를 보고 푹 빠졌다.
힘들 때면 그녀를 떠올리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오로지 그녀의 처음이 되기 위함이었다.
헌데······.
빠득!
다른 이는 몰라도, 무영에게만큼은 질 수 없었다.
십팔반병기.
열여덟 가지의 무기와 그 무술에 대한 말이다.
대체로 무기의 종류는 이 열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여 시험을 받는 것도 열여덟 가지에 달했다.
그리고 무영은 10가지가 넘는 무기를 다루며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달인처럼 자연스럽게 펜드래건을 찍어 눌렀다.
하나의 무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보통 10년이 필요하다.
열여덟 개 모두를 저처럼 다룰 수 있는 자는 없다.
이는 대개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강하군.”
용군주 한성.
그는 어제일이 있은 직후부터 무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강하다. 능히 강자의 반열에 들 정도로.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있었다.
저게 전부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펜드래건으로는 무영의 진심을 끌어내는 게 불가할 듯싶었다.
‘저런 자가 있었던가?’
한성은 인류가 마계로 소환되기 시작한 직후에 발을 들였다.
마왕들과의 전쟁, 괴물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세우는 것 모두 한성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럴진대 무영과 같은 자는 본 적이 없다.
웬만한 강자들을 줄줄이 꿰어 차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성이 모른다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세라피나. 저 자를 어디서 구한 게냐?”
“운이 좋았습니다.”
세라피나는 말을 아꼈다.
그 사이에도 무영은 연전연승을 달려 나갔다.
펜드래건의 표정이 붉은 걸 넘어 점차 흙빛에 가까워졌다.
압도적인 실력 차.
펜드래건은 아직 어리기에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구나.”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럴지도 모른다? 어허, 세라피나야. 비밀이 많은 여자는 사랑받지 못한단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충실한 종이기에.”
충실한 종은 무언가를 받는 것보다 주는 쪽에 속해있었다.
세라피나의 시선이 무영에게 닿았다.
어느덧 열일곱 번 째.
창과 창술의 대결이었다.
오로지 창을 이용해 창술의 달인 열 명과 대련을 벌이는 것!
“창이라.”
무영은 창을 쥐곤 휙휙 돌려보았다.
그리고 적당히 감을 잡았다는 듯 달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치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어가, 그들의 공격을 물 흘리듯 흘려내며 한 명씩 맥을 끊었다.
죽지는 않았으나 무영의 창을 맞고 쓰러진 이가 속출했다.
무영은 결코 간단히 하는 법이 없었다.
“대단하구나. 모든 병기를 저렇게 다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닐진대.”
한성이 감탄했다.
어떠한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한 창술로써 저만한 모습을 보인 것이니 더욱 놀랍다.
결국 17번 째, 창의 대결마저 펜드래건이 패했다.
마지막은······ 검.
검은 서로간의 대결이었다.
무영과 펜드래건이 마주섰다.
“검만큼은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졌다.
열 일곱 개의 병기를 다루면서 졌는데, 검 하나를 이긴다고 승자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펜드래건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구나, 어려.”
용군주 한성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펜드래건은 젊은 나이답게 혈기왕성했다. 달려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게 느렸다. 어리면 대개는 저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대련이 시작됐다.
무영은 눈을 감고 검을 들었다.
펜드래건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이윽고 펜드래건이 지척에 달했을 때, 무영은 눈을 떴다.
그리고 오로지 한 점을 향해 검을 질렀다.
콰직!
검과 검이 부딪혔다.
이내, 펜드래건의 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스스스······.
균열이 심해지더니 가루가 되어 바닥에 스러졌다.
단 한 합.
아무런 마력도, 신성력도, 스킬도 쓰지 않았다지만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굳이 검을 섞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무영은 무심하게 몸을 돌렸다.
“이, 이건 사기다! 이럴 순 없어!”
펜드래건이 악에 바쳐 소리쳤다.
그럴 만도 했다.
한성을 제외하고 처음 만난 벽.
하물며 꿈을 막은 채 버티고 있는 벽이었다.
어찌 분하지 않을까.
그 모습을 한성이 바라봤다.
“수준이 안 맞는구나.”
펜드래건은 강하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강했다.
단지 그 차이.
하지만 마지막에 보인 한 수는, 한성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검 자체를 파괴시키는 검술이라니.
“다음 검의 대련대상으로 제가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한성이 성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성녀가 곤란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한성님이요? 하지만 이미 결과가······.”
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결과를 번복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의 제자가 약했기에 진 것이지요. 하지만 승자는 이대로 끝내기가 아쉬운 모양입니다.”
“예?”
성녀가 의아해했지만, 한성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말을 걸었을 따름이다.
한성이 무영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무영이 발걸음을 멈췄다.
“시험을 치루며 계속해서 내게 투기를 날리더구나. 내가 누군지는 모르지 않을 터인데······ 하지만 나도 이제는 네게 흥미가 생겼다.”
한성이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 가면을, 벗겨보고 싶었다.
게다가 무영이 한성에게 투기를 계속 날린 것도 사실이었다.
여태껏 무시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무영은 투구 안에서 한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 42. 용군주(1) > 끝
ⓒ
< 42. 용군주(2) >
처음부터, 무영의 관심은 펜드래건에게 있지 않았다.
펜드래건은 강하긴 하지만 무영이 신경 쓸 수준은 아니다.
어차피 무영의 승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과 같았으며 펜드래건이 아무리 발악해야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걸 알았다.
하지만 펜드래건의 스승은 다르다.
용군주 한성!
인류최강에 가장 가까운 남자.
특히 용과 함께 싸울 때의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마왕들조차 그가 출현하면 몸을 사렸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무영조차 말이 3년이지 천운이 닿았기에 암살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그는 지쳤고, 피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붙어보고 싶다.’
암살이 아닌, 정정당당한 대결을 펼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펜드래건과의 대결 도중에도 계속해서 투기를 쏘아댄 것이다.
한성의 반응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한성이 걸려들었다.
제자의 허무하기 짝이 없는 패배. 아무리 신경을 안 쓴다고 하더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으리라.
“너는 충분히 강자다. 하지만 너무 오만하구나.”
한성도 무영의 의도를 적잖게 읽었다.
그리고 무영에게서 무한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용군주인 자신을 상대로 저런 자신감이라니!물론 없는 것보단 낫지만 과하다. 과한 건 없느니만 못할 때가 많다.
펜드래건은 이제 햇병아리. 반면 무영은 고수였다.
한성은 처음 무영을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고수는 숨기려 해도 티가 난다. 한성쯤 되는 이라면 더욱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절제된 동작과 심장소리마저 규칙적이라면 평범한 이일 리는 결코 없으므로.
말도 안 되는 신성력 순도.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르는 초신성이었지만, 한성이 ‘군주’라 불리는 이유는 패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칼 조각.”
무영은 짧게 말했다.
한성이 성녀에게 보인 칼 조각. 킹슬레이어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것!
“이기면 칼 조각을 내놓으라는 소리냐?”
끄덕!
무영의 반응은 담백했다.
한성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감도 이 정도면 불쾌한 수준을 넘어 재밌다.
용군주라고 이런 도전을 안 받아본 것은 아니었기에.
“좋다. 하지만 내가 이기면 너는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자고로 내기란 쌍방에게 득이 되는 물건을 걸어야 했다.
용군주만 칼 조각을 걸 순 없었다.
그러자 무영이 품에서 현자의 비약을 꺼냈다.
“오호라. 현자의 비약이라면 조금 구미가 당기는구나.”
현자의 비약은 부르는 게 값이다. 무척이나 희귀해서 거대집단들도 몇 개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뛰어난 유망주에게나 먹일 정도.
한성은 딱히 적을 둔 곳이 없다.
현자의 비약을 수급하는데 제한이 있다는 말.
필시 펜드래건의 능력치 개화조차 몇 개 되어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제자사랑으로 보건대······.
“좋다. 받아들이마.”
반드시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은 안 한다.
이어 한성이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이 싸움의 과정과 결과는 비밀로 붙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넓은 궁 안에는 성녀, 세라피나, 무영과 한성, 그리고 펜드래건 뿐이었다.
한성의 싸움이 시작된다고 하면 사제와 성기사들이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인류최강에 근접한 남자와의 싸움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지금의 한성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혼돈이 지나고 진정한 영웅의 진면목이 드러내게 되지 지금은 아니다.
‘영웅이기 전, 오롯이 한성으로 존재할 때.’
그와 싸워서 자신의 명암을 뚜렷하게 새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영은 고개를 주억이며 비탄을 뽑았다.
그르렁!
비탄이 울었다.
순수한 검술의 대결.
그나마 무영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속과 결뿐이었다.
죽음을 다루는 스킬을 이곳에서 사용할 순 없었고, 그 외의 스킬은 너무 특색이 짙다. 무영이 천사로 유명해진 건 바로 그러한 스킬들 때문이었다.
반면 무영의 장비 같은 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긴다.’
무영 역시 진다는 생각은 안 한다.
물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전력으로 부딪혀도 될까 말까한 상대.
그럴진대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성도 마찬가지다.
한성의 진면목은 아르키사와 함께할 때 나타난다.
이곳에 마룡 아르키사는 없었다.
“그럼······ 시작하지.”
한성은 쌍검을 들었다.
그는 쌍검술의 대가.
또한 세 가지 시크릿 클래스의 보유자였다.
‘용의 계약자, 백검의 주인, 아이언 나이트.’
하물며 세 가지 모두가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들이었다.
무영과 한성은 한동안 서로를 살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의 머릿속에서 수백, 수천 가지의 경우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떠한 경로와 속도를 가지고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가장 최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는 한성도 마찬가지다.
‘마냥 달려들 줄 알았건만.’
의외였다. 무영은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신중하게 말이다.
처음 투기를 날릴 땐 힘에 취한 오만한 녀석으로 보았지만 싸움에 들어가니 그 모든 게 단순히 ‘보여주기’였음을 깨달았다.
‘그저 내가 반응하길 바란 거였군.’
제법.
한성은 무영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싸움은 더욱 질 수 없었다.
한성은 조금 더 진지하게 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수천 가지의 경우 중 한 가지를 읽었다.
‘찾았다.’
한성이 무영보다 한 발 빠르게 길을 찾았다.
상체를 살짝 숙인 채 양 손에 든 검을 늘어트렸다.
바람의 저항을 최저한으로 받으며 눈 깜빡할 사이에 무영의 앞에 섰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무영의 영역을 ‘침범’했다.
문을 두드리는 식의 노크는 일절 없었다.
그야말로 무단침입.
‘박자가 다르다.’
무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느닷없이 치고 들어와 침범했다. 평소라면 당하지 않았겠으나 한성의 박자는 일반인들과 달랐다. 한 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치이익!
갑옷이 긁혔다.
극적으로 반응했기에 얇다. 조금만 늦었어도 허리가 날아갔을 터.
무영의 입가가 떨렸다.
한성은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정말로 무영을 죽일 기세다. 그 역시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른다.
‘재밌군.’
무영은 즉시 반격에 들어갔다.
그대로 비탄을 횡으로 그었다.
쩌적!
한성이 검으로 막았으나 금이 갔다. 쌍검 중 하나가 이내 빛이 되어 흩날렸다. 그의 반응마저 생각하여 미리 결을 때린 것이다.
하지만 한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털었다.
그러자 검 하나가 더 생성되었다.
‘애초에 그가 사용하는 검은 그저 실체를 입힌 검이지.’
백검의 주인.
말 그대로 백 가지 검을 그는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 형체가 없으며, 스킬을 사용하면 무형의 검에 형체를 입히게 되어 세상에 발현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간은 놀란 기색이었다.
무영 역시 평범한 이들과는 박자가 다른 탓이다.
생체의 리듬, 감각, 모든 게.
일순 한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맹점.’
무영은 즉시 옆으로 몸을 던졌다.
쿵!
그러나 한성의 노림수는 역시나 무영이 몸을 던질 곳이었다.
발로 얻어맞았고, 무영의 몸이 궁전 기둥에 박혔다.
무영은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순수한 검술의 대결. 단순히 한, 두 수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는 안 된다.
결국 수 싸움이었다.
단순 능력치는 살짝 한성이 우세했다.
검술자체도 한성이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검일보다 더욱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무영에겐 한 방이 있다. 무영의 공격은 모두 치명적이다.
단 한 방이 모든 걸 뒤엎는 게 가능했다.
그것을 한성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격을 허용하지 않도록 공격에 신중함을 가하는 중이었다.
‘거대철인과 싸우는 기분이군.’
알렉산드로의 시련 중 가장 어려웠던 걸 꼽으라면 당연히 거대철인과의 삼종경기다.
무영은 그곳에서 무수히 패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도전했다.
재미가 있었고, 성취감이 있었다.
지금의 싸움이 그러하다.
무영이 말했다.
“제대로 가지.”
목을 양쪽으로 꺾으며 비탄을 제대로 쥐었다.
간보기는 끝났다.
성녀도, 세라피나도, 펜드래건도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성과 대등하게 싸우는 인간이라니!
그나마 세라피나는 경악이 덜한 편이었다.
무영이 천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날개를 펼쳤다면 한성조차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반면······ 펜드래건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스승님과 대등하게 싸운다고?’
저 정도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자신에게 가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
백번을 쳐도 바위는 부서지지 않는다.
펜드래건 자신은 계란이었다. 무영은 거대한 바위였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창피함, 굴욕감, 온갖 잡다한 감정들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펜드래건은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세라피나는 무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자신이 쳐다본다는 것조차 전혀 의식을 못하는 것 같았다.
‘졌다.’
인정했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퍼스트 나이트가 되면 뭐하나.
결국 세라피나의 마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대결을 할 때는 분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의 실력격차가 난다면 자신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세라피나의 뺨엔 홍조가 깃들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무표정하다.
그녀는 그저 집중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무영뿐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게 아닐까.
그만큼 무영이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 검술일지라도 모든 걸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
펜드래건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패배감은 오랜만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첫사랑의 끝을 알리는 눈물이었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펜드래건이 눈가를 닦아내곤 다시 전황을 바라봤다.
마침, 싸움이 끝나가고 있었다.
무영은 한성을 상대로 90개가량의 검을 깼다. 100개의 검을 두르는데 거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무영의 흐름은 확실히 이상하였다.
갑자기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했으니까.
그럼에도 한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강하게 몰아붙여 무영의 전신을 난자했다.
갑옷은 이미 넝마짝이 되어있었다.
서걱!
마침내 투구도 베었다.
하지만 입가만 드러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성의 우세. 실제로 무영은 힘을 조금씩 달려하는 중이었다.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
펜드래건이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촤악!
무영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반쯤 쓰러진 상태에서 비탄이, 한성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한성도 무영의 어깻죽지를 길게 베었다.
이후부터는 난도질의 시작이었다.
둘 다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로부터 장장 반나절.
“대단하군.”
얼마나 싸웠을까.
한성은 만족했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피가 눈을 덮었다.
전신이 걸레짝이 되었다.
둘 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
누구도 멈추지 못했다.
둘의 싸움을 멈추는 순간 더욱 큰 피해가 날 것 같았기에.
둘 다 칼 끝에 서 있었던 탓이다.
한 쪽이 멈춘다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다.
“······.”
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털썩!
둘은 동시에 쓰러졌다.
< 42. 용군주(2) > 끝
ⓒ
< 42. 용군주(完) >
장장 반나절가량 이어진 싸움.
모두가 침묵했다.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용군주 한성과 웬 무명의 남자 한 명이 싸우고 양패구상을 이뤘다.
있을 수 없는 일.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 눈앞에 놓인 것이다.
꿀꺽!
“어떻게…….”
성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심히 다가갔다.
용군주는 인류에게 있어서 특정한 ‘상징’과 같았다.
그런 이가 졌다는 게 만에 하나라도 알려지면 많은 이들이 휘청거릴 터.
혹여나, 상대가 그만한 대상이라면 모르겠다.
그러니 확인을 해야 했다.
척!
성녀가 무영의 투구를 벗기려고 하자 세라피나가 막아섰다.
“성녀님. 제 종자는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성녀님께선 한성님을 부탁드립니다.”
“아, 아아…… 그렇지요. 먼저 치유의 기도를…….”
성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 역시도 오랜 시간 한성이 인류최강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펜드래건은 그저 멍하니 서있을 따름이었다.
“커흡!”
그때였다.
한성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용의 강력한 마력이 흘러들어와 한성의 몸을 치유시킨 덕이었다.
안 그래도 재생력이 상상을 초월할 수준인데, 아르키사의 마력으로 말미암아 한성은 목이나 심장이 꿰뚫리지 않는 한 죽지 않았다.
“퉤!”
한성은 죽은피를 뱉어냈다.
그리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물 같은 놈이로군.”
무영에 대한 한성의 감상이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아르키사의 마력이 없었다면 못해도 수개월은 치료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용의 피부와 용의 재생력이 뚫린 건 십 수 년 만이었다.
한성이 한 발 내딛자, 다시금 세라피나가 막아섰다.
“제 종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려는 게 아니다. 너와 이 가엘이라는 남자는 서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만…… 다행이 스스로 회복을 하는구나.”
한성은 그저 무영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간 것뿐이었다.
무영의 전신에 미미한 빛이 어렸다.
신성력과 치유스킬이 자동으로 발동하여 몸을 고치고 있었다.
다만 빛이 약했다. 싸움의 중간 중간 아낌없이 회복을 사용했던 탓이다.
‘하!’
한성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무영이 사용하는 회복스킬은 회복이 아니라 거의 복원 수준이었다.
그걸 다섯 차례쯤 사용했는데, 그럴 때마다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이후 신성력이 고갈됐다고 생각했으나 그 사이에 조금씩 들어차고 있는 듯싶었다.
단순히 순도만 높은 게 아니다. 신성력의 회복능력도 출중했다.
이걸 어찌 괴물이라 아니할 수 있겠나.
“스승님! 이기셨군요!”
펜드래건이 부득불 달려왔다.
이전의 멍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있다면 오로지 안도감.
하지만 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신성력 잔여량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내가 패배했을 것이다. 아니…….”
이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다? 이걸 진정으로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찝찝했다. 무영이 본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한성도 마찬가지다.
아르키사와 함께하지 않았으며, 최후의 비기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검강이나 이기어검 따위의 그런 절초들.
순수한 검술의 대결이었기에 굳이 사용하진 않은 것이다.
그저 검술에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스킬들만 사용했다.
그러나, 한성은 용군주다.
군주라는 이름을 단 이상 그는 항상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양패구상을 이룬 것이다. 서로가 적당한 힘을 숨겼다 한들, 그게 변명거리가 되진 않는다.
한성은 눈을 꾹 감았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은 결코 자신이 이겼다고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싸움의 도중 한성은 몇 번이나 무영을 놓쳤다.
이윽고 한성이 무겁게 말했다.
“내가…… 졌다.”
*
무영은 눈을 떴다.
밝은 빛이 창가로 들어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기하군.’
상반신을 들어 올린 채 마지막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서로가 큰 상처를 입어 쓰러진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기절하여 실려 온 듯싶었다.
하지만 용군주와의 싸움을 상기하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용군주는 본심을 내지 않았다.
무영이 기억하는 용군주 한성의 힘은 저게 전부가 아니다.
검에 강력한 기운을 덧씌우는 검강과 백 개의 검을 동시에 자유자재로 날리는 이기어검의 구사자였다.
그러나 전력을 안 낸 건 무영도 마찬가지.
어둠과 관계된 힘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가속도 8배속까지만 내었다.
무영은 최대 16배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 절반만 사용한 것이다.
물론 서로의 전력을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무영이 이길 확률은 3할이 되지 않을 터다.
아르키사가 등장하고 한성이 이기어검을 사용하면 언데드 전부가 달려들어 봤자 3할미만.
그러니 양패구상이 신기할 수밖에.
‘아르키사는 바르사와 비교가 안 되는 용이다.’
드워프들과 사냥한 바르사는 꽤 어린 용이었다. 반면 아르키사는 성룡 중에서도 굉장히 강력한 편이었다. 비교가 불가하다.
무영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암살이 아닌 정통의 대결이었다.
만약 무영이 여기서 승리했다면 도리어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깨끗하게 인정했다.
졌다고!
그는 여전히 강했고, 강인했고, 벽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과연 영웅이라 칭할 만 하였다.
세뇌 당했지만, 그를 감시한 3년은 모두 기억이 난다. 그가 어떠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투쟁을 했는지 이 세계에서 오로지 무영만이 알고 있었다.
‘영웅의 재목…….’
40년 전이나 후나 여전히 출중한 사내이지 않은가.
그러나 마냥 넘는 게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무영의 성장속도는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한성만이 아니라, 아르키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날도 반드시 올 것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세라피나가 들어왔다.
손엔 물이 담긴 그릇과 수건이 들려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수건을 물에 담가, 짜내었다.
“뭐하는 거지?”
“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닦아드리겠습니다.”
세라피나는 정성스럽게 무영의 상반신을 닦았다.
스윽. 스윽.
잠시간의 정적.
누군가가 몸을 닦이는 이런 경험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여 무영이 물었다.
“퍼스트 나이트의 시험은 어떻게 됐지?”
“합격하셨습니다. 성녀님께서 정식으로 성황님께 관련된 서류를 보내실 거예요. 저희가 ‘자멸의 언덕’에 도착할 쯤엔 모든 게 완료되어 있을 테지요.”
“그렇군.”
“죄송합니다만 팔 좀…….”
무영이 오른쪽 팔을 엉거주춤 들었다.
옆구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수건의 감촉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성. 그는 어떻게 됐지?”
“일찍이 회복하고 어제 그 궁 안에서 검을 휘두르고 계십니다.”
마룡 아르키사의 마력이라면 무영이 기절하고 얼마 안 있어서 회복을 끝마쳤을 것이다.
심장이 뛰었다.
어제의 궁 안에서 검을 휘두른다는 건, 무영과의 싸움을 복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도 무영에게서 무언가를 얻은 모양이었다.
무영 역시 한성의 검술 안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일어나야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몸이.”
“몸은 다 회복되었다.”
‘신성한 축복’이 자동으로 발현이 되었다. 덕분에 몸 자체는 홀가분했다.
방의 벽 쪽엔 새로운 갑옷과 투구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무영이 고개를 돌리자, 세라피나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무영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무영의 곁을 지킨 것이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무영을 탐색하고자 한다면 지킬 요량으로 말이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을 죽이는 창이 발견될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지.’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기책이 떠올랐다.
“한 번 더 싸우지.”
궁을 찾아간 무영이 한성을 보자 대뜸 싸움을 청했다.
검을 휘두르던 한성의 눈썹이 휘었다.
“자네, 그러고 보니 말을 잘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게 말을 하고 싶을 때 한다는 소리였군.”
무영이 품을 뒤졌다.
이윽고 현자의 비약을 꺼냈다.
“받아라.”
“어제의 싸움에서 네가 졌다고 생각하는 게냐?”
“그렇다.”
“아니다. 내가 졌다. 그러니 굳이 비약을 줄 필요는 없다.”
한성은 고개를 저으며 품에서 칼 조각을 꺼냈다.
하지만 무영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승자에게만 주어진 권리. 그러나 어제의 싸움은 누가 봐도 무영의 패배였다.
“내가 졌다.”
“어허, 내가 졌대도.”
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스스로가 패배했다고 자인하는 꼴이지만 둘은 한 치도 물러나질 않았다.
“내 쪽이 먼저 쓰러졌다.”
“누가 봐도 동시였다.”
“먼저 일어난 것 역시 그쪽이다.”
“내가 아니라 아르키사의 마력 때문이었지.”
“너는 본심을 내지 않았다.”
“너는? 말이 좀 짧…… 흠, 하여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졌다.”
“말이 안 통하는 친구로군.”
한성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는 얕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한 번 더 싸워서 결판을 낼 수밖에.”
마침 한성도 어제의 싸움을 되새기고 있었다.
무영의 싸움은 한성이 겪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도 처절하고, 공격적인 움직임이라니!
“아무런 스킬도 사용하지 않겠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임해 달라?”
어제와는 또 다른 규칙이 정해졌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군.”
한성이 검을 소환했다.
이번엔 쌍검이 아니다.
열 개의 검이 나타나고 이내 합쳐졌다.
십검(十劍).
백 개의 검을 합치면 비로소 진짜 백검이 완성된다.
그것이 백검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중 십검을 사용한 것이다.
십검을 드러냈다는 건, 무영을 진정한 적수로 인정했다는 뜻!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태도였다.
“그래도 내가 사용할 검은 내가 골라도 되겠지?”
끄덕!
무영이 허락하며 비탄을 뽑았다.
그르릉!
비탄이 더욱 거칠게 울었다.
궁에서 지낸 10여 일간.
무영은 매일 싸웠다. 한성과 검을 부딪쳤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나갔다.
무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닌, 순수한 성장.
한성은 매일 달라지는 무영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는 무영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해 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 이유가 못내 궁금했다.
10일이 지나고, 무영이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지 않다.”
어째서?
무영의 눈이 그리 물었다.
한성은 피식 웃었다.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지. 그저 스쳐가는 사람은 알아봤자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계속 만나게 될 사람 역시 일부러 알려고 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쪽 사람 같으냐?
무영은 그제야 한성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성은 무영을 ‘계속 만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슷한 길을 걷다보면 계속해서 만날 이라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무영을 알게 되는 날이 올 텐데, 잠시의 궁금증에 억지로 알아낼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한성이 궁의 바깥에서 석양을 바라봤다.
사악! 사악!
마침 아르키사가 날갯짓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성은 천천히 아르키사의 위에 올라탔다.
“나는 이제 떠나야 한다. ‘현자의 방’으로 가서 용들의 왕께서 부탁한 일을 알아 봐야하니.”
“이게 없어도 되는 건가?”
무영은 한성에게 이미 검 조각을 받은 뒤였다.
무영 역시 한성에게 현자의 비약을 건넸다.
어쩌다 보니 물물교환의 형태가 됐지만 검 조각은 ‘용들의 왕’이 부탁한 일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물건이지 않나.
그것을 시원스럽게 줘 버린 게 걸렸다.
“대충 복사해 놨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성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검 조각의 형태가 손 위에 생성됐다.
백검은 저처럼 검을 복사해낼 수도 있었다.
100%는 아니어도 80~90%가량 ‘흉내’는 낼 수 있다.
“이걸로도 완벽하진 않지만 알아보는데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성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펜드래건을 비롯한 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내 제자는 꽤 집착이 있는 편이다. 죽이지만 말아다오.”
크르릉!
아르키사가 짧게 울었다.
수아아아악!
날갯짓을 시작하자 주변이 들썩일 정도의 강풍이 일었다.
이윽고, 용군주 한성이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떠나갔다.
물론 그냥 가진 않았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승부를 내자.’고, 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제대로 된 승부라…….’
싫더라도 그럴 생각이다.
다음번에는 전력으로 임하리라.
그러니 한성 역시도 모든 걸 내보여야 할 것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무영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 42. 용군주(完) > 끝
ⓒ
< 43. 살수림(1) >
한성이 떠나고 펜드래건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래부터 방랑벽이 있으시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실 줄이야······.”
용군주 한성은 한곳에 잘 머무르는 성향이 아니다.
방랑벽이라 칭할 정도로 마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시크릿 클래스를 세 개나 얻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행했을 지는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펜드래건이 고개를 돌려 세라피나를 바라봤다.
“스승님께선 제가 세상을 경험하길 바라셨습니다. 한동안만 함께 동행을 하는 걸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마냥 좌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보고 다른 목적을 세운 것이다.
세라피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퍼스트 나이트는 이미 무영으로 확정되었다.
이단 심판관을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 하지만 펜드래건은 이제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직위는 얻지 못했으나, 진실한 사랑은 얻을 것이다.’
펜드래건은 젊었다. 혈기가 넘쳤다. 꿈도 컸다.
한 번 좌절을 겪었다고 꺾일 남자도 아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성의 제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무영에게 퍼스트 나이트를 건네게 되었지만, 세라피나의 진실한 사랑만큼은 자신이 얻을 것이라며 열의를 불태웠다.
무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성의 제자다. 분명히 그에게도 얻을 건 있었다.
‘마침 잘 됐군.’
무영은 10일 밤낮을 한성과 싸웠다.
오로지 순수한 기술만을 사용하며.
한성의 검술은, 체계적이진 않았으나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많이 싸운 나머지 식을 잊을 정도의 고수!
솔직히 무영의 검술은, 검일과 킹슬레이어의 것을 베낀 데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 살수림에서 배웠던 기술을 섞어 매우 공격적이긴 하였으나 부족함이 있었다.
공격일변도의 한계를 한성과 겨루며 알게 됐다.
‘나만의 검술을 만들고 싶다.’
단순히 스킬을 얻는다고, 능력치가 높아진다고 전부가 아니다.
기본밑바탕. 기둥이 건실하고 높아야 더욱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법이다.
무영은 검일, 킹슬레이어에 이어서 한성의 검술을 탐냈다.
그리고 그 한성의 검술로부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게 펜드래건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하였으니, 한성과 펜드래건의 모든 걸 분석하며 무영만의 검술을 만들어낼 작정이었다.
‘설마 내 이름을 딴 검술 스킬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무영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곤 피식 웃었다.
한성과의 대결이 있은 후 작은 깨달음을 얻어 달밤에 검을 좀 휘둘렀다.
어쩌면 달에 취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웬걸. 처음으로 검술과 관련된 스킬이 생성된 것이다.
스킬명칭 : 무영검술(???)
설명 - 스스로의 검술을 만들기 시작한 무영의 고유검술이다. 아직 미완성이며, 완성되면 그 결과에 따라 랭크가 매겨진다.
설명은 별 게 없다.
그러나 아직 미완성이라는 게 중요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검술이, 조금씩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성과의 대결은 무영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와 바꾼 현자의 비약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마침 무영도 킹슬레이어의 검 조각을 얻었으므로.
검 조각을 바라보던 무영이 시선을 옮겼다.
한성은 떠났다. 남은 건 펜드래건뿐이었다.
“펜드래건님. 퍼스트 나이트는 가엘님으로 이미 정해졌습니다.”
“압니다. 그와 경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식객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고 생각해주시길.”
“······ 퍼스트 나이트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펜드래건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다.
그는 무영과 경쟁을 할 생각이 만만했다.
헌데 무영의 허락이 있어야만 따라올 수 있단다. 맨 정신으로 듣기엔 괴로운 말이다.
“조건이 있다. 나와 매일 같은 시각 대련을 해야 한다.”
무영은 시원하게 말했다.
둘의 실력 차이는 이미 극과 극이다.
그런데도 대련을 하려는 건, 그럼에도 얻을 게 있기 때문이다.
약자라 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니니.
무영은 자신의 검술을 완성하고자, 모든 걸 해볼 작정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그리고 과거에도 없었던 자신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도전이었다.
오로지 무영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그런 일.
어찌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영의 뜻은 간단하게 왜곡되었다.
펜드래건의 입장에선, 유세를 떠는 걸로 보였다.
대련이라고 해봤자 일방적인 폭력밖에 더 되겠나.
이미 펜드래건은 무영과의 실력차이를 인정했다. 아직까진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순수한 싸움이라고 하더라도 한성과 대등하게 대련을 하는 이는 태어나서부터 본 적이 없었다.
‘매일 나를 이겨서 그 모습을 세라피나님에게 보이려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펜드래건은 그다지 비관적인 성격과도 거리가 멀었다.
‘스승님이 인정한 사내다. 나도 그에게 얻을 게 없진 않겠지.’
요즘 실력이 정체하고 있었다.
그 돌파구가 무영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여자는 열심히 하는 남자에게 시선이 간다고 하셨다.’
한성의 지론이었다.
승패와 관계없이 여자는 열심히 몰두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쓰러져도 일어나면 그만이다. 펜드래건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렇다면 무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걸 배우겠다고 다짐했다.
“알겠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서로의 교환이 끝났다.
같은 대련 속에서 서로 다른 흑심이 교차한다.
무영이라고 펜드래건의 갑작스러운 변심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동상이몽이 따로 없군.’
하지만 누가 꿈으로 남고, 누가 현실로 만들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퍼스트 나이트가 되며 바뀐 게 있다.
우선 주변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시선.
“진짜 퍼스트 나이트가 될 줄이야······.”
“용군주님과도 각별한 사이가 됐다더군.”
“세라피나님의 퍼스트 나이트는 영원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들도 사람인지라 놀라움 속에 약간의 질투와 시샘이 섞여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세라피나의 철벽과도 같은 방어는 뮬라란에서조차 유명하다.
“이게 몇 명만이지?”
“대충 50명은 넘지 않았을까.”
무려 50명이 넘는 도전자가 세라피나의 퍼스트 나이트가 되려고 했다.
그들은 모두 퍼스트 나이트가 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아무나 도전할 수 있었다면 50명이 아니라 500명으로도 안 끝났을 것이다.
하여간 그 50명 중에는 도시의 주인이나 자제들도 있었고, 길드나 세가의 유력한 인물도 있었으며, 뮬라란의 고위 사제와 성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실패했다. 세라피나의 기준이 너무 높았던 탓이다.
그럴진대, 이번 시험은 석연치 않다.
“기본 시험만 치렀다지?”
“‘10가지 시험’을 넘어가고?”
“이 이야기가 퍼지면 도전했던 자들의 항의가 빗발을 치겠군.”
‘세라피나의 10가지 시험’은 유명하다.
워낙 많은 사람이 도전을 해 와서, 세라피나가 자체적으로 시험을 어렵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기본 시험만 치렀다. 당연히 무영은 가볍게 통과했다.
사실 그 정도라면 기존에 도전했던 50명도 모두 통과할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이전에 도전한 50명만 ‘새’가 된 셈.
세라피나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귓가에 들렸지만, 단번에 일축해버렸다.
“그는 용군주인 한성님과 검을 맞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궁 안에서 일어난 일은 그곳에 있었던, 성녀를 포함한 몇 명만 안다.
당연히 사제나 성기사들은 무영과 한성이 싸웠는지 알지 못했다.
세라피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군주와 검을 맞댈 자격!
말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용군주와 비슷한 힘을 지녔다, 용군주가 인정한 남자다, 용군주보단 약하지만 그만한 잠재성을 지녔다, 혹은 엄청나게 고귀한 핏줄을 이었다······.
이로써 무영에 대한 악의는 사라지고 신비만이 남았다.
말 한 마디가 가진 힘.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무영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애당초 무영은 한성이 떠나간 이후, 펜드래건과 대련을 할 시간이 아니면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이다.
‘나만의 검술.’
모방에서 벗어나 오리지널을 만들고자 하는 집념!
이것만큼 과거와 차별화 되는 점은 있을 수 없다.
무영은 밤낮이 없었다.
한성이 체계를 잊었다고 하지만, 검속에 자연스럽게 그의 검술이 녹아있을 따름이다.
그만큼 검술이란 이름의 골격은 중요한 것이었다.
‘모든 걸 아우르고 싶다.’
태양과 달, 바다와 하늘, 부드러움과 강직함, 빠름과 느림······ 그 모든 걸.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몰두하느라 무영은 거의 반 폐인이 되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볼이 홀쭉해지고 눈에 검은 줄이 쳐졌다.
그 정도로 고도의 집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적이 없었을 정도로 무영은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나마 세라피나가 아니었다면 해골처럼 변해버렸으리라.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무영은 골방에서 나왔다.
‘이곳에선 더 만들 수 없다.’
모든 걸 아우르려면, 모든 걸 경험해봐야 한다.
그중엔 당연히 ‘복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 무영이 살수림을 지운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몸부림이었을 따름이지.
모두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었는데, 그게 어찌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복수는 상대의 모든 걸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앗아간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골방에서 나온 무영을 보고 세라피나가 눈을 부릅떴다.
“끝······ 나셨나요?”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짧게 말했다.
“자멸의 언덕으로 가자.”
웡 청린에게로 가자.
자멸의 언덕엔 본래 디아블로스의 제단이 있다.
당연히 디아블로스의 사제들도 있었다.
뮬라란에선 ‘이단’이라 취급하는 적들.
규모 면에선 상대가 안 됐기에 디아블로스의 사제들은 항상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뮬라란이 지도하는 마계에서 그들이 자리잡을 공간은 없었다.
“신녀시여. 뮬라란의 더러운 종자들이 저희의 산을 더럽히고 있나이다.”
“저희에게 답을 내려주시옵소서.”
“놈들에게 끝없는 절망과 저주를 퍼부어 주시옵소서!”
어두운 동굴 안.
거대한 공동 안에 수백의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신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답을 원했다.
뮬라란은 그들에게 있어서 역시 적이다.
지금은 비록 득세하고 있으나 없애야할 적이다.
헌데, 뮬라란의 성기사들이 거침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미 디아블로스의 사제들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이대로 있다간 전멸을 면치 못한다.
그러자 제단의 위에 있던 여인이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들은 결코 우리의 산을 더럽히지 못할 것입니다.”
쿵!
지팡이를 한 차례 내리쳤다.
동시에 산 전체가 한 차례 흔들렸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탈리스만의 결정이 지팡이에 박혀있었다.
탈리스만은 소원을 이루는, 대천사의 힘이다.
거기에 여인의 힘이 보태지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또한 여인의 목소리는 고혹적이었다. 그만큼 무겁기도 했다.
비록 면사를 착용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모두의 시선을 앗아가기 충분하였다.
여인의 특색은 또 있었다.
등 뒤로 곱게 뻗은 날개!
검은색 날개와 흰색 날개가 한쪽씩 나 있는 여인.
그녀가 바로 디아블로스 제단의 신녀였다.
< 43. 살수림(1) > 끝
ⓒ
< 43. 살수림(2) >
무영은 여전히 전신을 가리는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쓴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열의 맨 앞. 세라피나의 옆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진 검은 비정함이었다.’
살수림에서 40여 년간 배운 검은 오로지 비정함뿐이었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 그 하나만을 위해 무한정 갈려진 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검을 세우려거든 더욱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킹슬레이어는 안성맞춤이었다.
‘킹슬레이어. 그의 검은 정직하다.’
허나 무서울 정도로 정직하다. 모든 것의 약점을 꿰뚫고 정해진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중간을 막는 모든 걸 배제해버린다. 킹슬레이어의 검은, 흉내 내고 싶어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무영으로선 포기할 수 없었고 그 ‘틀’만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볼 따름이었다.
검일. 그의 검 역시 다른 색이 있다.
거미줄과 같다는 것. 촘촘하기 그지없다. 빠른 맛은 없지만 그만큼 진중하고 견고하다.
마지막으로······ 용군주 한성.
감히 사도라 칭할 수준의 검술이었다.
수년간 지켜본 과거가 있다지만, 직접 겪으니 더 잘 알겠다.
그는 틀이 없다.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변칙적이다.
이러한 고유의 색깔들을 무영은 최대한 빼앗았다. 그중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며, 더해 자신의 ‘색’을 입힐 궁리를 하였다.
‘쉽지 않군.’
이번 일은 계기였다.
과거를 답습하는 게 아닌, 전혀 다른 일보를 내걸을 계기.
창조신이 있다면, 세계를 만들 때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무영이 나은 점이라면 지향할 방향들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자멸의 언덕’에 이단자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군요.”
세라피나가 말을 타며 이동하던 와중, 작은 구슬을 통해 통신을 받고는 이와 같이 전했다.
그러자 펜드래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단자들? 사교도 말입니까?”
기본적으로 뮬라란은 다른 신을 섬긴다하여 ‘사교도’라 칭하진 않는다. 대부분 신의 뿌리는 모두의 어머니인 ‘이데아’의 자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교는 정상적인 신들을 섬기는 곳이 아니다.
그야말로 악신들.
혹은 72좌의 마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사교라 부른다.
그리고 무영은 자멸의 언덕에 모인 사교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디아블로의 사제들.’
본래라면 무영은 세 개의 반지를 모아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루키페르 덕분에 신격을 흉내 내어 스스로 제단을 움직였기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어떠한 이단종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산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한 악신의 추종자들이라더군요.”
“아직도 이단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다 제거된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펜드래건이 혀를 찼다.
과거, 마왕들이 인류를 처음으로 침공했을 때.
인간은 공포를 알았고 힘을 숭상하기 시작했다.
더욱 악한 것, 어두운 것, 미지의 것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하면 악마의 공격을 받지 않을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변질되었지.’
악마들의 침공이 끝난 뒤, 그들 중 몇몇은 기득권이 되고자 하였다. 도시를 만들고 병사를 모았다. 신의 이름하에 사람들을 잔인하게 착취했다.
강자들의 뒤에 숨어 이득을 취하던 이들이 득세하자, 암흑기가 도래했다.
인류의 전력은 극도로 취약해진 상황.
모두가 쉬쉬하던 차에, 뮬라란의 성황이 나섰다.
그리고 장장 10년간 ‘신성전쟁’이라 불린 피의 참극이 도래하였다.
이단종교와 사교도들은 그때 정리가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다.
“현재 파악된, 규모가 있는 이단종교만 하더라도 다섯 개는 된다고 해요.”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군요. 성황께선 아무런 조치도 없으신 겁니까?”
“현재의 성황께선 그다지 전쟁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세요.”
“아, 하긴······ 제 기억으로는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세라피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펜드래건이 은근슬쩍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런 식으로 점수를 따가면 되는 것이다!
반면 무영은 턱을 쓸었다.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이라 해야 열 명이 안 넘을 것일진대.’
무영이 기억하는 디아블로의 사제들은 힘이 없다. 숫자도 적다. 기껏해야 열 명 안팎이 제단 근처에 모여 있을 터였다.
그런데 산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한 악신의 추종자들이라?
‘이상하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해야 실력 있는 성기사 한 명이면 정리될 일이었다.
하지만 세라피나에게 보고가 왔다는 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뜻.
‘자멸의 언덕에 내가 끼친 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비효과가 크다지만, 무영의 모든 행동은 디아블로의 제단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갑자기 사교도의 세력이 커졌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허나, 걸리는 게 있긴 하였다.
‘스노우.’
무영에게 있어서도 유일한 변수.
그래, 스노우는 변수다.
그녀가 그곳에 정말로 있다면 자멸의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세라피나가 웃는 낯을 지우며 말했다.
보고가 왔다는 건, 일종의 SOS다. 그곳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대처하기 힘들다는 것.
현재 세라피나가 끌고 온 병력은 이천여 가량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전력인 셈이다.
무영 역시도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너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무영은 스노우가 껄끄러웠다.
그녀가 무영을 도우려하는 이유를 몰랐고, 어째서 굳이 접선을 해온 것인지도 불투명했다.
하지만 나만의 검을 세우겠다고 다짐한 순간, 그런 걱정이 전부 날아갔다.
지금의 무영은 과거와는 다르다.
그러나 스노우가 바라는 무영은 과거의 무영일 수도 있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기다리고 있도록.’
무영의 눈빛이 더욱 스산하게 잠겼다.
시체가 넘쳤다.
썩은 내가 요동을 했다.
대지 역시 죽었다. 주변에 모든 풀과 나무가 검게 물들고 갈라졌다.
자멸의 언덕은 낮은 산들이 굽이굽이 쳐있는 곳이었다. 항상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으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 하여, 그 위험성을 알리고자 ‘자멸의 언덕’이라 불렀다.
확실히 주변엔 안개가 자욱했다.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정화의 의식을 시작하세요.”
세라피나가 말하자 사제들이 튀어나왔다.
주변에 놓인 시체는 이백여구는 될 듯싶었다.
이윽고 땅과 구름, 바다의 사제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화를 시작했다.
안개가 사라지고 썩은 내가 조금씩 가셨다.
적어도 대지는 안정화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정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어어어어!
푹!
신성력이 닿자, 시체가 일어났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제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다.
“언데드! 언데드입니다!”
“왜 언데드가 신성력을······!”
세라피나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기사들은 앞으로!”
검을 꺼내며 세라피나가 외쳤다.
사제들은 지켜야 한다. 사제들이 모두 죽으면 이 깊은 언덕을 헤쳐갈 수 없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무영은 조용히 비탄을 쥐었다.
적어도 성기사의, 사제들의 신성력은 언데드에게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언데드들이 그 신성력을 흡수하고 강해졌다.
신성력이 담긴 검에 피부가 베이면 빠르게 재생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내겐 달려들지 않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언데드들이 무영을 피해가고 있었다.
막상 비탄을 꺼내들었으나 수백의 언데드가 기적처럼 무영이 있는 영역에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두려운 무언가를 피해가듯이.
억지로 무영이 달려들어 언데드의 수급을 베었다.
그러자 언데드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내 신성력은 통하는군.’
무영은 비탄과 가루가 된 언데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실험을 위해 신성력을 비탄에 담았다.
다른 성기사나 사제의 신성력은 흡수하면서, 무영의 신성력은 극독처럼 반응한다.
무영이 가진 신성력의 근원이 대천사 가브리엘이기 때문일까?
쉬이익!
푹!
모두가 당황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어 언데드의 머리를 꼬챙이처럼 꿰뚫었다.
슉! 슈슈슉!
이윽고 수십 발의 화살이 동시에 떨어졌다.
“신성력을 사용하지 마라! 저 언데드들은 신성력을 흡수한다!”
그 틈을 타, 한 명의 여인이 기다란 파란 머리를 흩날리며 등장했다.
역시 세라피나와 같은 종의 백마를 타고 있었는데 거대한 장궁을 사용하며 언데드를 격살했다.
‘이단 심판관 라미엘라.’
새로 나타난 여인은 일곱명의 이단 심판관 중 하나였다.
동시에 라미엘라의 뒤로 수천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능수능란하게 언데드의 목을 자르며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했다.
“후우!”
라미엘라가 마지막 언데드의 미간에 화살을 박아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미엘라!”
언데드가 정리된 후, 세라피나가 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라미엘라 쪽을 향해 다가갔다.
세라피나는 반가운 기색이었지만, 라미엘라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오랜만······.”
“세라피나. 병사들을 다 죽일 생각인가요?”
쏘아붙이는 말에 세라피나도 미소를 지웠다.
“다 죽이다니요?”
“상황판단이 이렇게 느려서야! 당신도 언데드들이 신성력을 흡수하는 걸 보지 않았나요? 그런데 아무런 명령도 안 하고 있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나갔을 거예요. 알고 있나요?”
“아······.”
세라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뻔히 봤으면서 당황한 나머지 판단이 늦어버린 것이다.
1초가 늦을 때마다 한 명씩이 죽어나간다.
라미엘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 손실이 날 뻔했다.
“정신 차리세요. 이곳은 전장입니다.”
“라미엘라, 명심하겠습니다.”
“정화의 의식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됩니다. 시체들이 언데드가 되는 수가 있으니까요.”
“언데드에게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그건 저도 아직 몰라요. 디아블로의 사교도들이 이곳 자멸의 언덕에 숨어있다는 사실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어요.”
라미엘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신을 죽이는 창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사교도에 대해선 라미엘라도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세라피나. 합류지점으로 함께 이동하지요.”
“알겠습니다.”
“과거의 당신은 가장 우수한 성녀 후보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판단을 잘 내려야하는 심판관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
세라피나가 입을 닫았다.
라미엘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장 우수한 성녀 후보였으면 뭐하나. 지금은 어리버리한 심판관일 따름이다.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 찰나, 라미엘라가 한 마디 더했다.
“그러고 보니 퍼스트 나이트를 들였다고요? 그는 어디 있죠?
라미엘라의 옆에는 2m가 넘어 보이는 거구가 있었다.
거대한 대검을 든 기사. 일당백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는······.”
세라피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없었다.
무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설마 심판관을 두고 도망간 건 아니겠죠?”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왜 이곳에 없지요?”
“그건······.”
세라피나가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있었건만, 그 사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라미엘라가 있는 힘껏 비웃었다.
“후후, 정말 형편없군요.”
“잠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돌연 펜드래건이 나섰다.
같은 심판관의 대화치곤 너무 날이 서 있었던 탓이다.
“그대는?”
“나는 펜드래건! 세라피나님의 퍼스트 나이트 후보였던 자요.”
라미엘라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대가 퍼스트 나이트는 아니란 말이군요?”
“그건 그렇소만, 하여간 진짜 퍼스트 나이트는 어딘가로 도망갈 사람이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지.”
“그런데 왜 이곳에 없는 거죠?”
“그건 나도 모르오. 하지만 부디 말을 가려줬으면 좋겠군. 둘은 같은 이단 심판관이 아니요? 듣기 좋지 않소.”
“우리끼리의 애정표현일 뿐이에요? 안 그런가요, 세라피나?”
세라피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선 펜드래건만 이상해진 꼴이다.
더 나서면 자신의 이미지만 이상해진다는 걸, 펜드래건도 알았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펜드래건님. 부디 낄 곳과 안 낄 곳을 구분해주시길.”
라미엘라가 말머리를 돌렸다.
펜드래건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억지로 감정을 절제하며 세라피나에게 묻자, 그녀가 힘없이 답했다.
“예······ 그런데 가엘님을 못 보셨는지요?”
“못 봤습니다.”
“어디를··· 가신 걸까요?”
“······.”
세라피나는 뭔가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갑자기 사라진 남자 타령이라니.
자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세라피나의 옆을 지킬 텐데 말이다.
문제는 그것을 지금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펜드래건은 입을 꾹 닫았다.
무영은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은밀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쫓는 대상은, 무영이 바라고 머지않던 이들이었으니까.
죽은 나뭇가지가 거칠게 흔들렸다.
덩달아 무영의 심장도 거세게 뛰었다.
지금 무영을 피해 도망가는 자들.
세라피나와 사제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존재들!
‘살수림!’
무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43. 살수림(2) > 끝
ⓒ
< 43. 살수림(完) >
얼마나 기다렸던가. 얼마나 고대했던가!
숨 막히게 달려왔다.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걷고자.
무영의 목표는 오로지 웡 청린이었다. 나머지 살수들은 웡 청린의 희생양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웡 청린은 아무래도 다수의 살수들을 이끌고 자멸의 언덕에 당도한 모양이었다.
“······.”
살수들은 말이 없다. 대신 하나의 명령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행동양식은 너무나도 뻔하다.
추격자가 있다면, 배제하는 것!
무영은 숨지 않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살수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들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섯 살수가 자리에 멈춘 채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도 지그시 그들에게 눈빛을 주었다.
‘100번대 살수.’
익숙한 얼굴들.
과거 무영과 함께 수련한, 어쩌면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자들.
100번 대의 살수라면 어지간한 강자들도 암살이 가능한 수준이다.
상급 살수로 분류되며, 그 위엔 10명으로 이루어진 ‘대살수’와 웡 청린이 존재할 뿐이었다.
100번 대의 살수 다섯이 모이면 한 명의 대살수 몫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살수는 홀로 인류 10강을 암살할 수 있다.
무영 역시 과거엔 대살수였다.
하지만 그냥 대살수가 아니다. 웡 청린을 죽이고 0번이 되었다.
100번 대의 살수 다섯이 모인다고, 무영을 상대하진 못한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무영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들을 세뇌시킨 건 웡 청린이다. 수년, 수십 년간 축적하여 설령 세뇌가 풀리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순 없다.
그나마 무영은 매우 특별한 케이스였다.
수천, 어쩌면 수만 명 분량의 상태창 시계를 수집했다.
상태창 시계는 그 사람을 가리키는 나침판이다. 그들의 정보, 그들이 걸어온 모든 길이 적혀 있다. 무영은 그것을 읽었다. 그러면서 자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숨만 쉬는 인형과 다를 바 없다.
촤아아아악!
수많은 언덕들이 굽이쳤다.
모든 언덕엔 각기 다른 시련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피나와 라미엘라는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러니 저러니 하더라도 둘은 이단 심판관.
수십만 뮬라란에서도 고작 일곱뿐이 없는 존재였기에, 반나절 만에 합류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아! 라미엘라님, 세라피나님!”
“심판관께서 오셨다! 그것도 두 분이나!”
“우린 이제 살았어!!”
모두가 환호했다.
합류지점은 처참했다. 중상을 입은 병자들이 고통에 찬 심음을 흘리며 널려있었다. 제대로 된 치료가 쉽지 않아 겨우 현상유지만 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매우 피로해보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오는 적들과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공포가 그들에게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온 탓이다.
신성제국의 힘이, 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이단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반나서 반갑습니다. 심판관 라미엘라님, 심판관 세라피나님.”
“헤브너 성기사단의 부단장이군요. 당신이 이곳을 지휘하고 있나요?”
세라피나가 먼저 물었다.
그러자 부단장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옷은 넝마가 되어있고, 팔엔 부목을 하고 있었다.
“전 지휘관인 투스 단장님은 전투 도중 저희를 위해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단장인 제가 부족하나마 이곳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말, 처참하군요.”
세라피나가 아니었다.
말에서 내려온 라미엘라가 쓴 소리를 내뱉었다.
“면목 없습니다.”
부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자멸의 언덕으로 출발한 성기사와 사제들은 대략 만 명 정도. 그만큼 뮬라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일이었다.
헌데 지금 이 꼴은 뭐란 말인가.
뮬라란의 위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패잔병.
만 명이 오고 절반도 안 남았다. 게다가 대부분은 부상을 입었다.
즉각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이천여 가량.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대체 어느 이단종교가 이만한 힘을 지녔는지요?”
세라피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단종교는 토벌해야할 대상이다. 그럴진대 역으로 당했다.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부단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디아블로를 아십니까?”
“문헌상에 존재하는 악마가 아닙니까?”
72마신이나 그 휘하의 악마들 중엔 디아블로의 이름을 가진 자가 없었다.
하지만 고대의 문헌을 보면 간혹 등장해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었느니 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디아블로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의 마신입니다. 어쩌면 상상속의 악마일지도 모르지요. 본래라면 디아블로의 힘은 전승되지 않았어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사교도의 한계 아닙니까?”
“예. 존재하지 않는 신, 혹은 악신은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걸 극도로 꺼려하지요. 때문에 추종자들도 힘을 가진 이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꿀꺽!
부단장이 침을 삼켰다.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마녀가 있습니다. 검은 날개와 하얀 날개를 동시에 지닌 마녀가······ 사교도들은 그 마녀를 ‘신녀’라 부르며 추앙합니다.”
검은 날개와 하얀 날개!
세라피나가 흠칫 놀랐다.
재빨리 안정을 되찾았지만, 심장이 뛰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두 쌍의 날개를 지녔단 말입니까?”
“예.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입니다. 형용할 수 없는······.”
부단장이 몸을 떨었다.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영님과 비슷해.’
그러나 무영은 세 쌍의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영은 악신을 추종하지 않는다.
그 힘은, 그 신성력은 숭고함 그 자체였으므로.
물론 날개를 지녔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돕는 곳이 있습니다.”
라미엘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매우 심사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단을 돕는 곳 또한 이단이지요. 모두 극형으로 다스려야합니다.”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곳은 인류의 가장 깊은 어둠. 혹시, 살수림을 아십니까?”
“······ 살수림이 관계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라미엘라의 언사가 조심스러워졌다.
모를 리 없었다.
살수림은 인류의 어둠이다.
온갖 추악한 감정이 모여 탄생한 곳이 그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곳의 진정한 실체를 모른다.
철저한 점조직. 뮬라란조차 수십 년간 그곳을 파헤쳤지만 겉만 훑었을 뿐이었다.
몇 명의 조직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몇 개의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든 게 불명이었다.
“중요 사제들과 기사들이 암살당했습니다. 저도 살수 한 명에게 습격을 받고 부상을 입었지요.”
그의 말엔 자신이 없었다.
이름 있는 기사단의 부단장쯤 되는 자가 전의를 이미 상실한 것이다.
실제로, 살수림에게 노림을 받아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있다손 치더라도 얼마 안 있어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 번 노린 이는 수년,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노린다. 그 집요함은 치를 떨 수준이었다.
부단장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살수림이 노리는 이상 오래 가진 못할 것이라고.
“조심 하십시오. 주변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살수림의 살수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목숨을 노리니까요.”
라미엘라와 세라피나가 표정을 굳혔다.
하필이면 살수림이라니!
뮬라란에서 거의 유일하게 손을 못 댄 조직이 그곳이다.
살수림의 규모는 어지간한 거대집단을 방불케 할 정도라고 ‘추정’되지만, 정작 그 실체가 없었다.
당연히 알려진 정보 역시 한정적이다.
이제부터 디아블로 제단과 함께 ‘그림자’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적을 견제하고 경계하며 하루하루 몸을 떨어야 했다.
그만큼 살수림이란 이름 세 글자가 가져다주는 파급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촤아악!
피가 튀었다.
튄 피가 얼굴에 묻었다.
무영은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살수들이 숨어있는 곳을 습격하고 또 습격했다.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 곳은 뻔했다.
외인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숨겼지만, 무영은 이미 40년이란 시간 동안 살수림에 몸을 담았던 바가 있었다.
살수들이 몸을 숨길 장소를 읽어내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더불어, 웡 청린이 있을 곳을 알아내려면 그들의 ‘피’가 필요했다.
‘피는 매개체지.’
웡 청린은 강력한 살수에게 그 이상의 금제를 걸었다. 육체와 영혼 전부를 속박했다. 피는 그 세뇌의 매개체와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약점이 되었다.
강력한 살수들이 지닌 피는 웡 청린이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강력한 금제를 가할 때, 웡 청린 본인의 피도 섞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만난 살수들은 모두 급이 낮았다.’
그들은 단편적인 명령만을 가지고 단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곳, 자멸의 언덕에 있는 살수들은 급이 다르다.
무영은 살수들의 피를 채취하고 정제했다. 그리고 웡 청린의 피만을 추출해 최대한 모으기 시작했다.
문제는 확실하게 움직이려거든 족히 50명분의 피를 모아야 한다는 건데······.
‘웡 청린. 살수림 전부를 끌고 온 것이냐?’
그 부분이 말끔히 해결되어 있었다.
자멸의 언덕에 숨어있는 살수의 숫자가 상상이상이었다.
애당초 웡 청린이 살수림의 주요전력들 전부를 끌고 온 듯싶었다.
‘단순히 신을 죽이는 창만을 바라는 건 아닌 모양이구나.’
무엇을 노리는 지 무영은 모른다.
이곳의 모든 건 변수 그 자체였으므로.
굳이 생각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웡 청린은 실수를 한 것이다.
평소처럼 소수로만 움직였어야 했다.
모두를 끌고 온 덕분에 무영이 움직이기가 편해졌다.
지금쯤 웡 청린도 이변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수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도망칠 것이냐, 아니면 싸울 것이냐.’
하지만 그래도 늦었다.
무영은 착실하게 웡 청린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의 예술.’
죽은 살수가 되살아났다.
더욱 강력해진 모습으로!
무영의 수족이 되어 움직일 터였다.
기른 개가 주인을 문다. 어떠한 기분일까?
파파파팍!
순간 하늘에서 비수의 비가 내렸다.
족히 수천에 달하는 비수가 비가 내리듯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영은 급히 몸을 틀어 ‘가시화’ 스킬을 전개했다.
수우욱.
무영이 막아내기 무섭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가시화 스킬로 방어가 견고해졌대도 강력한 일점의 공격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촤라락!
무영은 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비탄이 허공을 가르자, 검은 옷을 입은 살수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살수가 착용한 복면이 반으로 잘려 떨어졌다.
마냥 허공만을 가른 건 아니었다.
살수의 얼굴을 보고, 무영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웡 청린의 선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자를 보냈다는 건 도망이 아닌 싸움을 택했다는 의미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망쳤다면 도리어 실망을 했을 것이었다.
‘대살수. 10번.’
무영을 노린 이는 대살수였다.
살수림을 대표하는 10명의 살수 중 한 명!
게다가 대살수들은 특히 서로를 잘 알았다. 서로의 정신이 일정부분 공유되어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정말로 가족을 만난 기분이었다.
무영은 목구멍에 넘쳐흐를 것만 같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오랜만이로구나.
< 43. 살수림(完) > 끝
ⓒ
< 44. 웡 청린(1) >
울컥!
대신 피를 토했다.
대살수 10번. 놈의 몸속에는 무수히 많은 바늘이 있다. 처음 화려한 공격으로 이목을 분산시키고 공격을 한 뒤, 그조차 막히면 손등의 피부 안에 있는 장침을 날려 혈을 공격한다.
‘여전하군.’
가까스로 피해냈으나 암습을 막았다는 게 중요하다.
대살수는 인류 10강을 상대하고자 만들어진 그림자.
다만, 어디까지나 ‘암살’에 주안을 두고 있다.
당연히 암습이 통하지 않으면 그 기대치가 현저하게 낮아진다.
무영이 과거 살수림을 지울 수 있었던 이유다.
그들이 암습을 할 만한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고 정면으로 대부분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무영은 당시에도 네 가지 클래스가 있었던 탓에, 정면 대결도 크게 약한 편이 아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영도 죽었다. 혼신의 힘을 담아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 덫을 웡 청린이 가볍게 꿰뚫어본 탓이었다.
‘이제 덫은 필요 없다.’
만약 정면으로 대살수가 인류 10강을 죽일 수 있다면, 인류 최강의 집단은 살수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상을 인지하고 바로 앞에서 싸울 경우 대살수 다섯이 모여야 마찬가지로 10강 중 하나를 처치할 정도다.
그 또한 용군주 한성과 같은 자들은 아예 논외로 쳐야하겠지.
그리고······ 무영의 무력은 10강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단순한 계산이고 모든 능력을 사용한다면 능히 최상위권에 속할 정도일 것이다.
덫을 파고 상대가 걸리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
무영이 찾을 것이다.
무영은 사냥감이 움직이는 모든 길을 꿰고 있었다.
이제는 반대로 웡 청린이 무영을 잡고자 덫을 파야 했다.
입을 쓸었다.
한 번은 일부러 당해주었다.
대살수끼리의 인사와 같은 것이었다.
“제대로 하지.”
하지만 인사는 한 번이면 족하다.
천천히, 비탄을 뽑았다.
스릉!
어느덧 하늘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지막한 황혼 속에서 무영의 검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황야.’
세계가 이윽고 무영의 색깔로 물들었다.
거센 모레바람이 불어닥쳤다.
파아악!
무영은 가브리엘의 날개가 펼쳐졌다.
무영의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돋아났다.
촤촤촥!
10번이 이상을 느끼곤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등에서 무수히 많은 장침이 쏟아졌다.
강력한 극독과 마력이 덧씌워져 있어서, 어지간한 피부는 단번에 뚫어버릴 것이었다.
무영은 자신의 몸을 날개로 감쌌다.
가브리엘의 날개는 ‘정의’를 대변한다. 무영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는 모든 힘이 이 날개에 깃들어 있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악!
10번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전신을 팽이처럼 돌렸다.
수천, 수만 개의 장침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살상용. 10번의 주특기이자 최강의 공격이었다.
이 수법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족히 천은 헤아릴 것이다.
무영은 날개를 풀었다.
그리고 비탄을 들어 그 공격 모두를 맞이해주었다.
8배속으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비탄이 수만에 이르는 장침을 하나하나 베어냈다.
가히 신기라 칭할 움직임.
말 그대로 정면대결이 따로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영은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하지만 무영의 눈은 계속해서 10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밖에 안 되느냐?
꾸짖음이었다.
그러자 10번의 전신에서 수많은 바늘들이 꿈틀댔다.
바늘이 전신을 자극해 10번을 각성시켰다.
위험부담이 큰 기술. 수명을 족히 10년은 깎아먹지만 그만큼 육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10번의 최강기술이었다.
본래라면 암습이 실패한 시점에서 10번은 도망쳐야 했다.
모든 살수의 지침이 그러하다.
그런데 10번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이곳은 무영의 결계 안, 황야의 중심부다.
모든 본질을 극대화 시키는 장소.
이곳에서 무영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족히 2m에 가까운 거구와 하늘까지 닿을 듯 거대한 세 쌍의 날개!
비탄도 몸에 맞춰 크기를 늘렸다.
반면······ 10번은?
“내가 두렵나?”
10번은 그대로다. 하지만 그의 혼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무영은 알 수 있었다.
무영은 비탄을 놀렸다.
10번이 막아섰으나, 역부족이다.
무영이 날갯짓을 하자 그 방향으로 강렬한 태풍이 불었다.
수십 개의 돌개바람이 일어나 10번을 강타했다.
애당초 정면대결에서 10번은 무영을 이길 수 없다. 황야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10번의 전신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죽음의 예술.’
이윽고 바람이 멎었다.
바닥엔 고기조각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그 상태에서 무영은 만들기 시작했다.
10번의 영혼을 접하고 그의 밑바닥을 훑었다.
그의 본질을 찾아주고자 하였다.
<대단합니다! 데스로드가 전율합니다!>
<예술점수······.>
솨악!
무영은 점수를 지웠다.
누군가의 평가를 위해 만든 게 아니다.
평가를 받고픈 마음도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무영과 살수들을 위한 일이었다.
오로지 무영과 살수들만이 알 수 있는 소리 없는 노래였다.
캬아아아악!
살조각이 뭉치며 한 가지 형상을 만들었다.
언뜻 보면 대형견의 모습이다.
그 크기가 어지간한 성인어른만 하다는 게 문제지만, 복슬한 털과 꼬리가 달려 있었다.
털은 강철마냥 단단했다. 닿는 순간 모든 걸 뚫어버릴 정도였으며, 개는 전신의 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10번은 개를 좋아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개는 10번이 15살이 되던 해 죽었다.
개로선 장수를 했다 할 수 있겠지만, 10번은 죽은 개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
하지만 정작 10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영은 그의 영혼에 새겨진 개 한 마리의 모습을 겨우 발견했을 따름이었다.
“너의 본모습을 찾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무영은 손을 뻗었다.
개의 머리를 쓸었다.
강력한 털이 한순간 부드러워졌다.
모든 걸 꿰뚫어버려야 정상이지만 무영만은 논외였다.
“앞으로 너를 텐이라 부르마.”
크릉!
텐이 긍정했다.
이윽고 무영은 황야를 풀었다.
극도의 탈수증이 찾아왔지만 무영은 고개를 한 번 털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무영은 텐을 바라봤다.
텐을 만들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너의 형제들을 찾아라, 텐.”
*
디아블로의 제단이 흔들렸다.
그 앞에서 신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0번이 당했습니다.”
“안다.”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인지는 모른다.
언뜻 들으면 여자 같기도 했고, 남자 같기도 한 그런 목소리였다.
때로는 어른 같으며, 또 때로는 아이와 같아졌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
살수림을 이끄는 주인이 지근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신녀는 개의치 않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는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놈에게선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난다. 나와 비슷한······ 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해.”
“말했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당신의 제자와 같다고.”
“제자?”
그림자가 코웃음을 쳤다.
이후 조롱조로 말했다.
“너는 미래를 보았다고 하였다. 세계의 파멸, 이후 이어진 가짜 신들의 강림. 믿었던 모든 게 사라지고 오로지 거짓만이 남았던 세상을.”
“맞습니다. 당신이 이끄는 살수림은 사라졌고 이후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지요. 세상이, 우주가, 모든 차원이 파멸을 맞이했습니다.”
“나는 그저 그림자일 뿐이다. 네가 나를 찾았고, 너는 내게 소망했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소망이었지. 세상의 파멸을 막는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놈은 세상을 파멸시킬 그릇이라고. 놈은 내 제자 같은 게 아니
야.”
그림자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신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빛과 어둠, 혼돈과 그 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순한 그림자인 당신은 결코 그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그림자가 웃었다.
그는 자신이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영이 그를 알듯이, 그도 이제는 무영을 알았다.
신녀는 미래를 보고 그림자가 패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신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와 대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놈은 나와 같은 그림자다.”
그림자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니 더 깊은 자가 살아남을 것이다.”
*
우어어어어어!
괴물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언데드들이 산을 채웠다.
그 숫자가 족히 일만을 헤아렸다.
“방어진을 구축하세요!”
“사제들을 지키세요!”
세라피나와 라미엘라가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끝이 없었다.
심지어 언데드에게 죽임을 당하면 그 자신이 언데드가 되었다.
신성제국 뮬라란. 신의 축복을 받는 전사들에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성력이란 말 그대로 신성한 힘이다. 죽음과는 상반되며 악한 기운은 결코 침범할 수 없다. 그럴진대 성기사가, 사제가 언데드가 되어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하물며 사제가 죽을 경우엔 언데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어둠사제로 변모한다.
반대로 뮬라란의 사제와 성기사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사용하면 언데드들이 반대로 그 힘을 흡수해 강해졌다.
속 빈 강정.
당연히 제대로 된 싸움이 진행될 리 없다.
“원군은?”
“다른 도시에선 연락이 없습니까!”
세라피나와 라미엘라는 뮬라란 외의 다른 도시에도 SOS를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뮬라란의 이름으로 청한 도움이니 그들도 마냥 외면치는 못할 터.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게 중요하다.
“후퇴!”
“세라피나! 앞은 제가 막겠어요!”
결국 물량전을 당할 수가 없었다.
숫자가 비슷하대도 저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군대다.
계속해서 불어나며 지치지도 않는다.
하물며······ 신성력 또한 통하지 않았다.
“저, 저건 또 뭐야?”
“하늘이······.”
하지만 후퇴도 쉽지 않을 듯싶었다.
하늘이 어느 순간 까맣게 물들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의 모든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캬오오오오오!
“본 드래곤!”
언데드의 최상위종. 용의 뼈로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 본 드래곤!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이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그 위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지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림자들은 빠르게 흩어지며 아군을 죽였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림자를 막지 못했다.
“큭!”
라미엘라가 짧게 비명을 토했다.
그림자의 공격에 옆구리를 내어준 탓이다.
급히 그녀의 퍼스트 나이트가 막았지만,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았다.
‘무영님!’
세라피나가 이를 악물었다.
무영이 없어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다만, 무영은 희망이다.
부디 희망에게 무슨 일이 없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다섯 개의 그림자가 언덕을 넘었다.
그중 둘이 마신의 영역으로 흘러들어가 한 영지를 찾았다.
도깨비를 비롯한 온갖 이종족이 살아가는 곳.
두 개의 그림자가 그곳에 침투하여 학살을 시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대도시로 향했다.
휘광길드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김태환을 찾았다.
나머지 둘은 권왕과 배수지에게로 향했다.
무영과 인연이 있는 자들 모두를 끊어버리기 위한 움직임!
나머지 넷은 뮬라란을 상대했다. 세라피나를 찾고, 요정을 잡았다.
텐과 움직이던 무영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연결 된 실들이 하나, 둘 끊기는 그런 느낌.
‘웡 청린.’
놈도 이제 무영을 안다.
무영은 선택해야 했다.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무영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 44. 웡 청린(1) > 끝
ⓒ
Home »
»
Written By Unknown on Monday, August 21, 2017 | 10:55 AM
Related Articles
If you enjoyed this article just click here, or subscribe to receive more great content just like it.
0 comments:
Post a Comment